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권태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
우리 삶이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을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의미'를 해석하긴 커녕, 걸어다니는 기계와 다름없다. 허무함과 권태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의미 찾기 대여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맛보다가도, 일시정지 상태로 창 밖 경치감상에 몰입하거나 내면의 감상에 푹 젖어드는 그런 여정. 책에서 소개된 것처럼, 아침에 먹는 커피 한 잔이 잠을 깨우는 역할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활기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열려있어야만 한다. 우리 마음을 끄는 분야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너무 시시한 게 아닌지, 너무 고립적이거나 너무 따분한지는 않은지, 모든 것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데 부적합하지 않은지. 이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헬레네가 그랬듯이, 우리는 그런 세계에 이끌렸던 사실을 후회하고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세계에 이끌릴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 해야 한다. 이런 후회의 위험성은 의미심장한 것들에 결부되어 있는 위험성으로, 그런 위험이 없는 삶이란 무의미와 권태, 무표정과 불안으로 추락하는 삶일 뿐이다."
"‘자연’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퓌시스’는 어느 날 피어났다 사라지는, 휙 스쳐가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즉 야구장에서, 군중집회에서, 일의 몰입에서, 아침 식탁의 향기에서 늘 퓌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퓌시스는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그것만으로는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데 빠질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 원래 예술적 ‘창작’과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는 장인이 갖춘 기예처럼 숙련되고 안목이 높은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퓌시스의 계기들을 포이에시스로 함양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감 있게 만드는 메타-포이에시스(meta-poiesis)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구별과 차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의미의 구별도 할 수 없으며, 걸어 다니는 자동기계와 다름없게 된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의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행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이 던지는 다신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이런 문화적 실천(praxis)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고,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메타 포이에시스.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이런 상황은 우리를 다시 메타 포이에시스로 돌아가게 한다. 어떤 분야에 대한 초보적 기술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즉 메타 포이에시스적인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퓌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