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감과 우려가 더 큰 프로젝트. 일본식 아이돌의 한국 상륙?
필자는 수년전 어떤 게임(아마도 전함소녀 아니면 함대컬렉션)에 대한 정보를 보고 혼자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얼핏 보기에 그림체가 일본 느낌이라 일본인들이 전범미화하는 게임을 만들었나보다 하고 생각해서, 전범미화게임을 좋아하고 홍보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에 걱정을 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런 종류의 게임은 주로 전함 같은 것에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를 표현할 뿐이지 특별히 전쟁을 미화하는 스토리는 별로 없는 듯 해서 지금은 신경쓰지 않고 있다.
최근 이런 이른바 모에화 게임이 인기를 끌어서 전함, 탱크, 총기 등을 미소녀로 표현한 게임이 많은데, 게임 제작사 입장에서는 뭔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에서 모티브를 얻다 보니까 캐릭터를 많이 만들기에 편한 점이 있어서 좋은 모양이다. 다소 진지하게 생각하면 전쟁의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나라에서 살인 무기 따위에 캐릭터를 부여해서 미화하고 좋아하는 것은 좀 생각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수많은 미소녀 캐릭터를 화면 가득 펼쳐놓은 것은 뭔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조금 무섭다 라는 이미지가 있다. 어쨌든 이런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취향을 존중해주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잘못일 수 있다. 다만 다소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AKB48이라는 일본 걸그룹을 처음 봤을 때 가졌던 느낌은 모에화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과 비슷하다. 아무리 남자 입장에서 웬만한 걸그룹은 예쁘기만 하면 다 좋아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아이돌 기획사 입장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럴만 했겠다 하고 이해가 가고 아이돌로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부감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한국에 AKB48과 비슷한 컨셉의 아이돌이 생긴다면 그 아이돌을 보고 어디가서 요새 이 아이돌이 괜찮다 하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2017년 11월 29일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서 2018년 새로운 프로젝트인 프로듀스48이 공개되었다.
사전에 MAMA in Japan에서 AKB48과 I.O.I의 합동무대가 나온다고 계속 광고해서 두가지 의아함을 주었다. 첫번째 의문은 프로젝트가 끝난 I.O.I가 어떻게 나온다는 걸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일본 공연에서 일본 아이돌과 한국 아이돌이 같이 공연할 경우 분명 안무 면에서 심하게 비교가 될텐데 AKB48이 무슨 자신감으로 나오는 걸까 하는 점이었다. 일단 공개된 실체는 AKB48 & 청하 & 위키미키 & 프리스틴 & 프로미스 & 아이돌학교 1반(나띠 배은영 이시안 이해인 조유리)이었다. 먼저 한국 가수들이 PICK ME 무대를 한 후 AKB48이 무대로 솟아오르며 일본곡 메들리를 함께 했는데 최대한 일본 쪽을 배려해서 공연을 준비한 듯 우려했던 만큼 심각하게 비교되는 그림은 아니었다. 프로미스 & 아이돌학교는 거의 백댄서 역할밖에 안 했다. 사실 아이돌학교는 투표 조작 논란이 발생했는데 별다른 해명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Mnet이 대체 무슨 염치로 이해인을 여기에 출연시킨 것인가 라는 점에는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이었다.
AKB48과 프로듀스 101 및 아이돌학교 출신 멤버들의 합동 공연을 보여준 후, 프로듀스 101과 AKB48의 로고가 결합되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런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이라는 발표만 하고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Mnet 측은 "아직 어떻게 활동할지, 어떻게 선정할지 등은 확정되지 않았다." 라며 프로듀스 시리즈처럼 기존 소속사 연습생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AKB48처럼 소속사 없이 지원자들을 받을 것인지 등을 아직 밝히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타이틀을 발표했다는 것은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유닛과 믹스나인도 엄청난 준비를 한 프로젝트인 것처럼 광고했다가 방송이 나가면서 여러 급조한 티를 내는 것을 보면 이 프로젝트도 그냥 일단 던져본 것일 수도 있다.
참가자 모집이 끝났다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Mnet에서 이런 대형 기획을 진행했는데 인터넷상에 프로듀스 차기 프로젝트에 대한 소문이 거의 안 나왔다는 것이 좀 의아하다. 대략 3가지 정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모집이 끝났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앞으로 한일 합작 걸그룹을 제작할 것으로, 한일 양국에 이미 참가자를 모집해서 앞으로 프로듀스식 오디션을 진행할 예정인데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경우 한국 쪽은 기존 프로듀스 101 시즌1과 아이돌학교 탈락 멤버 위주로 나올 가능성도 꽤 높다.
2. 기존의 AKB48, SKE48, SDN48, NMB48, HKT48 등의 그룹 멤버 위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
3. 제작진이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할지 정했기 때문에 참가자는 정해져 있는데 아직 모집이 안 된 상황이다. 말하자면 내정자들을 참여시킬 예정이라 따로 참가 지원을 안 받을 계획이기 때문에 모집은 끝난 상황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2번일 가능성, 즉 일본인 위주의 프로그램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 생각보다 일본 걸그룹 멤버 중에 한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 아이돌 상당수는 기본적으로 걸그룹 준비 하면서 K-POP을 보고 연습을 많이 하기 때문에 K-POP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멤버가 많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AKB48라는 이름을 언급한 점이나 MAMA에서 지나치게 아키모토를 띄워주는 모습 등을 봤을 때 Mnet의 한국 제작진 위주의 진행이 아니라 아키모토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한국에 진출하는 형식일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좀처럼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렵겠지만 앞으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AKB48_staff 트위터를 통한 입장 발표가 있었다. 프로듀스 48은 국민이 직접 아이돌 데뷔 멤버를 선발하는 한국의 프로듀스101 시스템과 일본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의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콘셉트로 전용 극장에서 상시 라이브 공연을 하는 일본 AKB48 시스템이 결합된 프로젝트 프로그램이다 라고 한다.
사실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이 우리나라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아직까지는 성공 사례가 드물다. 아이돌과 팬 사이에 소통을 중시하고 가까이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준다는 것은 취지는 좋으나 위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악수회 중에 흉기 난동 등의 사고도 있었다.
일본이 돈 많은 나라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장기적인 경제 침체로 일본 젊은 세대는 상당히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AKB48은 악수회 등 일반 팬들과 가까이에서 직접 만나는 소통을 중시하고 전용극장에서 꾸준히 공연을 하며 초기에는 주로 일본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실상 저가 전략에 승부를 걸었던 바 있다. 일본의 전체주의적인 문화코드와 잘 맞는 부분도 있었고 이러한 저가 전략이 통해서 일본에서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시스템이 한국에서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이다.
아키모토 야스시는 AKB48, HKT48, SKE48, NMB48, SDN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 비슷비슷한 많은 아이돌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고 있으며 일본 대중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AKB48의 운영사 AKS는 이미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대만 등에서 현지 사업자와 합작하여 해외 자매 그룹이라는 형태로 진출해 있다. AKB48은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하는데,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에 전용 극장을 차려 놓고 상시 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은 침체되어있던 일본 걸그룹 시장에 중흥기를 열었으며 많은 인원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음악 방송, 예능, 드라마, 패션쇼, 잡지, 광고, 영화, 연극, 라디오, 아침 정보 방송,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심지어는 경마 방송이나 파친코에서까지 볼 수 있다. 하지만 AKB48이 2010년에 대뷔해서 꽤 시간이 지나다보니 최근에는 그룹의 인기와 영향력이 예전같지는 않다.
아이돌이라면 최소한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편견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로 얼굴만 보고 뽑은 수십 명의 소녀들을 등장시켜 화려함보다는 풋풋함으로 승부한다는 실험은 상당히 성공하긴 했으나 철저히 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프로듀스 101이 AKB48 총선거를 표절했다는 시선도 있으나 AKB48과 달리 프로듀스는 애당초 기획사 연습생 위주로 뽑아서 진행했기 때문에 성격이 많이 다르다. 사실 프로듀스보다 아이돌학교가 더 많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AKB48이 일본에서 사회 현상이라고 불릴 만한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이들의 독특한 총선거 시스템에 있는데, 이들의 총선거는 일본 공중파에서 생중계하고 개표 이벤트가 진행되는 스타디움에 수만 명의 팬이 모이는 등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보통 총선거는 앨범에 들어갈 수십 명의 멤버를 뽑고 1위 멤버가 센터가 된다는 것인데, 한 명의 팬이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CD를 사면 CD 1장에 투표권이 1장씩 들어있다는 충격적인 시스템으로 CD 판매 뿐 아니라 광고비, 가이드북 판매 등 여러 가지 희한한 방법으로 수백억 엔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AKB48의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사실 수십 명의 소녀가 떼로 몰려나와서 뭔가 무대를 한다는 것이 일본이 아닌 곳에서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구나 한국 아이돌은 경쟁이 과열되면서 상당한 실력자들만 데뷔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식 아이돌은 대체로 외모적으로도 뛰어나고 가창력과 퍼포먼스 모두 세계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빌보드를 호령하는 해외 뮤지션들이 그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찍어내는 아이돌 상품이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얘기다. 한국식 아이돌에게 익숙한 우리들에게 실력보다는 풋풋함, 미모보다는 친근함이라는 AKB48의 컨셉과, 칼군무와는 거리가 먼 퍼포먼스가 아직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프로듀스 101 이후 일본식 시스템에서 모티브를 얻은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방영되었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거부감이 덜할 수도 있다.
아키모토의 프로젝트는 한국식 아이돌 육성과는 달리 장기적인 보컬과 안무 교육 따위는 전혀 안 하고 있는데, 사실상 연습생이라기보다 일반인에 가까운 멤버 구성을 계속하고 있으며 노래와 춤보다는 비주얼 위주로 멤버를 뽑아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주얼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돌의 비주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이웃집 소녀같은 친근함이라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어쨌든 데뷔 초기엔 가창력과 군무가 부족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어느 정도는 하게 된다. 문제는 Mnet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아키모토의 스타일로 진행될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초반에 실력이 부족한 멤버들의 공연을 얼마나 인내심을 가지고 봐줄 것이냐 하는 점인데, 아이돌학교의 경우를 보면 분명 인내심이 깊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일본인들도 아키모토에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진행한 일련의 프로젝트가 J-POP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는 시선이 있다.
아이돌의 가창력, 퍼포먼스만 놓고 보면 K-POP은 아주 예전부터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K-POP 자체가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등 해외에서는 상당히 마이너한 장르인 것이 사실이다. 최근들어서야 방탄소년단 등이 알려지며 조금씩 K-POP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는데 한국 아이돌 프로젝트가 J-POP 시스템과 연계되면 오히려 실력적으로 하향평준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아직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공개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예단할 수는 없다. 한국 아이돌 팬들은 대체로 아이돌은 좋아해도 소속사는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큰 이유가 회사는 팬들을 돈 나오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아이돌과 가까운 곳에서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궁극적으로 한국 아이돌 시장도 가까이에서 만나는 컨셉 위주로 진화해갈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프로듀스 48이 크게 성공할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 것은 그동안 Mnet이 보여준 모습을 봤을 때 단순히 기존의 AKB48식 시스템을 그대로 한국에서 해보려고 하는게 아닐까 싶기 때문인데, 아이돌학교와 믹스나인의 시청률 굴욕을 생각해보면 전망이 극히 어둡다. 새로운 도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식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충분히 고민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K-POP과 J-POP의 만남이 의외의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