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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i Oct 20. 2023

23.10.20 오늘의 풀무질

기다리는 건 끝없는 대기는 고도로 심화한 기대와 같아서.

어떤 활자도 읽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어떤 노래도 들리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텅 빈 원고지 같다. 붉은 선으로 나뉜 빈칸들이 나를 기다리지만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무언가 채워야만 한다는 압박감만이 나를 짓누르는 채로,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기다리는 건 너무, 끔찍하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특히 더 그렇다.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무언가 얻어지기를 기다린다. 명확하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은 노력으로 채울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빈칸을 뚫어지게 노려볼 뿐이다.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대충 펜을 휘두르다 버린 원고지가 등 뒤에 산처럼 쌓여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시선을 내버려 두기로 한다. 모든 판단과 결정을 유보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은 흐른다.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적막만 쌓인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제각각 따로 논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기다림이 출발한다. 셋은 매분 매초 각자의 중력으로 진자 운동하는데, 그 사이에 끼어 온몸을 얻어맞다 보면 정신이 멍해진다. 박자를 놓친 칼춤이다. 속도와 힘이 붙어 날아다니는 칼에 휘둘리는 꼴이다. 분명 내 것이었던 칼이 나를 가졌다. 번쩍이는 칼날을 휘두른대도 아무것도 해하고 싶지 않다. 어이없는 욕심에 두들겨 맞는 건 칼을 쥔 몸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고통도 무시하고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긴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 떠오르는 건 과거에 썼던 자신이다.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자기 인용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끝없는 대기는 고도로 심화한 기대와 같아서.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물 바닥까지 닥닥.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다른 시간과 다른 상황임에도 같은 감각이 겹친다면 그 한 끗 차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을 뭉쳐 한편으로 치워버리려 한다. 쓰고 싶은 마음만 남아 쓸 것을 찾지 못할 때 남기는 기록은 후에 어떻게 읽힐지 무섭다. 그럼에도 쓴다. 오늘은 이런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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