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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닉 Apr 19. 2024

워라밸 대신 빵장밸

<오웰의 장미,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 리베카 솔닛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라는 뜻이다. 1970년대 영국에서 업무와 삶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뭔가 유연하지 못한 느낌이 든다. 업무와 그 외의 시간을 물과 기름처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옆에 사람이 언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만 안다면 워라밸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평가하고 간섭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너 워라밸이 너무 안 좋아 보여... 네 삶도 좀 챙겨"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럴까? 현실은 모호하며 항상 섞여 있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워라밸 대신에 ‘빵장밸’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다. (Bread-rose balance)로 앞 음을 따서 ‘브로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빵장밸’이 더 입에 감긴다. 우선 ‘빵’과 ‘장미’가 무엇인지 정리해야겠다. 빵과 장미를 처음 얘기했던 헬렌 토드는 빵을 ‘집과 안식처와 안전’이라고, 장미를 ‘음악과 교육과 자연과 책’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더해 리베카 솔닛이 조지오웰의 글에 대해 의제 부분은 ‘빵’이고 심미적인 부분을 ‘장미’라고 표현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빵은 육체를 위한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기도 하거니와 정신적으로는 논리적인 로고스적인 측면인 것 같다. 그리고 장미는 심미적이고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인 것 같다. 


워라밸과 달리, 빵장밸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조지오웰의 글에 빵과 장미가 공존하듯이 말이다. 어떤 행위에 100%의 빵과 100%의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워라밸은 어떤 시간적 정의라면, 빵장밸은 추구와 관련이 있다. 만약 하나의 업무 시간을 놓고 보자면 워라밸 입장에서 그것은 ‘워’로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빵장밸로 보게 되면 그것은 빵과 장미의 조화다. 거기서 장미가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장미가 극히 작을 수 있으며, 자신이 의미 있고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일이라 생각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면, 장미가 많이 함유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빵장밸은 워라밸 보다 주관적이며, 당사자가 표현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일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옆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몇 달 동안 하루에 12시간씩 예술 작품을 써 내려간다고 생각해보자. 워라밸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워라밸이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빵장밸로 본다면 그는 자신의 ‘장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밸런스가 잘 맞을 수도 있으며, 만약에 그 작품이 잘 안 팔리거나 판매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빵’쪽이 너무 빈약할 수도 있다. 


이렇듯 빵장밸이라는 용어적 도구를 얻은 나로서는, 앞으로 인생을 설계할 때 더 유연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행위들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으며, 어떤 행위든 어느 정도의 빵과 장미가 섞였는지에 따라서 전체적인 삶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저번 달 독서 모임에 나온 한 개발자를 보면서 많이 느꼈다. 그분은 누가 봐도 워라밸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것이다(모임이 끝난 토요일 밤 10시에 업무를 하러 가셨다). 그런데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만들고 있는 기술이 사회에 도움 될 거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말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업무 속에는 ‘장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그에게 일을 많이 한다고 뭐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의 목표는 이렇다. 


나의 장미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다른 사람이 장미라고 부르는 것을 쫓아가지 않기

필요 이상의 빵에 에너지를 투자하지 않기, 나머지 에너지는 장미를 누리는 데 사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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