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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Feb 02. 2022

뉴욕의 상징, 철제 계단

우디 앨런 감독의 2020년 작,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오랜만에 다시 본다. 영화에서 애슐리(엘르 패닝 분)가 뉴욕 아파트 건물 외벽에 있는 철제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씬이 있다. 그 씬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뉴욕이다, 뉴욕...'




생활 쓰레기를 버리러 철제 계단을 처음 오르내리던 그 순간, 내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여실히 깨달았다. 건물 외벽에 대충 붙여 놓은 듯한 계단은 뉴욕의 건물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뭔가 미관을 해치며 흉물스럽기까지 하고 허술해서 쾅 떨어져 보행자를 공격할 것만 같은 철제 계단. 이젠 '뉴욕의 상징'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 계단은 사실 화재 대피용이라고 한다. 뉴욕의 건물들이 대부분 오래되어 실내 화재대피로가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화재 발생 시 사상자가 크게 났고 이에 철제 계단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물의 내부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건물 외벽에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철제 계단이 설치된 건물은 뉴욕에 정말 많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 좀 무섭다. 단단히 고정되어있는 걸까?라는 생각부터, 계단 옆 외벽으로부터 마구 삐져나와 있는 전깃줄에 몸이 닿을랑말랑 한 적도 많다(감전되는 거 아냐?). 바닥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오르내리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이 계단과 연결되는 문은 높이가 참 낮아서 키가 큰 나는 굉음이 날 정도로 머리를 꽝 박아 혹이 난 적도 있다(혹독한 뉴욕 신고식). 그리고 실제로 화재시 비상탈출용도이기 때문에 집 창문과 바로 인접하여 있는데, 나는 때때로 집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오거나, 새벽녘 누군가가 그 곳에 서 있어 눈이 마주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은 실제로도 다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뉴욕의 철제 계단으로 화재대피를 하다가 부실한 계단이 무너져내려 사람들이 추락사한 경우도 있고, 도둑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이 곳을 베란다처럼 쓰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더운 여름날 철제 계단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에어컨이 생긴 지금은 많이들 그러지는 않겠지만).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문 리버를 부르던 곳도 바로 이 철제 계단이다.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익숙해지는 순간 나는 느낀다, 이렇게 뉴요커가 되어 가는 건가.




(p.s. 커버 사진에서 보수 중인 플라자 호텔의 철제 계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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