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을 보고 깨달은 것들
스포가 될 수도 있어요!
2017년부터 나는 인사이트에 집착하던 사람이었다. 쉬러 간 곳에서 조차 "혜란님은 인사이트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요?"라는 말을 들었다. 들인 시간만큼 아웃풋이 바로 나오길 바라는 그런 때였다.
이제는 덜 집착하게 되었만 효율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습관이 남아있다. 영화가 특히 그렇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영화를 안전하게 선택해왔다. 다보고 후회할지도 모를 영화에 도전해본 적이 언제더라.
이름부터 나른한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은 50분짜리가 10회 차다. 전체 시간을 계산해보곤 한번도 재생할 용기를 못냈다. 그러다 최근, 생산성이 0에 수렴하던 백신 휴가를 맞아 드라마를 켰다.
그리고 주인공과 함께 휴식을 잘 마친 나는 영화를 돌아보며 이 글을 쓴다.
주인공 나기는 항상 남의 눈치를 살피며 타인에게 맞추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 그리고 애인까지 자신의 험담을 하는 걸 듣고 과호흡으로 쓰러진다. 충격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이불과 자전거만 남긴 후 도쿄 근교의 작은 빌라로 이사를 한다.
극 중 나기와 나기의 전 애인이 다니는 회사는 공기 청정기를 판매한다. 나기의 전 애인은 영업부에서 일하며 공기 청정기를 "얼어붙은 공기", "가라앉은 공기"를 풀어주는 마법 같은 공기 청정기라 표현한다. 우리에게 분위기를 읽는 능력은 공기처럼, 없어선 안 될, 살기 위해 필요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일본에선 '공기를 읽다', 한국에선 '눈치를 보다'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구나.
자유롭게 산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실체 없는 존재들에 가끔은 사로잡힌다. 요즘들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이제 곧 서른인데..'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상한 숫자에 갇혀버린다. 안정적인 일을 해야하나? 결혼을 빨리해야하나? 같은 생각에 마음만 조급해진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누군가와의 관계가 깨질까봐 조마조마한 전전긍긍하게 될 때가 있다. 건강한 관계가 아닌 걸 알지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다시 연락하게 되는 그 이상한 마음.
정혜윤 작가의 <독립은 여행>에선, 나 답게 살기 위해선 독립을 해야 했다고. 독립을 하기 위해선 지금의 환경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혜윤 작가는 관계와 집, 회사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작가의 이야길 통해 '독립'한다는 것은 결코 혼자되기가 아닌,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기 또한 관계, 집, 회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독립을 시작한 것이다.
나기는 회사에서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겉돌면서 회사 생활을 해왔지만, 새로 정착한 곳에서 안전한 관계를 맺어 간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일. '공기만 읽'으려고 하기보단 나기가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해나갈 때, 친구들이 그런 나기를 기다려 줄 때 서로는 실로 연결된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게 가장 빠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기처럼, 혹은 나기 친구들처럼 서로가 독립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응원해주고 싶다.
자연 곱슬 머리인 나기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매일 아침 고데기하며 생머리로 살아오던 삶에서 벗어난다. 또 나기는 스스로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 바다를 보러 간다. 그곳에서 길을 잃고 어쩌다 찾아간 스낵바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단정한 외모에 대기업 근무, 남자친구와 안정적인 관계까지, 나기는 엄마의 자랑이었지만 이제는 말하지 못한 비밀이 생겨버렸다.
그런 나기는 끝내 엄마에게 말한다. 스낵바 알바는 자기가 처음으로 재밌게 느낀 일이라고. 더는 눈치보지 않을 거라고. 자길 찾아나선 과정은 분명, 분명, 나기에게 무척 용기가 필요한 일이면서도 짜릿하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도 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나에겐 즐거운 일. 사회적 기준으로는 칭찬받기 어렵지만 너무 신나는 일 말이다.
나기가 스낵바에서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동네 코인 빨래방을 인계받아 운영할 생각에 설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기의 마음이 너무 공감돼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그치, 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되는 거다. 누가 뭐래도.
나기가 아르바이트하는 스낵바는 손님들과의 대화가 주된 일이다. 스낵바에서 나기는 손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다. 나기 스스로 잘 들어주는 사람, 맞장구 잘 쳐주는 사람이라고 느껴왔는데, 스낵바에서는 손님과 말이 끊기기 일쑤. 나기가 대화법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으니, 대화 만랩인 스낵바 사장님이 이런 말을 한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면 공을 잘 던질 수 없어.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잘 받을 수 있는 공을 잘 던져주는 것이 중요해.
대화가 잘 안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대화를 하고 나서도 찜찜한 사람도 있다. 찜찜함은 상대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느낌에서 온다는 걸 안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물어야 할 때가 와서, 상대의 이야길 잘 듣고 싶은 사람으로 느껴지고 싶으니까 묻는다. 대충 듣고 흘린다. 그런 상대는 앞에 있는 사람이 깊숙이 숨어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까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공을 제대로 던져주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재미가 없다. 시간을 축내는 느낌이 든달까.
그럼 나는 공을 잘 던지고 있었나? 혹시 내가 던지고 싶은 공만 던져온 것은 아닐까? 공을 잘 던지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타인이 봐야 한다. 타인에게 내어줄 자리가 있을 때 상대와 공놀이가 시작된다.
나기가 자신의 삶을 리셋해 모든 걸 버린 순간에도 지켜온 한 가지 행위가 하나 있다. 요리다. 자신에게 기꺼이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인 요리는, 나기가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쓰는 최소한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나기도 바람둥이 옆집 친구에게 실연을 당할 땐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거르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다시 음식을 통해 자신을 보살핀다.
나는 일상이 지칠 때마다 끼니를 대충 때운다. 잘 먹는 것은 나의 삶을 건강하게 지탱하기 위해 가장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나기를 보고 다시 깨닫는다. 잘 먹고 나면 (나를 온전히 챙기다 보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타인을 바라볼 힘이 생긴다. 나를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언제까지나 가장 기본이 되자.
누구에게나 휴식이 필요하다. 생산성만 따지면서 살 수는 없다.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다시 도약하고 싶어질 타이밍이 오면 그때, 그때 다시 뛰면 된다. 휴식을 해야 할 때, 휴식이 끝나갈 때를 분명히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자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