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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Dec 29. 2022

음식이 우리를 위로한다

소울푸드(soul food)라는 말이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미국 남부 흑인들과 관련된 음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추억이 담긴 음식, 혹은 영혼을 달래주는 음식으로 널리 통용되는 듯하다.


거창하게 영혼을 달래주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칠 때 유독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나는 그런 음식을 소울푸드라 여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음식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소울푸드가 무엇인지는 당사자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동료들의 소울푸드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오늘 점심으로 카레 어때?”


동료 A가 말하는 카레는 그냥 카레가 아니었다. 맵기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카레였다. A는 매운 음식을 잘 먹었다. 매운 카레, 매운 짬뽕, 매운 주꾸미 볶음…. A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에는 ‘매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나는 매운 음식을 그다지 잘 먹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각자 선호하는 메뉴를 시켜 먹곤 했다.


그런데 간혹 작은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었다. 2인분부터 주문할 수 있다든지, 기본적으로 양이 많은 음식의 경우였다. 우리는 서로 타협하는 선에서 한 가지 메뉴를 주문하여 나눠 먹었다. A는 나의 눈치를 보며 맵기 단계를 조금 낮추고, 나는 괜찮다면서 달달한 음료수를 하나 더 시키는 식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A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수록 유독 더 매운 음식을 찾았다. A가 회사 앞 식당에서 맵다고 소문난 볶음면을 주문하면, 나는 준비 자세를 취했다. 가득 채운 물 한 컵과 함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A는 한숨을 내쉬더니 곧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몰아치는 일들과 워킹맘의 고충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음식이 나왔다. 그릇을 비운 A는 말했다. “아, 좀 살 것 같다. 속이 후련해졌어.”


친한 후배 B가 식당 예약을 하는 날이면 부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었다. ‘또 쌀국수인 거 아냐?’와 ‘설마 또 쌀국수겠어?’. 하지만 대개는 쌀국수가 맞았다. B의 소울푸드는 바로 쌀국수였다. 어느 날은 진지하게 B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쌀국수를 고집하느냐고.


B도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쌀국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회사 다니며 자극적인 음식을 먹다 보니 속이 힘들어 고생하는 날이 많았단다. 그럴 때 만난 음식이 쌀국수였다고.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고, 국물이 넘어가면서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B에게 힘들고 피곤한 날일수록 쌀국수는 더 생각나는 메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속 좀 편하게 드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한 것인데, 그게 너무 잦았나 봐요.’ 말갛게 웃으며 말하는 B의 모습에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어떤 동료는 재료가 푸짐한 샌드위치를 베어 물때 대접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다른 동료는 월급날 사 먹는 족발이 삶의 낙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인생의 맛이라고 했다. 서로 말하는 메뉴는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음식을 떠올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다. 바로 떡볶이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떡볶이부터, 학창시절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먹던 떡볶이, 면접에서 떨어지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홀로 사 먹던 떡볶이까지. 떡볶이는 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나이가 들면 물리겠거니 했는데 여전히 떡볶이는 내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회사를 휴직하면 지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아이들을 챙기고, 살림을 꾸리고, 사람들과 얽히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여전히 마음이 버거운 날이 생긴다. 그런 날 나는 어김없이 떡볶이를 떠올린다. 


점심으로 빨간 국물에 담긴 떡볶이와 내장을 포함한 순대를 사 왔다. 매콤한 향이 풍기면서도 달콤한 떡볶이가 딱 내 취향이다. 떡볶이에는 튀김이나 순대가 빠지면 섭섭하다. 입안에 떡볶이 떡과 순대 하나를 입에 넣고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삼킨다.


떡볶이 그릇이 비워질수록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나를 지치게 하는 일도 꼭꼭 씹어 삼켰나 보다. 물론 그런 일들은 다시 슬금슬금 자라나서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포만감과 매콤한 향만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현재로서는 떡볶이의 압승이다.


문득 어제 투덜거리던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은 요즘 인간관계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세상엔 원래 이상한 사람이 많아’와 같은 위로로 뜨뜻미지근하게 대화를 마쳤더랬다. 동생에게 커피 쿠폰을 보냈다. 가장 큰 사이즈로. 커피를 좋아하는 동생에게 내 떡볶이와 같은 행복을 보내주고 싶었다. 이내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하는 귀여운 이모티콘 여러 개가 날라온다.


때로는 ‘밥은 먹었어?’라는 말 한마디에 울컥할 때가 있다. 열 마디의 말보다 음식 한 입이 힘이 될 때가 있다. 음식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에 큰 위로가 되는 경우를 왕왕 본다.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 빈속도 채우고, 공허해진 마음도 채워 넣는다.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곱씹고, 다가올 밝은 미래를 향해 입맛을 다신다. 오늘, 힘든 일이 있다면 자신만의 소울푸드로 위로 받으시길. 그리고 누군가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힘든 일을 털어내시기를.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분야 기사로도 발행되었습니다.

http://omn.kr/20u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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