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나 모네, 샐리 그리고 소울푸드
나의 만 서른 살은 다니던 직장에서 지칠 대로 지쳤고 한국에서 계속 살아봤자 뻔하다 싶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환멸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대학생 때부터 가져온 꿈과 관련된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입학과 관련된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재정보증을 위한 최소한의 돈 마저 없는 상황. 대신 당장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쉬운 옵션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한국인들이 청소를 많이 한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육체노동(청소)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 나는 호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청소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첫 근무지는 타운즈빌(Townsville)이라는 비교적 작은 도시의 쇼핑몰 내에 위치한 대형마트 Woolworth에서 홀로 야간 청소를 맡게 되었다. 그렇게 5개월을 먹고, 자고, 일하고, 간간히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극히 단조롭고 호주 날씨만큼이나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다 시드니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경제적 측면으로 보면 타운즈빌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워킹홀리데이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의 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온 터라 결정을 내리기까지가 쉽지 않았다.
집주인 부부는 호주인 아저씨와 필리핀 아주머니였는데 이 아주머니(샐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를 몇 번 기독교인 모임이나 교회 예배에 데리고 가셨다. 기독교인 모임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 필리핀, 중국, 태국, 한국, 홍콩-에서 결혼 이주 혹은 가족과 이민 온 여성들로 구성된 예배와 친목도모를 위한 식사 모임이었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맛있는 아시아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기에 기분 좋게 따라나섰던 기억이 난다.
타운즈빌에서 지내는 동안 샐리는 여러모로 나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셨고 챙겨주셨다. 그중 기억나는 일은 청소일로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지속되어서 마사지로 풀어줘야 했으나 높은 호주 물가는 둘째로 하고 그 동네 어디에 마사지샵이 붙어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방에서 한쪽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온 나를 보시고는 자신의 집인 2층으로 데리고 가서 필리핀산 호랑이 연고와 비슷한 기름을 바르고 마사지해 주셨던 것은 아직도 따스한 손길로 기억된다.
내가 이 집으로 들어온 첫 날, 짐 정리를 마치고 방 안 침대 위에서 홀로 식사를 마쳤을 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고 그곳에 샐리가 라면 그릇 같은 것을 건네주셨다. 웬 파스타가 있었고 저녁을 먹은 터라 내일 먹어야지 했다가 맛이 궁금해서 한 입 먹는 순간,,, 헉... 맛있다. 한국에서도 맛있는 파스타들을 먹으러 다녔지만, 이건 전혀 먹어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마카로니 치즈의 다른 버전(?)인가 싶지만 또 다르다. 이후에 이름을 물어봤을 때 샐리는 '튜나 모네(Tuna Mornay)'라고 했고 가끔 이 음식을 만들 때 나에게도 한 그릇씩 가져다주셨다. 너무 맛있어서 언젠가 샐리에게 레시피를 물어봤는데 아주 쉽다면서 나중에 자신의 주방에서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셨다. '튜나 모네'는 말 그대로 참치를 넣은 파스타이다. 참치 외에도 브로콜리, 양파, 토마토와 같은 야채와 치즈를 넣어 만든다. 참치를 넣은 파스타는 낯설었지만 어떤 음식이든 참치가 들어가면 맛있다는 말은 진리인 듯하다. 처음 맛 본 '튜나 모네'가 마카로니 류의 숏파스타(short pasta)여서인지 아직까지 처음 먹었던 기억을 살리고 싶어서 숏파스타를 쓰려 하지만 다른 면으로 해도 맛있다. 치즈는, 샐리 말로는 어떤 치즈든 상관없다지만 그녀는 주로 체다(Cheddar)를 이용했다.
이래저래 육체노동의 일이 끝나면 피곤함을 풀기 바쁜 일상이 반복되며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타운즈빌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샐리가 시간 될 때 함께 튜나 모네를 만들어 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내가 떠나기 전날로 약속을 잡았으나 당일날 다른 일로 집에 돌아온 시간이 늦어져서 샐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공동 주방의 냉장고 앞에 섰던 그때, 옆에 낮은 선반 위에 튜나 모네 한 그릇과 그 아래 종이가 놓여있었다. 샐리가 친절하게 손으로 쓴 튜나 모네 레시피가 적힌 메모를 본 순간, 그냥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슬픔, 감동, 미안함, 기쁨 등등이 짬뽕된...
나는 그렇게 홀로 '튜나 모네'를 먹고 다음날 샐리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시드니로 향했다.
이후로 10년이 훌쩍 지났고 '튜나 모네'는 여전히 나의 소울푸드다. 간단하고 쉬운 레시피여서 호주 생활 이후 일이나 학업으로 옮겨다니며 살았던 나라들에서 홀로 있을 때 종종 해 먹거나 혹은 초대 음식으로 만들곤 했다. 이 파스타를 맛본 사람들은 "어, 이거 맛있네.", "야~이거 참 맛있다."와 같이 약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느낌도 내가 처음 샐리 튜나 모네의 첫 술을 떴을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튜나 모네'의 기원은 잘 모른다. 아니 구글링만 해도 나올 정보를 지금까지 굳이 찾아본 적이 없다. 샐리의 레시피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인터넷에 레시피가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음식으로서가 아닌 따스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나만의 소울푸드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