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문장 1>(알마, 2013)
15세기에 지금 ‘칼’을 의미하는 단어는 ‘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가 됐든, 18세기가 됐든 어떤 사람이 우연히 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갈’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칼’이라고, 딱히 ‘칼’이라기보다는 ‘칼’ 비슷하게 말했겠죠.
아무튼 갈도 아니고 칼도 아닌 그 중간소리를 내 어떤 사람들, 그러다가 아예 ‘칼’이라고 발음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것이 파롤 차원의 실천입니다. 여전히 랑그는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갈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칼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 때가 왔을 겁니다. 그 순간 한국어에서 칼을 의미하는, sword를 의미하는 말은 칼로 변합니다. 이건 랑그의 역할이 아니라 파롤의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파롤은 실천적인 것이고, 그래서 창조성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표준 발음에서 약간 어긋난 발음을 했는데, 그 잘못된 소리가 힘을 얻게 되면 결국 단어의 형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언어 변화가 주로 파롤의 역할이라는 것, 이해하시겠죠? 왜냐하면 랑그라는 건 사회적 약속이고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반면, 파롤은 자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을 하다보면, 잘못 말하는 수도 있고, 제가 예로 든 것처럼 갈 갈 갈 갈 하다가 칼이 됩니다.
‘칼’의 중세 형태 ‘갈’은 현대어 ‘갈치’라는 말에 남아있습니다. 갈치는 원래 칼처럼 생겨서 이름 붙인 것인데, 아직 ‘갈치’는 ‘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따른 예를 들자면 ‘고’도 그렇습니다. 코를 중세 15세기 언어에서는 ‘고’라고 했는데 지금은 ‘코’라고 합니다. ‘고’라는 말은 ‘고뿔’이라는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뿔은 감기라는 뜻입니다. 15세기 사람들 생각에 감기는 코에서 마구 불이 나는 것이었어요.(p.233-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