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탈을 쓰다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카페를 드나드는 바람에 세가토리와 말하지 않아도 정이 들게 된다. 손님이 드나들지 않는 때는 가족처럼 둘이서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 식사때마다 술이 빠지면 안 된다고 세가토리에게 눈웃음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 조용히 술잔을 식탁에 놓아준다. 세가토리의 다정한 모습과 주름진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젊었을 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상상한다. 최근에 세가토리의 초상화 한 점을 그려주고 한소리 듣게 된다. 어찌 이리 못나게 그렸냐며 타박을 받는다. 그 그림(이탈리아 여인)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화가의 그림을 보고 배운 기법을 적용하였는데 세가토리가 그렇게 질색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에게 아름답게 그려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의자에 다소곳이 앉게 한다.
19세기이지만 다른 여인들과 달리 그녀만의 세련미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의상을 좋아하고 장신구들을 사랑하며 누구에게나 그 옛날에 자신이 모네의 모델이 되어서 유명세를 떨쳤던 이야기를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떠들어댄다. 그 위세, 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던 나의 사랑 세가토리를 알 수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높게 달린 빨간 깃털 모자를 보면 그녀의 욕망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피곤한다. 한때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도 그려봤다는 그녀는 그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나의 그림이 팔리지 않아 언제나 우울한 상태이지만 다행히 그녀는 나의 그림을 가게 벽에 빼곡히 걸어둔다. 그리고 식당으로 찾아오는 예술가들에게 그 그림을 설명할 적에 나의 그림에 대한 의도와 다르게 말을 할 때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끼니를 때울 수 있고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어서 세가토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또한 그녀의 가게에서 나의 많은 작품을 벽에 걸고 조촐하게 전시회를 가지게 된다. 세가토리를 그린 벽면에도 일본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림을 그녀는 순수히 받아주어서 참으로 고마움을 가진다.
드디어 기쁜 소식이다. 세가토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물론 지금의 내 형편이 말이 아닌 것을 나도 안다. 세가토리에게 간절히 구애하고 아이를, 새 생명을 예쁘게 키우자고 무릎을 끊고 빌어본다.
하지만 세가토리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아이를 지우고 멀리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내가 그녀에게 바친 나의 그림은 모두 싸디싼 가격에 팔아넘긴다.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그 많은 그림들은 그녀와 함께 사라지게 되고 그녀는 47세, 나는 35세, 12살 차이의 사랑은 그렇게 별들과 함께 이별하게 된다. 그녀는 나의 영적인 미술 세계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멀리 떠났지만 나의 심장은 산산히 부서지고 마음은 점점 건강히지 못하게 된다. 홀로 남은 이 밤이 너무 무섭게 느껴진다. 외로움,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괴로움이 극에 달하게 된다. 탬버린을 흔들며 우아하게 춤추는 그녀가 너무나 보고싶다. 나의 사랑 세가토리...
[몸속에 고흐를 몰아넣고 이야기를 펼치는 재미가 남다르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 일수 있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