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억' 공공미술 프로젝트, 면밀히 고민하자
지난해 말부터 한 수도권 자치구의 공공디자인진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공미술과 디자인에 기여할 수 있다는 벅찬 마음으로 회의에 임했는데요. 하지만 첫 회의의 안건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이고, 여기도 저기도 벽화만 하는구나."
우리 공공미술은 ‘벽화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특정 소재와 장르에 치우쳐 있습니다. 물론 부산 감천마을, 서울 대학로 이화마을 등 낙후된 지역이 벽화로 재생되는 효과를 누린 도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들엔 사생활 침해 등 논란이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 공공미술은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성, 문화성과는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입니다. 특색 없는 조형물과 벽화가 우리 일상공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회 전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이 때, 미술계에 1000억 원짜리 ‘예술 뉴딜’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반기 문화체육관광부 추경예산 사업 중 하나인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이 그것입니다.
관련 지자체 예산을 합해 총 948억 원 규모 전국구 사업으로, 228개 시군구 지자체에 4억 원씩 균등하게 배정돼 이번 회계연도(회계 편의를 위해 설정한 일정한 기간. 1월 1일부터 그해 12월 31일까지) 내 사업공모 및 지원접수, 심사, 예산집행까지 완료하게 됩니다. 미술계에 이 정도의 대규모 예산이 단기간에 투여되는 것을 여태껏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 공공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미술계는 1000억 원 가까운 돈을 얼마 남지 않은 올 회계연도에 모두 집행해야 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빈사 상태에 처한 미술인들을 위한 ‘재난지원금’ 성격이 짙은 문체부의 예산 책정은 반가운 일이나 사업 추진방식이 아쉽습니다. 이는 예산을 회계연도 안에 빨리 소진하자는 행정 편의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할 공공조형물과 설치미술이 공론화 없이 급박하게 추진된다면 이 사업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예술인 일자리 창출과 경기부양 목적이 컸습니다. ‘문화뉴딜’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한국 공공미술의 예술적 방향성보다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을 위한 수혜사업 성격이 강합니다. 하지만 공공미술이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대중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반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한국 경제력에 비해 이번 사업비 1000억 원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공공미술 시장규모가 연간 400억~700억 원 수준이라는 통계를 봤을 때 1000억 원이 더해지는 건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규모에 비해 거대한 공적자금이 투여되기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소위 ‘공공미술꾼’으로 불리는 공공미술 수주 전문인들이 시장교란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작품 선정을 위한 투명하고 공정한 심의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심의제는 공공미술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파수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심의제도에 불만이 끊이지 않습니다. 공공미술의 정기적인 심의제도는 건축물미술작품심의위원회가 대표적입니다. 건축물 미술작품제도는 미국과 프랑스를 본받아 1972년 도입돼 1995년 본격 시행됐습니다. 이 제도는 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 증축 비용의 1% 가량을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1년부터는 미술작품 설치 대신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선택적 기금제도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특정 작가나 특정인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다는 소문 등 잡음이 계속됐고 그 대책으로 최근 심의가 강화됐습니다. 한데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안건 부결율이 높아지자 공공미술에 참여하고자 하는 예술인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부결율이 높아져 시장 자체가 축소되고 작품 설치 대신 기금으로 출연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2011년 이후 기금으로 출연된 금액은 300억 원 정도지만 이를 공공미술 사업에 쓴 액수는 30억 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서울역 공공미술 프로젝트 '슈즈트리'. 지역 주민과 맞지 않은 작품은 공공미술이 아닌 ‘공공흉물’로 변질되어 지역민에게 외면 받는다. [사진=연합뉴스]
공공미술 활성화를 위해 건축물 미술작품제도가 도입된 만큼 공정한 심사 그리고 예술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보입니다. 심사위원의 전문성을 높이고 투명성과 공정성을 제고하는 심사 시스템 고도화, 지역민과 호흡할 수 있는 지역 의견 청취, 그리고 작가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다양한 공공미술 지원 정책이 맞물려야 할 것입니다.
2017년 서울역 공공미술 프로젝트 ‘슈즈트리’ 조형물을 기억하실 겁니다. 지역과, 주민과 맞지 않은 작품은 ‘공공흉물’로 변질돼 외면받습니다. 우리동네미술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단순히 예술인의 일자리 창출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지역성과의 조화, 도시재생적 관점, 도시디자인의 품격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의 면밀한 사업 추진이 필요합니다.
잘 추진된 공공미술 조형물은 도시에 생기를 더합니다. 지역민의 사랑은 물론이고 관광객의 호응까지 얻습니다. 도시를 살리고 예술성이 높은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계속 추진되기를 바랍니다. 미술이 도시와 어우러져 가치를 높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