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끝에서, 끝으로 (4800km 일본 종주기)
(날씨. 흐림 비 옴)
자기 전에 알람을 4시에 해놨고 4시에 눈을 떠 텐트 천장을 본 기억이 뚜렷한데 핸드폰의 시간은 6시였다. 분명 눈이 뻑뻑해 잠깐 눈을 쉬게 해 준다고 잠시 감았는데 어째서 6시 인가.... 밖에 비가 내려서 인지 어제 부상 부위가 조금 시큰거렸지만 최대한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하지만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자리까지 비우지는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비가 개길 기다렸다.
어제 밤새 나를 괴롭혔던 바람은 비를 타고 와서 나의 체온을 착실히 뺏어갔다. 가만히 있으면 더 추울까 처마 아래서 이리저리 걸은 것이 1시간. 산책이 질려 우쿨렐레를 치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린 게 1시간이었지만 미치노에키 오픈까지 아직 한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빗발은 그리 거칠지 않았으나 바람이 매우 셌다.
한참 추위를 버티다 화장실 비데에 난방기능이 있음을 기억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엉덩이를 녹이니 조금 따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몸을 녹이고 밖에 나오니 화장실 앞에 벽이 있어 바람이 막히는 것을 알아냈다. 비록 장소가 장소이지만 어제 잤던 자리에서 계속 있다가는 저체온증에 걸릴 것 같아서 바람을 피해 화장실 앞으로 이동했다. 이곳도 여전히 춥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 그 위치보다는 바람이 덜 불어 조금 나았다.
슬슬 배가 고팠기에 가게 오픈 준비 중이던 미치노에키 직원에게 시설 내에 음식점이 있는지, 오픈 시간은 언제인지 물어보니 10시 30분이라 들었다. 지금은 08시. 아직은 2시간 30분은 더 참아야 했다. 원래 계획은 미치노에키에서 아침을 먹고 비 그칠 때까지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웠기에 손발을 덜덜 떨며 참고 참다 컵라면을 하나 사 먹었다.
비오는 날 따듯한 컵라면 하나
한국에서 컵라면은 제일 만만하고 값싼 한 끼 식사인데 일본은 컵라면이 좀 더 비쌌다. 편의점에서 작은 컵으로 가장 싼 것이 100엔인데 세금 포함하면 108엔이었다. 그나마 내가 고른 게 로손의 PB 상품이라 그렇지 닛신 컵라면 같은 경우 기본이 150엔 160엔씩 했다.
편의점 내에 취식 공간이 없었기에 물을 부어 화장실 쪽으로 돌아왔다. 장소는 비록 보잘것없으나 추위에 떨다 먹는 따듯한 라면의 맛은 썩 괜찮았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눈치가 보여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슬쩍 뚜껑을 덮었다가 지나가면 먹었다.
추위 속 인내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미치노에키가 열렸지만 곧바로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바로 자전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치안 좋기로 유명한 일본이라지만 자전거를 그대로 방치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한다 말인가. 자전거를 잘 잠가 놓는다 해도 패니어에 옷과 캠핑장비 등이 가득 실려 있어 가능하면 내 시야가 닿는 곳에 세워두고 싶었다. 입구 쪽에 세워 놓기에는 이곳 미치노에키 입구 쪽의 처마가 매우 짧아 자전거가 그대로 비를 맞아 불가했고 실내는 직원이 말하길 "자전거는 자전거 주차장에 세워야지 입구 옆쪽에 자전거를 세우면 안 된다." 고 했기에 불가능했다. 자전거 주차장에는 비를 막아줄 지붕이 없었기에 결국은 위험을 감수하고 미치노에키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밖에서 자전거와 함께 떨던가 둘 중 하나였다. 결국 "내 눈 밖의 자전거는 내 자전거가 아니다. "라는 자전거 업계 명언을 따르기로 했다.
한참을 밖에서 떨고 있었는데 내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몇 마디 나누고서 외국인임을 알아채신 어르신은 어디서 왔냐. 나이는 몇 살이냐. 혼자 왔냐.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공부했을 때와 달리 실제 원어민의 말은 조금 빨라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할아버지랑 간단히 얘기하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대화에 가세하여 어디까지 가는지, 외국인인데 자네는 일본어 참 잘하는구나! 등 잡담을 했다. 말을 하니 좀 생기가 돌아 몸이 조금 따듯하긴 했지만 여전히 추워 입이 추위에 덜덜 떨렸다. 하도 떨어서 그런지 옆의 할머니는 이야기를 들으며 중간에 계속 “사무이노카”, “카와이소오”(추운건가. 불쌍해.)를 연발하셨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시던 할머니께서 추운데 따듯하게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고 왜 밖에 있냐고 하시기에 시설 안쪽에 자전거를 대는 것이 불가하고, 밖에 놓자니 자전거를 누가 훔쳐갈까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다 하니 옆의 할아버지께서 그 정도는 가능할 텐데 이상하다며 내가 직원에게 가서 잘 말해 줄 테니 같이 가보자 하셔 할아버지를 필두로 다시 미치노에키로 들어갔다.
이전에 거절했던 직원은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열정적으로 얘기하신 덕분인지 입구 쪽에 세워놓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황제에게 승전보를 알리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화장실 앞으로 돌아가 어르신들께 경과를 보고하니 모두 활짝 웃으시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해주고 쿨하게 떠나시는 어르신들에게 깊은 감사인사를 드리며 나는 따듯한 미치노에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휴게소라기 보단 주민문화센터 같다.
따듯한 실내의 푸드 코트 탁자에 앉으니 긴장이 풀려 그런지 배가 고파졌다. 아까 아침으로 라면을 먹었으니 또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오늘은 시설에서 반나절은 죽치고 있어야 눈치도 보이고 하니 뭐 좀 팔아주자 싶어 간단한 음식을 하나 사 먹기로 했다.
메뉴는 우동, 라면, 돈까스 등이 있었는데 가격은 우동이 제일 싸서 우동을 선택했다. 따듯한 음식이 끌려 키츠네우동으로 메뉴를 결정하고 우동 집으로 가니 메뉴가 자루랑 카케로 나뉘어 있었다. 둘이 무슨 차이인가 싶어 주인아주머니께서 물어보니 자루는 차가운 거고 카케는 따듯한 거라고 말씀하셨다. '분명 부산에서 먹었던 붓카게 우동은 찬 음식이었는데 카케가 왜 차가운 건가.... '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북해도이고 우리나라 사투리처럼 명칭이 지역별로 다르게 부르는가 싶어 주인아주머니 말씀대로 카케우동인 붓카케 우동을 시켰는데, 나온 것은 내가 아는 차가운 붓카케 우동이었다. 분명 주인아주머니는 카케가 따듯한 것이라 했는데 왜 차가운 게 나왔지.... 아무래도 아까 내가 단어를 착각했거나 잘못 들었나 보다.... 좀 더 일본어 실력을 더욱 갈고닦아야 할 거 같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머니 말이 맞았다. 나도 제대로 들었다. 다만 내가 시킨
붓'카케' 우동은 이름에 카케가 들어갔을 뿐 따듯한 카케랑은 상관없는 냉우동일 뿐이었다.)
차가운 붓카케 우동은 내가 원한 메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다. 밖에서 그렇게 추워서 벌벌 떨다 겨우 따듯한데 들어와 놓고 냉우동을 먹다니. 거참...
소박하지만 맛은 꽉 찬 붓카케 우동
부산에서 먹었던 카마타케 제면소에서의 붓카케 우동에는 튀긴 반숙란이 올라가 있었는데 이곳의 우동은 소박하게도 오직 면과 소스와 간 무만 있었다. 그러니까 가격이 싼 것이겠지만. 그래도 보기엔 초라하지만 맛은 낙점이었다. 소스의 색을 보아 간장?? 쯔유?? 인듯한데 맛이 약간 생선 비린내가 나지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면의 식감으로 면을 쪽! 하니 콧등을 쨕! 하고 후려치는 찰짐이 대단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흔한 휴게소 음식 수준으로 생각하고 먹었는데 이 정도의 맛을 보여주는 것을 보니 '역시 음식은 본고장에서 먹어야 하는구나. ' 했다.
비가 좀 수그러들길 바라며 창밖을 바라보며 우동을 먹던 중 로비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스탬프북에 미치노에키 스탬프를 찍고 계신 것을 보았다. 2년 전 첫 자전거 여행 때 나도 기념으로 미치노에키 스탬프를 열심히 찍었는데, 막상 마땅히 찍을 곳이 없어 화장지나 껌종이, 영수증 같은 곳에 찍고 다녔다. 웃긴 건 미치노에키에 들릴 때면 가장 먼저 스탬프를 찍으며 다녔는데 허무하게도 한국에 돌아온 뒤 스탬프를 찍은 종이를 빨랫감과 함께 잘못 세탁하는 바람에 대부분 물에 녹아 못쓰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소소한 재미로 미치노에키 스탬프 수집을 할 텐데 지난번처럼 하면 분실 위험도 크고 자리도 많이 차지할게 뻔하여 아예 여기서 스탬프북 하나 살까 싶었다. 스탬프북 판매처로 가서 가격을 물어보니 200엔이었다. 어제저녁밥 사 먹는데 쓴 돈이 200엔. 돈을 조금만 더 보태면 방금 먹은 우동과 라면 가격이 나오는 돈이 200엔이었다. 겨우 200엔이지만 뒤에도 이런 식으로 한 번 두 번 즉흥적인 지출을 이어나가다간 예산에 펑크가 날 것이 뻔했다. 하지만 3개월 동안 껌 종이와 이면지에 스탬프를 찍은 뒤 패니어 한구석에 처박아 놓는 꼴도 볼 수 없기에 결국 장비 투자라 생각하며 구매했다. '오늘 쓴 200엔은 나중에 식비에서 빼야지..... '
우동을 다 먹은 뒤 새로 산 스탬프북에 도장을 찍고 휴대폰이라도 할까 했지만 근처에 스마트 폰을 충전할 콘센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태양열 충전기로 충전하자니 비가 내리고 있어 사용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최대 절전 모드로 바꿔 놓고 지도에 휴대폰 샵과 자전거 샵 몇 군데를 간단하게 표시해 두고 미치노에키 스탬프북의 관광 정보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자전거를 수리한 대형샵.
다행히도 쏟아 내리던 비는 2시 즈음이 되자 부슬비로 바뀌었다. 비록 일기예보에서는 3시에 확정적으로 비가 그칠 거라 했지만 지금 오는 정도면 충분히 맞으며 달리만 했기에 서둘러 출발하였다. 계획대로 36번 도로를 따라가다 휴대폰 샵에 들러 e-connect 유심에 대해 물어봤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마이너 한 회사라 대형 전자상가쯤에 있으려나 싶어 유심칩은 삿포로의 큰 전자상가에서 사기로 하고 다음으로는 자전거 수리를 위해 자전거 샵을 들러 자전거에 다른 이상이 있는지 점검을 받아 보기로 했다.
샵의 미캐닉이 자전거 보고 이리저리 만지더니 고장 원인이 드레일러 유압선 때문이라 진단했다. 선이 꼬여서 그렇다는데 뻑뻑하긴 해도 일단 기어가 제대로 들어가니 그냥 써도 상관없단다. 다소 김 빠지는 진단이긴 하지만 별 수 있나, 렌치라도 빌려 페달을 단단히 조인 뒤 가게를 나왔다. 그래도 가게 옆에 다이소를 발견에 짐을 묶을 로프 2개와 일회용 우비 1개를 단돈 300엔에 살 수 있었다. 아까 지나가다 본 우비는 하나에 480엔이었는데. 하마터면 한 끼 식사값을 날릴 뻔했다.
미캐닉은 괜찮다고 했으나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기어를 넣기 위해 쉬프터를 볼트액션처럼 넣고 당겨줘야 하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고는 했지만 나중에 시골지역으로 넘어갔을 때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다른 대형 샵에서 진단을 받아 보기로 결정했다. 차선으로 선택한 샵에서도 동일한 진단을 받았는데 사장님이 레버를 꾹 누르자 뭔가 틱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데 갑자기 레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내가 당황하고 있으니 사장님이 시프터 아래를 확인해 보시고는 바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셨다.
원인은 바로 시프터 하단부에 플라스틱 커버로, 어제 사고 당시 커버가 깨져 뒤틀리는 바람에 기어 변속을 위해 레버를 누르면 커버에 걸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던 것이었다. 사장님이 부숴놓고 사기 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의심스레 이것이 혹시나 무슨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 추궁하니 커버는 그냥 방진, 방수용 일뿐 구동하는 데는 일절 관계없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 오해가 풀려 사장님께 수리비를 여쭤보니 실제로 부품을 교체하거나 고친 것은 없으니 공임비는 안 받는다 하셨다.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를 해결해 주신 사장님께 감사인사를 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삿포로로 출발하였다.
삿포로 가는길
순조로이 소도시 외곽 지역을 벗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말끔히 개었다. 물론 아직 하늘엔 여전히 구름이 끼어 있고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과 시큰거리는 손목 부상 부상이 거슬렸지만 구름 덕에 강렬한 햇빛이 차단되었고 바람이 순풍인 데다 손목도 힘을 크게 주지만 않으면 거슬리지 않은 수준이고 아직 여행의 설렘이 가시지 않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비 온 뒤 숲 속의 상긋한 풀냄새를 한껏 들이쉬며 상쾌한 기분으로 순조로이 삿포로 남부에 위치한 기타히로시마로 진입하였다.
오늘은 삿포로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며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핸들이 제멋대로 꿀렁거리고 자전거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내려 자전거를 살펴보니 앞바퀴의 타이어 바람이 빠져 있었다. 아까 샵에서 바람을 넣을 때 밸브를 꽉 잠가놓지 않아 그런가 싶어 밸브를 봤더니 꽉 조여진 밸브는 이상무. 뭐 그러면 펑크겠구나 그럼 때워야지 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패니어에서 펑크패치를 꺼내고 프레임에서 펌프를 뽑아 들려했는데 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간 2천 킬로 넘게 함께 했던, 여행 중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던 내 휴대용 자전거펌프가,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나의 휴대용 펌프가 없었다!
여행 중 펑크는 자주 겪는 일이기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튜브도 있고 펑크패치도 있고 때울 기술도 있는데 펌프만 없는 상황은 매우 대수로운 상황이다. 차라리 튜브가 없고 펌프가 있었음 공기를 계속 넣고 달리며 다음 샵까지 버티기라도 하는데 지금은 펌프가 없었다. 게다가 유심칩도 없어 근처에 자전거 샵이 있는지 핸드폰으로 검색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은 완전 나가리, 사쿠라를 뽑은 아귀였다.
당황한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혹시 펌프를 패니어에 넣은 게 아닌가 해서 뒤져 봤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집에 두고 온 것이 아닌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일본에 도착 후 공항에서 조립할 때 휴대용 펌프로 바람을 넣었기에 집에 두고 왔다는 나의 가설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전거 조립 후인데..... 아!! 그때구나 어제 넘어졌을 때!
어제 사고로 내가 풀숲에 처박힐 때! 그때 펌프도 같이 처박힌 것이었다.
지금껏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펌프를 언제 어디서 분실한 것을 명확히 하지 빠르게 공황상태에 빠졌다. 답이 안 나오는 이 상황에 잠시간 허둥지둥하다 시야에 로손 편의점이 보여 일단 진정할 겸 가서 멜론빵을 하나 사 먹었다. 멜론빵을 처음 먹었을 때 당연히 멜론 맛이 나는 빵이거나 멜론 크림이 들어간 빵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냥 가격이 싼 멜론 모양의 소보로빵이었다. 만화 주인공들은 매끼 점심을 멜론빵이나 야키 소바 빵으로 때우던데 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맛있게들 먹는지 모르겠다.
스위칭 윈백을 위한 멜론빵
달달한 멜론빵을 먹는 동안 잡생각을 하며 진정하고 보니 편의점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겠구나 싶어 와이파이를 연결했는데 무료 와이파이를 쓰려면 개통 번호로 인증 문자를 받아야 했다..... XX! (욕욕!)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상태. 유일한 해결책은 주민에게 주변 지리를 묻는 것이기에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가 알바에게 근처에 자전거 샵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조금 딱딱한 인상의 여직원은 저어기 20분 거리에 조이풀이라는 매장에 있다고 했다. 딱딱하고 싸늘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가다가 어디서 돌아야 하고 얼마나 가야 하는지를 큰 몸짓과 손짓으로 열심히 묘사하며 자세한 길을 알려 주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열정적인 모습이 귀엽고 고마웠지만 문제는 열심히 설명해 줘도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쉽사리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가까운 다른 샵이 있을까 싶어 옆의 세븐일레븐에서 다시 물어보았지만 같은 답변을 받았다.
조이풀을 찾아 가던중
처음의 아르바이트생이 알려준 방향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생판 처음 와 보는 동네에서 지도 하나 없이 대략적인 설명만 듣고 가려니 너무나도 불안했다. 중간에 이 길이 맞나 긴가민가했지만 그간 쌓인 여행 경험과 감각을 총동원한 덕에 그리 헤매지 않고 조이풀을 찾을 수 있었다.
JOYFUL AK 홈센터 꽤 크다
자전거 샵 내지 대형매장 정도로 생각한 조이풀은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는 홈센터로 농업 공구 모종 등을 파는 전문매장이었다. 자전거 샵의 위치를 직원에게 물어 안내를 따라 매장 왼쪽 입구에 있는 자전거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전거 샵 사장님께 튜브 700*35C 사이즈의 자전거 튜브가 있냐. 물어보니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팻 바이크용으로 쓰이는 아주 큰 튜브나 일반 생활차에 쓰이는 마마 챠리(생활 차)용 튜브는 있는데 해당 사이즈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셨는데 다행히도 매장 구석에 700*35C 사이즈의 튜브가 있었다. 매장에 생각보다 물건이 잘 갖춰져 있어 혹시 펌프도 팔까 싶어 물어보니 내가 기존에 쓰던 작은 휴대용 펌프는 없고 집에 구비해 놓고 쓰는 대형 펌프밖에 없었다. 펌프를 빌려 자전거로 돌아와 튜브를 때우기 위해 타이어를 탈착해 살펴보니 다행히도 타이어나 튜브가 찢어진 것은 아니었다. 튜브가 휠에 찍혀 2개의 작은 구멍이 나는 보통의 스네이크 펑크로 보통 턱을 넘어갈 때 자주 발생하는 펑크였다. 아마 아까 외곽지로 들어올 때 인도턱에 충격을 잘못 받아 찍힌 듯했다.
아직 펌프가 없기는 하지만 다른 샵에는 700*35C 사이즈가 없을지도 모르니 펌프를 반납하며 스페어용 튜브도 하나 구매했다. 다시 자전거로 돌아와 시간을 보니 6시. 밖에는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적당히 여기서 하루 보낼까 싶었지만 이곳은 미치노에키도 아니고 셔터가 내려가 처마가 사라지면 밤새 비를 쫄딱 맞아야 하기에 일단 도심지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삿포로를 향하는 도중 계속 근처의 공원을 살펴보며 괜찮은 캠핑 포인트를 찾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식수대와 화장실이 있고, 전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공원은 있었지만 비를 피할 지붕이 있는 정자가 있는 공원은 하나도 없었다. 아예 괜찮은 캠핑 포인트가 없으면 모를까 나를 물 먹이려 서로 짠 것 마냥 모두 건물의 처마가 짧거나 천장이 뚫린 구조라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주행 중 GPS 오류로 인해 방향을 혼동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는 바람에 왕복 6km 정도의 경로 낭비가 발생했다.
춥고 배고프고...
위치를 수정하여 키타히로시마로 돌아오니 19:00 즈음. 주변은 어두워진 지 오래고 기온이 떨어지며 오한이 들기 시작하는데 여전히 나는 오늘 밤을 새울 곳도 비를 피할 곳도 찾지 못했다. 차라리 캠핑을 포기하고 호스텔이나 캡슐호텔이라도 들어갔으면 좋을 텐데 망할 유심칩 때문에 숙박업소 검색도 불가능했다. 얼마를 주든 근처의 아무 비즈니스호텔이라도 가서 따듯하고 편하게 1박을 하고 싶은데 문제는 돈이었다. 이번 여행 자금은 군 월급으로 구성된 여행이라 하루 이용 가능 예산이 1천엔 내외로 매우 예산이 빡빡했다. 이런데 만약 지금 5~10만 원 하는 호텔에서 1박 한다? 지금의 지출이 나중의 예산 펑크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결국 달리는 수밖에 없었기에 이따 먹을 따듯한 저녁 메뉴를 생각하며 반쯤 무너지는 멘탈을 붙잡고, 자전거로 페달질로 발생하는 체열로 체온을 끌어올리며 밤을 보낼 장소를 수색하였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파출소 뒤편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지붕과 화장실 급수대가 모두 있는 완벽한 캠핑 포인트가 있었다. 다만 시 외곽지가 아닌 시 한복판이라는 점이 걸렸다. 게다가 파출소 바로 뒤편이라 더더욱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원에선 약하긴 하지만 근처 가정집의 와이파이가 잡혔기에 구글 지도를 이용해 다른 공원을 수색해 볼까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고 여기와 같은 지붕 있는 정자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기에 이곳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결정했고 이젠 파출소가 문제였는데 이전 여행에서 도심 한복판에 있던 공원서 경찰의 허락을 받고 잔 경험이 있었다. 보통 깨끗하게 뒤처리하고 아침 일찍 떠나기만 한다면 무난하게 허락해주었기에 이번에도 기대를 하며 파출소로 갔는데 모두 순찰을 갔는지 파출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찰을 나간 경찰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캠핑 포인트는 잠정 확정되었으니 근처 슈퍼마켓에 저녁거리를 사러 갔다. 늦은 시간에 방문한 덕에 거의 도시락과 신선식품류 대부분이 50%까지 할인을 하고 있어 저녁밥으로 도시락 한 개와 맥주 그리고 나중에 먹을 쌀과 된장과 찬거리를 몇 가지 샀다.
타임세일로 반값이라 신나서 이것저것 집다 보니 2200엔이나 나왔다. 생각보다 지출이 컸지만, 일단 사놓으면 한참 먹는 쌀과 된장 같은 필수 품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별수 없었다.
저녁 장을 본 뒤 다시 파출소로 갔지만 경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 파출소 앞의 벤치에 앉아 내일 경로 및 체크포인트를 계획을 세우며 경찰들을 기다리니 곧 경찰들이 순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해당 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은 중년 아저씨와 파릇파릇한 젊은 경찰 조합으로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와 와쿠 콤비를 보는 듯했다. 젊은 경찰은 20대 초반으로 매우 젊어 보였는데 그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조금 열등감을 느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외국에 나와 다른 나라의 젊은 친구를 보니 군대로 인해 낭비된 2년의 시간과 그 시간 동안 박탈당한 자유와 기회가 실감되었다. 월급이 최저임금의 반이라도 됐음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좀 더 여유 있게 여행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지금 당장은 오늘 잘 장소가 우선이었기에 무의미한 열등감은 접어두고 경찰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차근차근 설명한 것은 좋았는데 문제는 답해주는 경찰관의 말이 너무나 빠르고 단어가 어려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의사소통에 서로의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번역기를 통해 들은 경찰의 답변은 "불가능하다"였다. 그들이 말하길 아침 일찍 떠나는 것도 깨끗이 주변 정리를 하는 것도 좋지만 북해도는 남부지방의 기후와 달라 요즘 같은 날에는 동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해서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젊은 경찰관이 대신 캡슐호텔이나 비즈니스호텔은 어떠냐며 근처에서 가장 싼 숙소를 알아봐 줬는데 최저 5000천엔 이상이었다.
한국이었으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기에 단번에 오케이 땡큐! 를 외쳤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었다. 국내처럼 여행하다 바로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외국이고, 추가적인 예산 확보가 불가능한 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예상치 못한 지출이 많았기에 더 이상의 큰 지출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이곳은 힘겹게 찾은 황금 노숙 포인트. 굳이 여기를 포기하고 돈을 내고 숙소로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조금 고집을 부려봤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나이 든 경찰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한여름이면 우리도 허락해 주겠지만 지금 시즌은 너무 위험하다. " 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한 푼이 아쉬웠다. 잠시 대화가 의미 없는 평행선을 달리다 젊은 경찰관이 새로 찾은 값싼 숙소를 타협안으로 제시하였다. 정확히 숙소는 아니고 온천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찜질방처럼 24시 운영하는 곳으로 흔히 일본에서는 스파(SPA)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아무리 잘 얘기해도 공원에서의 1박은 허락해 주지 않을 거 같고, 스파의 가격도 2만 원대로 이전의 제시안과 비교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기에 극적으로 타협을 이뤄내 결국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바쁜 사람들 한참 붙잡아 놓은 것이 너무 미안해 지도에 포인트만 찍어 달라 하며 혼자 찾아가려 했는데 중년 경찰관이 한사코 도와주겠다. 하는 바람에 졸지에 순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전거로 파출소 5분 거리의 찜질방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찜질방으로 들어가 스태프에게 나의 신변을 인계해준 뒤 나의 안전여행을 빌어주며 떠나갔다.
찜질방의 가격은 주간에는 850엔이지만 지금 심야시간에는 추가 비용이 들어가 1박에 2150엔이었다. 한국 같으면 찜질방은 비싸도 1만 원에 값싸게 이용 가능한데....
'대한민국 모든 사우나 찜질방 만세 만세 만만세다. '
디자인과 소품은 국내와 다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전거는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짐은 데스크에서 맡겨놓은 뒤 체크인하였다. 찜질복을 받고 직원의 간단한 이용규칙과 설명을 들은 뒤 사우나로 들어갔다. 2150엔이면 괜찮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을 수 있는 가격이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하여 다소 기대했는데 막상 탕에 입장하니 내부는 우리나와 탕의 종류와 크기가 비슷하여 조금 실망했다. 건습식 사우나나 대형 냉탕도 없어 오히려 국내 사우나가 더 나은 듯했다. 근데 어린이들의 익룡 울음소리와 물폭탄 수영은 만국 공통인지 아버지를 따라온 몇몇 꼬맹이들이 사람이 없는 온탕에서 신나게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빠에게 혼나는 것도 공통이었다.
실내 탕은 국내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밖에 꽤 괜찮은 노천탕이 있었다. 향긋한 히노키탕, 은은한 계피 냄새가 나는 약재탕, 일본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법한 다라이(대야) 탕과 어쩐지 아침햇살 내지 막걸리가 생각나는 뽀얀 색의 쌀탕 등 몇 가지 노천탕이 있었는데 난 그중 쌀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탕에서 구수한 쌀 내와 뜨듯한 막걸리 향이 나며 몸을 담그고 피부를 문지르면 미끈미끈했다. 탕에는 입욕객을 위한 텔레비전도 있어 한참 몸을 담그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천탕답게 개방된 공간에 있어 탕에 온몸이 잠기도록 누워 물 위에 둥둥 떠 있으면 하늘에 달과 별이 보여 마치 우주에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아까 공원에서 노숙하는 것이 내 지갑 사정에 좋기는 하였겠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별빛 아래 즐기는 온천욕도 썩 괜찮았다. 뜨끈한 온천욕으로 오늘 하루 지친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걸 보니 역시 돈이 좋긴 좋다.
개운하게 목욕한 뒤 나와서 옷 입으려 나왔는데 라커룸에서 웬 젊은 처자가 남탕 라커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황해서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내 옆의 다른 일본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옷을 입거나 벗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탕에도 여직원이 들어온다는 얘기는 워낙 유명해서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여직원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의 문화상 남탕에 남자가 있는 것이 범죄도 아니었기에 조금 있으니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진정한 뒤 옷을 입으려 보니 로비에서 받은 옷이 2개였다. 둘 중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옆자리의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있었는데 여직원이 대뜸 치고 들어와 이것을 입어야 하는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기껏 적응되었는데 돌발 상황에 다시 적응이 안 되어 부끄러움에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호다닥 찜복을 입고 나왔다.
개운하게 목욕하고 사우나 내 시설을 이것저것 구경하려 돌아다녔는데 시설 자체가 건물 한 채를 전부 쓰고 있다 보니 찜질방 안에 tv방, 만화방, 오락실, 세탁실에 개인실까지 규모에 맞는 다양한 편의 시설이 있었다. 찜질방 내 음식점도 보통 우리나라는 간단한 분식이나 간식을 파는 정도인데 여기는 아예 제대로 된 식당이 있어 라멘이나 돈까스 같은 식사부터 스시나 야키니쿠정식 같은 식사와 사케도 팔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직 저녁도 안 먹었겠다. 여기서 밥이나 먹을까 했는데 가격이 기본 천 엔부터 시작하기는 메뉴판을 보는 순간 머릿속의 배고픔이 싹 가셨다. 오늘은 계획 외의 지출이 많이 발생하였기에 더 이상의 지출은 안된다.... 쓸데없이 딴짓하지 말고 일찍 자면 배는 안 고프니까... 물로 배를 채워놓음 배가 안고플 테니까 굶었다.... 아까 펑크만 안 났더라면 라멘이라도 먹었을 텐데...
시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문득 아까 장을 봤던 생선이랑 닭고기 생각이 났다. 밖에 있으면 날이 추워서 상관없는데 찜질방 내부는 꽤 따듯하니까 상할 위험이 있어 데스크에 말하러 갔다. 직원에게 잠깐 짐 좀 꺼내 줄 수 있냐 이야기하니 내가 내 짐을 걱정하는 것인 줄 알았는지 고객의 짐은 자물쇠 달린 사물함에 이름표까지 붙여 안전하게 보관하니 걱정 말라했다. 그래서 아까 슈퍼에서 장 본 고기랑 생선이 짐 안에 들어 있다고 하니 바로 내 말을 이해한 직원이 짐을 꺼내다 줬다. 직원에게 닭고기와 생선을 보관해 줄 수 있냐 물어보니 일단 스태프용 냉장고에 보관해 줄 테니 내일 체크아웃할 때 말해 달라 했다.
식료품 문제를 해결하니 급 피곤이 밀려와 잠잘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전체적으로 한국의 찜질방과 분위기는 비슷한데 세세한 부분은 역시 다르긴 달랐다. 한국 찜질방과 차이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수면실 외에도 찜질방 홀 바닥이나 토굴에 누워 자는데 반해 일본 사람들은 중앙 홀에서 누워 자기 보단 tv방이나 만화방 혹은 수면실과 같이 딱 정해진 구역에서만 자고 있었다.
처음에 수면실에서 적당히 자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코골이가 너무나 심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토르의 천둥번개급 코골이에도 꿀잠을 잤기에 처음엔 한 아조씨의 색소폰 같은 코골이 정도는 괜찮았다. 많이 피곤한 상태이기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는데 나를 단박에 깨운 것은 피콜로였다. 초록 피부의 그 친구가 아닌 관악기 피콜로. 무슨 코로 마관광살포를 쏘는 줄 알았다. 색소폰의 독주는 참을 만했지만 두 관악기의 환장의 이중주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졸다 깬 나의 정신은 말똥말똥한 와중에 코케스트라 연주 중 컥! 커걱! 하며 쉼표까지 챙기는 것이 아주 필하모닉 코케스트라였다. 현재 이 난장에 단잠을 청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아 아까 봐 둔 tv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tv방은 의자가 해변 벤치와 같은 모양의 의자라 tv를 보거나 폰질하기엔 좋지만 한참 누워 있음 허리가 배겨 자기엔 좋지 않았다. 다른 잘만한 곳이 있나 찾아봤지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고 그나마 만화방이 편히 잘 수 있는 모양의 의자라 결국 만화방에서 자게 되었다.
만화방에는 엄청난 수의 만화책이 책장에 꽂혀 있어 온 김에 열심히 배운 일본어를 뽐내볼까 하고 한 권 꺼내 들었는데 당연하게도 일본의 만화책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한자도 열심히 외웠던지라 웬만큼 읽는 건 가능했는데 익숙지는 않아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만화책을 읽는 건지 단어집을 읽는 건지...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글만 뚫어져라 보는 것이었다. 높디높은 한자의 벽에 부딪힌 나는 조용히 만화책을 책장에 다시 꽂아놓는 것이었다. 그리곤 겸손한 마음으로 의자에 돌아와 오늘치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여행에서는 아마 사진을 천장쯤 찍었던 거 같다. 당시 이런 여행은 내 인생 처음이자 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빠짐없이 기억하려 열심히 찍었는데 사진에는 사실은 담을 수 있었지만 감정은 담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며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할 수 있으나 소중했던 그때의 기억, 그때의 냄새, 그때의 감정은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 여행 중 매일 일기로 기록을 남기기로 다짐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 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한데 겨우 이틀째인 오늘,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일기 쓰기를 때려치우고 싶은 것이 작심삼일. 아니, 작심 이 일이었다.
처음에는 귀찮음과 피곤함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쓰다 보니 재미가 붙어 글이 술술 뽑혔다. 여행 2일 차인데 무슨 사건사고가 벌써부터 이렇게나 많은지, 구구절절한 사건과 사고와 생각을 전부 적다 보니 글이 늘어졌다. 늘어진 글을 풀어보니 그 안에 매우 커다란 배고픔이 존재했다. 새로운 인연의 즐거움, 사람과 사람 간의 아름다운 인연,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 광활한 대자연의 자유로움,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 그 갈망! 나를 앞으로 이끄는 커다란 힘! 그 갈망! 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의 배고픔이었다.
글이 길어져 깨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꼬르륵 거리는 소리도 길어져 역시 식당에서 뭘 사 먹을까 싶었는데, 그때마다 메뉴판의 가격들이 떠오르며 배고픔이 싹 가시는 것이었다. 옳다구나 싶어 머릿속에 메뉴판을 걸어 놓고 음식 하나와 가격 하나에 글 한 줄 써려 내려가는데 도중 두 번 생각하니 마음속 김 첨지가 ‘어허, 간이 짜다. 글 한 줄에 한번 쳐다봐야지 어딜 두 번 쳐다보나, 두 번 봤으니 글도 두 줄이로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 첨지의 도움을 받아 배고픔을 억누르며 오늘치 일기를 써내려 갔다.
"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지만 배고픔이 진짜. 비선 실세더라. "
오늘 할 일은 전부 했으니 이제 내일 계획을 짜고 잠자리에 들 일만 남았다. 오늘은 이동거리가 너무나 애매했기에 내일은 좀 멀리까지 가야 했다. 오타루도 들를까 싶었지만 이미 일정이 조금 지체되기도 했고 그쪽을 찍고 가자면 경로 낭비가 심하기에 스킵하기로 했다. 결국 삿포로에서 유심칩을 구매한 뒤 북상하기로 결정하고 내일 중간에 들를 곳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
오늘의 한 줄 팁
- 북해도 건물의 처마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