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터니 비버 <베를린 함락 1945>
“시체들 사이에는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누르스름한 회색 머리들은 납작하게 뭉개져 있었고, 손은 잿빛이 도는 검은색이었다. 단지 결혼반지만이 금색과 은색으로 희미하게 빛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겠지만, 역설적으로 그 묘사가 문학적으로 아름다울 때 전쟁의 비극은 배가 된다. 뛰어난 대비효과로 더 섬뜩하게 와닿는 이 문장은 소설가가 아닌 한 역사학자에 의해 쓰여졌다.
<베를린 함락 1945>의 저자인 앤터니 비버는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전직 군인 출신으로 이미 2차 대전과 관련한 여러 저서를 펴낸 적이 있는 유명한 역사학자다. 그가 이번에는 1945년 베를린 함락에 이르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이 최초로 출판된 것은 2002년이고 국내 번역된 것이 올해 2023년이니 신작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하다.)
비버는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비버는 방대한 양의 공식적인 전쟁 기록문서와 일기 등의 자료를 수집해 총 700여 쪽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책은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쉽고 빨리 읽힌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역사서라는 기본 장르에 충실하면서도(이를테면 객관적인 사실 고증 등), 흡사 소설과 영화와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함락까지 이르는 과정을 다루면서 독일과 소련의 시각에서 교차편집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야기는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마치 수많은 등장인물로 악명높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마저 든다. (독일과 소련 인물들의 이름이 비교적 쉽게 구분되는 건 다행이다)
또한 영화 촬영 현장처럼 촬영 드론을 높이 띄워서 카추사 로켓포가 굉음을 일으키며 날아다니고 모습과, 전투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을 부감과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주고, 다른 장면에선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병사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설 속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주요 등장인물(스탈린, 히틀러 등)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격동하는 심리적 변화까지 세세하게 그려내니 지루할 틈이 없다.
책은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크게 3가지 주제가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첫째, 베를린 점령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갈등. 특히 소련과 붉은 군대가 베를린 점령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한 이유를 조명한다. 둘째, 스탈린과 히틀러의 집착과 의심. 저자는 독소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두 지도자의 병적일 정도의 편집증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수많은 병사가 희생되었다고 지적한다. 셋째, 가장 무거운 주제로서 전쟁 중 벌어진 집단 성범죄.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 프로젝트를 주도한 오펜하이머 박사의 이야기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라는 의혹을 받고 조사를 받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술한다. 그런데 정작 스파이는 따로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했던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과 영국 국적을 가진 소련의 스파이다. 미국이 1945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나서 불과 4년 뒤인 1949년 소련도 실험에 성공하는데, 소련이 그렇게까지 빨리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푹스와 같은 스파이들의 활동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푹스는 나중에 조사를 받으면서 1942년부터 소련에 핵 개발 관련 정보를 넘겼다고 자백했는데 그렇다면 스탈린도 1942년부터 핵 개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스탈린은 1942년 5월 소련 비밀경찰 NKVD의 수장 베리야와 원자 물리학자들을 자신의 별장으로 불러 핵 개발이 미국에 크게 뒤처져 있다는 사실에 크게 화를 낸다. 이때부터 소련의 핵 연구 프로그램은 보로디노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라늄 부족에 있었다. 1945년 소련 영역이었던 카자흐스탄에서 우라늄이 발견되었지만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독일이 그동안 비축해놓았던 우라늄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거기에 결정적으로 베를린 서남쪽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가 독일의 원자력 연구의 중심이란 사실도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연합국보다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쟁의 최우선 목표가 되었고 스탈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시행한다. 1945년 4월 1일 스탈린은 각각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맡고 있었던 주코프와 코네프를 모스크바로 부른다. 그리고선 “서부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소”라고 말하며 누가 먼저 베를렌을 차지할 수 있는지 경쟁을 부추긴다. 스탈린은 주코프와 코네프가 오랜 라이벌 관계였음을 알고 이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곧바로 아이젠하워와 처칠에게 이제 베를린은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다면서 거짓말을 한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짓말이었다.
4월 16일 소련군은 총 3갈래로 베를린을 향하고 있었는데, 베를린으로 입성하기 전 마지막 관문이 ‘오데르-나이세 작전’이었다. 가장 위쪽에서 로코솝스키가 이끄는 제2벨라루스전선군, 중앙에서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전선군, 그리고 가장 남쪽에서 코네프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고 공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북쪽과 남쪽에서 로코솝스키와 코네프가 각각 독일군을 돌파하지만 중앙의 주코프의 부대는 ‘젤로 고지’에서 큰 난항을 겪고 있었다. 주코프의 부대는 독일군보다 10배 이상의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젤로 고지의 지형적 특징과, 이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의 하인리히 장군의 뛰어난 지휘로 베를린 점령 경쟁에서 가장 뒤처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주코프와의 통화에서 불같이 화를 내면서 북쪽의 로코솝스키의 전선군과 남쪽의 코네프를 곧바로 베를린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하며 주코프의 경쟁심리에 불을 지핀다. 실제로 주코프는 잇다른 전술적 실패와 강행으로 약 3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젤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독일군 피해는 1만에 불과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베를린 문턱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선 병적일 정도로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스탈린에겐 다행스럽게도 연합국은 베른린 앞에서 진격을 멈춘다. 베를린이 전략적 가치를 잃었다는 스탈린의 말을 어느 정도는 믿기도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당시 미국을 이끌고 있던 아이젠하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미국의 2차 대전 대전략은 ‘선 독일 후 일본’ 원칙이었다. 독일을 먼저 무너뜨리고 전력을 모두 모아 일본을 치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입장으로선 병력손실을 최소화 해야 했고, 큰 손실이 예상되었던 베를린 점령을 무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스탈린의 속셈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예를 들어 스탈린이 폴란드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란 점 등) 처칠에겐 순진해 보였을 것이다. (이미 영국은 뮌헨회담을 통해 히틀러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처칠은 베를린 점령이 스탈린과의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비버는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지 않은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만약 연합군이 무리해서 베를린으로 진군했다면, 이를 절대 두고 볼 리 없었을 스탈린이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란 예측에서다. 과연 그랬을까? 그랬더라면 냉전은 몇 년 더 앞당겨서 시작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베를린을 점령의 승자는 결국 주코프였다. 비버는 주코프가 자신이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을 공격했다는 것을 보여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발의 차이로 주코프가 베를린에 입성했고, 코네프는 병력 대부분을 베를린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포상을 거부당한 자신들의 분노를 강조하기 위해 그들은 ‘호구짓’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결국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코프는 일약 전쟁영웅으로 떠올랐고 미국과 영국 언론에서 극찬받았는데, 동시에 스탈린의 불신과 의심도 그만큼 커졌다. 스탈린은 가장 최측근인 베리야의 권력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점점 높아져 가는 주코프의 인기를 더 신경 썼다. 결국 종전 후 주코프는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망 직전인 1952년 겨우 당 중앙으로 복귀한다.
비버는 스탈린이 병사들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조차도 베를린 작전에서 수많은 사상자(약 사망 7만, 부상 27만)가 불필요하게 난 이유가 어느 정도는 서방 연합군보다 먼저 베를린에 도착하기 위한 경쟁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스탈린은 불신의 화신이었다. 연합군이 자기를 기만하고 베를린을 먼저 차지할 것이란 망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장군들을 신뢰하지 않아 계속해서 경쟁과 갈등 관계를 조성했으며, 전쟁 포로 출신들도 신뢰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소련 밖에서 생활했다면 반소 세력에 노출되었다는 것이 스탈린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의 기반이었고, 실제로 스탈린이 죽은 한참 후인 1998년까지도 러시아에선 연구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가족 중 전쟁 포로출신이 있는지 체크하는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비버는 히틀러의 의심과 편집증도 스탈린 못지않았음을 상당히 큰 비중을 할애한다. 베를린 함락 이전에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졌는데, 2차 대전을 통틀어서 가장 처절하고 치열했던 싸움 중 하나였다. 독일군 40만, 소련군 100만 명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다. 소련군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 공격의 목적이었다면 볼가강 상류만 차단했어도 됐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무리를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이름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하면 소련군과 스탈린에게 막대한 심리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같은 이유로 스탈린 또한 이 도시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절대 항복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스탈린그라드의 주민들까지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고, 히틀러 또한 막판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에도 항복 승인을 요청한 파울러스 장군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한 독일군 최초의 원수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 히틀러는 끝까지 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살릴 수 있었던 수백만 명의 군인들을 희생시켰다. 이때 괴벨스의 선전 구호는 “우리는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였다. 대다수 독일인은 절망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공격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간주했고,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희생자는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다.
히틀러의 마지막은 배신의 연속이었다. 베를린 함박이 임박했을 무렵 히틀러에게 남은 희망은 분견구 사령관인 슈타이너와 벵크 장군의 제12군 뿐이었다. 4월 22일 슈타이너는 반격을 지시한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고, 벵크 또한 베를린으로 들어와 도시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거절한 채 병력을 서부로 돌려 민간인을 철수시키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다. 이때 벵크는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한 번 더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 더 이상 베를린을 위해서도, 독일 제국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의 임무는 소련군과 싸워서 국민을 구하는 것이었다.
만약 벵크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젤로 고지에서처럼 히틀러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받들어 휘하 수십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이 지닌 가치 중 하나는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동안 나치 독일은 전범국의 오명을 쓰고 역사의 영원한 악인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물론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같은 범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비버는 독일에 벵크같은 이들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철수 작전이 마무리될 때쯤 민간인이 모두 엘베강을 건너며 벵크와 참모진은 마지막으로 강을 건넜는데, 그때 소련군이 그의 보트에 사격을 퍼부으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극적 연출 효과까지 자아낸다.
이 와중에 히틀러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게슈타포의 수장 힘러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백작과 항복과 협상을 시도했는데, 이 사실을 히틀러도 알게 되고, 거듭되는 배신과 소련의 거침없는 진군에 히틀러는 결국 “안락의자에 쓰러졌고, 기진맥진한 채 눈물을 흘리며 전쟁에서 졌음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끝까지 곁에 있던 보어만, 카이텔, 괴벨스, 요들 같은 참모들은 히틀러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탈출할 것을 권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은 자살할 것이라며 거절한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조촐한 결혼식과 이들의 동반 자살, 그리고 괴벨스 부부가 6명의 아이들 모두를 먼저 죽이고 자신들도 따라 자살하는 대목은 슬프기보다는 기이한 풍경처럼 보인다.
끝으로 책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무거운 주제는 전쟁과 성(性)이다. 비버는 “전쟁에서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규율 빠진 병사들은 성적인 면에서 원시적인 남성으로 재빨리 돌아갈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전쟁 기간에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은 약 2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숫자다. 비버는 많은 피해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개를 부득이하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소녀가 강간당하자,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부모는 자살하고, 실신한 뒤 깨어난 소녀는 결국 미쳐버렸다는 이야기. 달렘의 한 수녀원에서 간호사, 어린 소녀, 임산부, 막 아이를 출산한 산모까지 모두 무참하게 강간한 이야기. 눈앞에서 자식이 또는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텐데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소련군에게 달려들었다가 총 한 발에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진 어린 소년의 비극까지.
소련군의 강간 대상은 독일 여성에 그치지 않았다. 독일 노예 노동에서 풀려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심지어 자국인 여성들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강간 범죄가 저질러졌음을 러시아 역사학계도 인정하고 있다. 강간을 저지르는 소련 군인들에겐 독일이 소련을 침략했을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복수심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비버의 주장대로 베를린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독일 여성을 증오의 대상으로 보기보단, 정복에 딸린 권리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추가로 비버는 이것이 스탈린이 성적 자유를 억압한 정책 탓이라고도 진단한다. 여성의 가슴 윤곽선이 보이는 것조차 심각한 에로티시즘으로 치부한 결과는 대다수의 소련 병사들을 성적으로 억압했고, 이것이 전쟁을 통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 러시아 대사가 비버의 글을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부분이 이해된다. 당시 소련의 베를린 침공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성스러운 반격이자 위대한 승리로만 기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버는 단호하게 역사에 공정한 칼을 들이댄다.
비버는 히틀러의 불타버린 시신 중에서 남아 있는 턱과 두개골이 소련 방첩부대와 정보부대인 스메르시와 NKVD가 보관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매년 1000구의 시신이 젤로 고지와 베를린 남쪽 소나무 숲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700페이지의 긴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몰입감에서 헤어 나오면 진한 먹먹함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꾼다. 이 참담함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민간인을 포함한 2차대전의 사망자 수는 대략 5천에서 7천만 사이로 추청된다. 지도자의 광기와 의심, 민족과 인종 간의 복수심, 그리고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지정학적 계산까지 모두 어우러지면서 죽지 않아도 될 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그런데 더 참담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벌어져선 안 된다.’라는 단순한 교훈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이전보다 더 큰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 가장 두렵다. 그렇다면 비버와 같은 역사학자들의 작업은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무용해 보여도 멈추면 안 되는 일들이 더러 있다. 역사학은 지나간 비극이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낼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것이다.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는 무섭고 섬뜩한 경고등이다.
(*제목 사진출처: www.b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