머릿속을 헤매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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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업보다 글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해야 할 작업은 그대로 남겨져 있는데. 손이 촥촥 감기 지를 않는다. 마음이 붕 떠있는 것인지. 가라앉은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날마다 한 글자 씩 그리면서 비옴 타입페이스를 마무리 짓으면 그다음에는 어떤 타입을 작업할지 고민하고 있다. 다음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비옴 타입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집중이 잘 안된다. 속도가 안 난다. 틈틈이 진행하고 있다. 8월 말일까지 70-작달비를 끝낼 수 있을지. 8월 말에 포스터 작업이 하나 걸려있고. 또 8월 말부터 히읗에서 실크스크린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을 위한 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하필 다 말에 몰려 있어서. 미리미리 처리해둬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처리하는 수밖에.
최근 두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하나는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구상하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든 생각인데. 스스로 늘 강조하고 있는 기초조형에 대해서 나 자신은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과연. 조금 괴리감이 느껴본 적이 있다. 나는 트렌드에 민감하지도. 그래픽이 세련되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작업들을 되돌아보니 클라이언트에게 어필할만한 매력적인 작업이 없는 것 같다. 음. 부족한 부분은 다시 채워나갈 생각이다. 폰트 디자인에 매달려 있다 보니 그래픽 디자인은 쭉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어쩌면 폰트 디자인에 전념하고 아예 손을 놓을 지도. 지금처럼 아트웍 작업만 취미 삼아 즐길 지도. 최근 국내 그래픽 디자인. 포스터 작업들을 보면 도통 모르겠다. 난해하다. 쫓을 것인가. 말 것인가. 생각을 하다 보니. 어쭙잖게 흉내내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가던 길을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은 배우고. 참고하고. 아직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내 갈 길 가기로.
또 하나는 어휘. 단어의 선택. 나는 글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면 전문용어와 같은 어휘들이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냥 막 써내려 갔지만 앞으로는 좀 정리하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폰트와 서체. 타입. 타입페이스. 영문. 알파벳. 로마자 등 딴에는 각 어휘가 지닌 뉘앙스에 차이를 두고 썼지만 그 기준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라 용어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가지 않아서. 논문을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냥 논문이나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며 적당히 용어들을 정리해봐야겠다. 아마 당장은 무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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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옴 타입페이스 다섯 가지 웨이트의 1차 제작이 끝났다. 11,172자 X 5. 한글만 합해도 55,860자에 달한다. 드디어 다 그렸다. 이제부터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12월까지 2차 검수를 진행하고 글자들을 다듬으면서 완성도를 높여갈 계획이다. 검수도 검수지만. 슬슬 리워드도 준비해야 한다. 비옴 타입페이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책도 좋겠지만 그보다 이 서체를 활용하여 다양한 이야기들과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 꾸준히 글도 써야 하는데 한동안 글을 놓고 있었던 지라 마음이 다급하다.
서체 제작과 검수를 진행하면서도 하루에 한 글자 씩 꾸준히 레터링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전에 모임꼴을 만들고 계신 권진희 선생님이 날마다 레터링 (가제)라는 책을 만들어보자 제안하셔서 틈틈이 레터링의 프로세스를 잡아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터링에 관한 책을 내자면 전문적인 이론서와 실습서 그리고 비교적 가벼워 취미로 접할 수 있는 체험서 정도로 방향이 나뉠 것 같은데 지금 이 #하루에한글자 레터링은 다양한 형태의 한글을 본떠 그릴 수 있는 체험 용도의 교재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보다 앞서 기본적인 조형감을 익히기 위해 기초조형에 대한 내용이 필요하겠지만. 기초조형과 글자 조형의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레터링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글자의 미려한 형태나 완성도를 떠나 본인이 그리고자 하는 글자를 그리는 데 필요한 것은 그 두 가지가 전부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더 나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고 그 판단의 기준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미감이다. 자신이 가진 미감보다 뛰어난 두 가지 사이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준점을 더 높여야 하는데. 미감을 키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훌륭한 작업들을 많이 보고 눈에 익히면 된다. 좋아 보이는 것. 그렇게 눈이 높아지면 자신이 가진 조형감과 미감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똥손이라며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미감을 키우는 것은 쉽다. 하지만 조형감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직접 그리고 또 그리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더 나은 조형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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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링 작업과 서체 제작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며 그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마음처럼 되는 일은 없다. 좋은 기회도 종종 찾아오지만 매번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서 자신만의 목표를 향하여. 뚜렷한 주관을 지키고 차근차근 나아가고자 하지만. 불쑥 찾아오는 불안과 걱정은 피할 도리가 없다. 나보다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수도 없이 많고.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나 자신은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기도 한다. 잘하고 있는 것일까. 더 잘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들은 나를 나아가게 하기도 하지만. 병들고 나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니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탈진하는 것은 아닐까. 흔히 번 아웃이라 하는 그런 상태에 처하지는 않을까. 지금 나는 이러한 일들과 작업들이 즐거운가. 나는 과연 행복한가.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애써보지만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후회한 적은 없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 삶이 불행하다 생각한 적도 없다. 대체적으로 작업은 즐거운 편이고 내 삶도 행복한 편이다. 완전한 것도. 완벽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내린 결론은 나쁘지 않다. 정도..
또다시 작업을 이어간다.
때로는 괴롭거나 고달프기도 하고. 대체적으로 즐겁고 재미있지만. 긴 시간 지속되는 작업이 즐겁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이제 와서 손을 놓고 나가떨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매년 상황은 나아지고 있다. 그 사실에 큰 위안을 얻으면서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비옴 서체를 제작하는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흔들렸었나. 완성을 눈 앞에 두고 당분간 11,172자는 손대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 차라리 2,350자를 기준으로 작업했다면 보다 완성도 높은 서체를 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1,172자가 아닌 3,000자 정도만 하더라도 제목용 서체로서의 사용성은 충분하리라 생각이 된다. 엉뚱한 곳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아무튼. 처음 시도해본 작업에서 실수를 통해 값진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는 보다 효율적으로 작업을 진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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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밤에 깨어 여섯 시간을 뒤척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결국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장황하게 써 내려가던 글을 모두 지우고 말았다. 창 밖이 환히 밝았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그저 내 안에 담아두기로 하자.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은 날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작업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