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책꽂이에서 엄마 일기장을 꺼내 본 적이 있다. 두툼한 무지 공책이었는데, 공책 앞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기장인 줄 몰랐다. 음, 비겁한 변명이다. 처음부터 엄마의 일기장인 걸 알았다면, 더더욱 궁금해서 후딱 들춰 보았을 것이다.
처음엔 신기했다. 엄마도 일기를 쓴다니. 나야 학교에서 일기장 검사를 받으니까 꾸역꾸역 썼지만. 도대체 엄마는 왜 일기를 쓸까? 무슨 내용을 쓸까? 잔뜩 기대하고 읽어 내려간 엄마의 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어린 나에게 엄마의 일기는 어려웠다. 있었던 일의 기록보다는, 엄마 감정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 많았던 듯하다.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볼 때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 내용 대부분이 답답하고 울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중 한 일기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정확히 복기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OOO(엄마 이름). 나는 왜 여기 있지? 나도 꿈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젠 아내이자 엄마일 뿐,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 기분이 든다.'
당시 나에겐 그 일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엄마는 엄마지.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면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면 엄마는 짜증도 많이 내고 자꾸 힘들다고만 해.
그때의 어린 나는 이제 엄마가 됐고, 그 당시 엄마의 나이가 됐다. 엄마의 일기 속 문장은 기억에서 흐려졌지만, 그 내용은 점차 이해가 된다. 나도 유독 우울할 때 일기를 쓰게 된다. 스스로가 누군지를 자꾸 묻는다. 아이들이 한없이 예쁘면서도 버겁다. 엄마도 이런 마음으로 일기를 썼구나.
엄마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정에 갔을 때 책꽂이를 훑어보았다. 엄마의 일기장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 일기장을 버렸을까. 왜 버렸을까. 그 일기장은 어딨냐고 물으면 내가 그 일기를 읽었다는 말이 되니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수십 년 뒤에 나도 엄마처럼 지금의 내 일기를 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엄마의 지금 마음을 알 수 있겠지. 그래도 엄마의 마음을 같은 시점에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수십 년 뒤에 이해하고 곱씹게 되어 아쉽다. 그게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데도 섭섭해하지 않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