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국일기> 리뷰
이모와 조카 사이의 친밀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람마다 가족 관계에 따라 다르지만, <위국일기>의 이모와 조카는 친밀도 0%다. 이야기만 들었지 얼굴 한번 제대로 본적 없는 남남이기 때문이다. 연결고리라곤 혈연관계 하나뿐. T 성향의 이모와, F 성향의 조카가 만나 이루는 특별한 동거는 같은 구석 하나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과정을 느리지만 무해하고 따뜻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이들의 성장 모습도 함께.
왜 그랬을까? 소설가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언니 장례식장에서 홀로 남겨져 갈 곳 없는 조카 아사(하야세 이코이)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그것도 홧김에. 연거푸 이불킥을 날릴만큼의 이 제안은 반려동물도 못 키울 정도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걸 잘 못하는 본인이 더 놀란다. 혼자 글을 쓰고 사는 것에 익숙한 마키오의 생활을 잘 몰랐던 아사는 그날 이후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모 집에서 함께 지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처럼, 아사는 혼란스럽고 복잡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한 걸음을 뗀다.
독특하고도 특별한 성장영화인 <위국일기>의 두 주인공 마키오와 아사의 관계는 가느다란 실과 같다. 오롯이 한 가닥만 이어져 있는 듯한 연의 끈은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팽팽하게 유지된다. 남들 앞에 서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빈말은 죽어도 못하는 마키오와 정반대로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를 중요하면서 감정적 공감을 잘 하는 아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이 거의 없다. 딱 하나 마키오에게는 언니, 아사에게는 엄마인 미노리(나카무라 유코)가 존재가 있지만, 각각 증오와 그리움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영화는 너무나 다른 존재로서의 두 인물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린다. 그 중심에는 억지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마키오의 모습이 자리 잡는다. 극 중 그녀는 성공한 소설가지만 아웃사이더다. 마치 사회가 규정짓는 평범함에 반기를 들 듯, 마키오는 소설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 푹 빠져 산다. 아사가 온 이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지만, 여느 가족처럼 다정하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아사에게 ‘널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널 절대로 짓밟지 않을 거야.’라는 말처럼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멋진(?) 보호자가 아닌 조금은 다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아사를 대하는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한다.
아사 또한 이런 마키오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이내 이모의 진실한 마음을 안다. 그동안 친구 등 자신의 행복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관계에 치중했던 아사는 이모와의 동거를 통해 비로소 자신을 보는 법을 배운다. 그녀는 자기 사랑했던 부모가 사라지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절친했던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의지할 곳 없이 외톨이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마음을 다잡아주는 건 일기다.
자신이 쓰다 말던 노트를 아사에게 건넨 마키오는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마음에 남은 감정을 쓰라고 권유한다. 소설가다운 처방전인데, 이는 아사가 남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마치 과거의 마키오처럼 말이다. 이 일기는 한 장씩 채워지면서 누군가가 아닌 오롯이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고, 바라는 것들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두 인물은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의지하며, 성장한다. 사춘기를 관통하는 아사는 물론, 자신만의 세계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마키오도 모두 성장한다. 극 중 아사는 마키오를 보면서 어른에 대한 획일화된 모습, 어른도 친구가 있다거나 모든 걸 다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을 벗어던진다. 어른도 불완전하다는 걸 그때야 깨닫는 이 소녀는 이후 이해의 폭을 넓히고,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재차 확인한다. 그 결과물로서 미완성이지만 그래서 더 좋은 가사를 쓰고, 직접 노래도 부른다.
어른이라면 알겠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과거 언니와의 절연 이후 마키오는 성장을 멈췄다고 볼 수 있다. 나이와 외관상만 어른이지, 과거의 상처로 인한 생채기는 그녀의 성장판을 닫아버린 셈. 운명의 장난인지 증오했던 언니의 딸인 아사를 통해 그녀는 굳게 닫혔던 마음을 조금은 연다. 그리고 아사와 반대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이해하는 시도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키오는 어른이 된다. 감독은 후반부 마키오의 고향 해변을 배경으로, 아사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서 이해의 시도를 하는 마키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물론, 두 인물이 중심이 되다 보니 주변 인물들의 스토리가 뻗어 나가지 못하고, 큰 사건 없이 느린 템포로 이어지다 보니 극의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메시지가 도드라져 보이는 건 배우들의 몫. 과거 사랑스러운 청춘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줬던 아라가키 유이는 보다 무표정하지만 성숙한 그리고 남다른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올해 4월 국내 개봉한 <정욕>에 이어 그녀의 진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내면 연기를 마주할 수 있다. 청춘의 모습은 하야세 이코이가 담당한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은 말간 미소를 짓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도, 친구들과의 관계의 어려움에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잘 표현한다. 과거 아라가키 유이처럼 하야세 이코이의 이름도 기억할 것 같다.
영화는 성장의 첫 단계가 남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는 느슨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어진다고 전한다. 서로 다른 이모와 조카의 동거가 특별한 건 바로 진정한 성장의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좋은 에코(울림)가 되는 순간의 기쁨은 꽤 크다. 어른이든 미성숙한 어른이든 간에.
덧붙이는 말: 참고로 영화 제목인 ‘위국일기(違国日記, 어긋난 나라의 일기)’는 부모가 아닌 마키오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쓰는 일기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평점: 3.0 / 5.0
한줄평: 담담하게 적어가는 너와 나의 어른 일기!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