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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하상 Mar 07. 2019

더 이상 공주가 아닙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 심지어 정수기를 고치러 온 기사님들도 우리 집을 인형의 집이라고 칭찬한다. 엄마의 우아한 앤틱 취향은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친구들도 종종 집에 초대하고 우리 집 인테리어에 감탄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나의 취향은 엄마의 눈에는 촌스러워 보이고 난잡한 빈티지 쪽에 가깝다. 스타일에 있어서 나는 엄마와 반대의 길을 걸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백화점만 가면 우리는 그렇게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누구 하나는 백기를 들어야 했다. 한 번은 내 눈에 쏙 들어온 바지가 있어서 입어봤는데 엄마는 “네가 ‘응답하라 1988’에 나온 덕선이냐”면서 촌스러우니 빨리 벗으라고 했다. 우린 이렇게 다른 노선의 모자였는데 어느덧 엄마랑 너무 친하게 지내서 그런지 내가 점점 엄마의 취향을 닮고 있음을 요즘 들어 느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서울에 놀러 오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이태원 앤틱 가구 거리이다. 보고 자란 게 앤틱 가구와 소품 그릇들 그리고 샤랄라 한 레이스들로 가득하다 보니 그 환경 속에서 내가 철옹성같이 안 바뀌는 게 더 이상하니까. 엄마의 큰 그림인지 난 엄마와 너무나 닮아버렸다. 

상하상의 침대 방

  인형의 집에서 내 방도 예외란 없다. 내 방을 본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음 날 나를 ‘상화 공주’라고 불렀다. 한 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방 침대가 퀸 사이즈 침대로 바뀌어 있어서 당황한 적도 있다. 물론 방은 공주지만 홀아비 냄새가 나서 방이 주인을 잘못 만났다는 말도 듣곤 했다. 예전에는 내가 왕자든 공주든 부잣집 아들 같다는 말로 들려서 그냥 기분 좋게 넘겼다. 그러나 요즘은 듣기가 싫다. 내 몸이 이미 공주에 너무 적응되어있다는 문제를 인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그렇게 독립성이 강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내가 처음 해보는 일 아니면 잘 못하는 일에는 거의 손을 데지도 않고 가만히 있게 된다. 괜히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일을 더 그르칠까 싶기도 하고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냥 가만히 지켜본다. 한 번은 다들 부엌에서 분주하게 일하는데 나 혼자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어서 혼난 적도 있었다. 그때 ‘아 내가 더 이상 공주로 살면 안 되겠다’를 느꼈다. 

  빵을 좋아해서 빵 만드는 일이 나름의 취미 활동이 되었는데 그전에 나는 칼이라곤 잡아본 적 없을 정도로 요리에 문외한이었다. 당연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 부모님 말고는 누구도 나에게 공짜로 요리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혼자 살아남기’처럼 요리를 해보려고 이것저것 시도를 해본다. 특히 빵을 너무 좋아해서 빵 만들기를 자주 한다. 이 활동이 남들에게는 단순한 취미생활 정도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큰 도전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 경험치가 거의 없었던 내가 경험치를 쌓는 많은 활동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본인들에게는 너무나 사소해서 나에게 당연한 일로 착각하게끔 만든다. 최근에 흰 모자가 얼룩져서 이거 손빨래할 거라고 말하니깐 누워있던 아빠가 바로 일어나서 내 모자를 들고 화장실로 가셨다. 사실 난 이때까지 손빨래를 직접 해본 적도 거의 없고 그런 기회에 제대로 배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빠 입장에서는 너무 사소한 일이니깐 “아니야 들어가 있어 아빠가 알아서 할 게”라고 대답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빠한테서 모자를 뺏을 수도 없고 그냥 나는 내 방에 들어가서 내 할 일을 한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다 보니 난 완전히 공주가 되어있었다. 사실 정말 사소한 일이 맞지만 그런 일들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경험치를 만들어주고 내가 어른이 되는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안 하게 되면 나중에는 못하는 사람으로 그대로 굳어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날 왜 공주로 키웠어?’하고 이제 와서 부모님을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 탓할 이유도 없다. 나를 위해 항상 도와주는 분들이니까. 다만 이제는 내가 혼자서 할 수 있게 나한테 기회를 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 내가 당연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게 이제라도 공주이기를 거부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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