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 미래를 상상하다
2018년 8월 24일은 한중 수교가 체결된 지 2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필자는 냉전이 해체되는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다는 TV 뉴스를 생생히 지켜봤다. 바로 고등학교 2학년 재학 때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때 필자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고 타이완과 단교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관심이 없었다. 대학입시 준비와 더불어 한창 노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가르치고 있는 중국학 관련 전공의 대학생들은 고학년의 경우 1993년, 저학년의 경우 1999년 출생까지 다양하다. 이들에게 지난 한중관계 26년에 대한 의미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중관계의 새로운 출발과 발전의 과정을 몸소 체험한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1995년 학부 2학년 때 ‘현대 중국의 이해’란 수업을 수강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께서는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방대한 분량의 그 책을 그때는 그렇게 읽기가 싫었고, 또 내가 이것을 왜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비싼 책값으로 인해 누구도 살 엄두를 내지 않았고, 도서관에서 빌려 학과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몇십 쪽도 채 읽지 못하고 매우 허술한 감상문을 제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고는 한다. “내가 중국의 부상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여러분들은 쉽게 공감 되질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감내해야 할 평범한 삶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읽어야 했던 1995년의 나와 ‘한중관계의 이해’란 수업을 듣고 있는 2018년의 대학생 사이에는 무려 23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사람으로 치면 한 사람의 어엿한 청년이 성장하는 이 기간 중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인가. 1997년 덩샤오핑의 사망과 홍콩 반환, 2001년의 WTO 가입, 2003년 사스(SARS) 사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3년 일대일로 이니셔티브 제안, 2014년 5월 시진핑 주석의 신창타이 언급, 2016년 AIIB 설립, 2018년 개혁개방 40주년 등을 간략히 언급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모든 사건들을 몸소 겪으며 지난 26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에게는 그저 책이나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이들은 현재 알리페이, 위챗 페이, 공유 자전거로 대표되는 공유경제의 새로운 창조적 파괴를 겪을 것이고, 덩샤오핑이 언급했던 두 개의 백 년 시기를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에게 2018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한해였다. 제23회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쏘아 올린 남북대화의 시작은 세계인들의 시선을 한반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4월 27일 남북 간 판문점 선언에 이어 6월 12일 이뤄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바로 그 정점이었다. 이 정상회담을 전후해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대변혁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현재까지 미북 간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항 가운데 원활히 추진된 것은 6.25 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뿐이다. 첫 번째 합의안인 ‘완전한 비핵화’의 구체적인 해법을 두고 북미 간 줄다리기가 예상과 달리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종전선언을 비롯한 평화체제 보장, 북미관계 정상화 추진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공감하는 부분이다.
11월 8일 뉴욕에서 개최될 것으로 예상됐던 북미 고위급 회담도 결국 연기되면서 정체상태에 있다. 따라서 내년 1월 초로 예정됐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북한 비핵화 협상 시간표가 전체적으로 밀리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북미 대화 자체가 중단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11월 28일 미국 의회에 참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너무 머지않아 고위급 회담을 하게 되기를 매우 기대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한국의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2018년 정세 평가와 2019년 전망’ 기자간담회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상호 의존관계가 주요 협상 동력인 상황에서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조기성과 도출을 추동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파행 가능성과 협상 답보와 교착의 장기화 가능성은 미미하다.” 이처럼 한반도 비핵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한편, 한반도 변화와 맞물려 중국과 북한 간의 관계도 급물살을 탔다. 김정일 사후 2012년 4월 김정은의 3대 세습 집권, 2013년 장성택의 처형을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북한과의 대화를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게다가 중국 온라인에서는 한동안 북한의 3대 세습을 풍자하는 각종 패러디가 넘쳐 나며 북한과 교류하는 것에 불쾌감을 지닌 라오바이싱들이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급격하게 이뤄진 비핵화 대화 분위기는 중국 역시 그동안 꺼리던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 나설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동인이 됐다. 올 한 해에만 북중 정상이 세 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졌던 것은 관계 진전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다는 것에 중국의 고민이 있다. 중국이 북핵문제는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로 두 국가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수호, 비핵화 실현,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한반도 정책 3대 원칙을 줄곧 강조해왔다. 만약 북한 비핵화 협상이 크게 진전되고, 남북미 3자간 종전선언이 이뤄진다면 중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더욱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만약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 순조로운 돛을 달게 된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 지정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제정치에는 ‘국제적 공공재(International Public Goods)’란 개념이 존재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난 40년 간 세계 자유무역체제라는 국제 공공재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국제 공공재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중국은 ‘일대일로’와 ‘AIIB'등의 두 번째 국제 공공재를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국제 공공재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한반도 정책 3대 원칙을 중국이 지속적으로 천명할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사실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진정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3년 후 중국은 국가목표인 ‘두 개의 백 년’ 가운데 하나의 백 년 중국 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샤오캉 사회 건설은 이미 충족한 것이라 보이지만, 다른 하나의 백 년인 2049년 중국은 정말 다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한반도 평화체제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 중국의 장점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비교적 선명하게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두 개의 백 년 역시 중국 공산당의 실천목표로 인민들에게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또 현실성 있는 단계적 목표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중국처럼 한국 역시 이제 ‘백 년의 한반도 평화체제’를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필자가 제시하는 ‘백 년의 한반도 평화체제’는 아래 그림과 같다.
그림 1. 백 년의 한반도 평화체제, 필자 작성.
이는 아직 초보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반도의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평화체제 이정표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얼마 전 학생들에게 북한과의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지 물어본 적이 있다. 어떤 학생은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 자신의 생애에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조만간에 바로 되던가 아니면 뒤로 한참 미뤄졌으면 희망한다고 했다. 아직 명확한 의견이 없는 상황인 학생들도 북한과의 통일문제는 기회와 도전의 양면성을 가진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인 11월 11일 앙켈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가적인 자만심과 군사적인 거만함이 두 개의 세계 전쟁을 무분별한 유혈 사태로 이끌었다”며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의 과오를 반성하는 언론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지금 백 년의 평화뿐만 아니라 향후 백 년의 평화를 준비하는 한 국가 수장의 바람직한 태도라 칭찬할 수밖에 없다. 2045년은 2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자 한반도가 분단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종전이 한반도의 피식민지 탈피와 더불어 분단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2017년 10월 18일,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 대표대회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은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중국을 21세기 중반까지 사회주의 현대화에 기초한 강국을 만들겠다.”
당초 중국 인민을 위해 시작됐던 개혁개방은 중국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전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평화가 한반도만의 평화가 아닌 전 세계의 평화로 거듭나야 한다. 새로운 백 년의 한반도 평화체제가 될 수 있도록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진정성 있는 태도를 기대한다. 19세기~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반식민지로 고통받았던 중국이 진정 평화에 기여하는 국가가 된다면 자신의 소프트파워는 자연스레 제고될 뿐만 아니라 타국의 존중을 받는 영향력 있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전인 2018년 12월에 작성된 것이라 가장 최근의 상황을 반영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