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욕망, 자기애, 얻음, 경멸
빨갱이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대학교에 다닐 적에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기보다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게 많았다. 되어야 하는데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일들을 직접 나섰다. 멋모르는 패기와 은은한 교만이 적당히 등을 밀었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욕망이었는지 모를 뒤틀리고 뒤섞인 욕망이 나를 덮었다. 욕망을 무기로 무엇과 투쟁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욕망이 등을 밀었다면 살아야만 하는 책임은 나를 이끌었다. 먹고 숨쉬기를 위해서는 아무리 아껴도 일정한 돈이 필요했다. 일주일에 세 가지 일터를 누비던 시기가 있었다. 끊임없이 팔아야만 간신히 한 달을 먹고 마실 양식을 마련했다. 술을 팔고 지식을 팔았다. 그러면서 가진 것 중에 적당히 골라 팔았다. 역시나 무엇을 팔았는지 어렴풋하다. 때로는 물성을 가지기도 했고 한편으로 잡히지 않는 허상이기도 했다.
그날도 똑같이 정신없이 어디론가 움직이는 와중에 스친 학우가 한마디 했다. 말하는 건 제일 빨갱인데 하는 짓은 돈 제일 밝히는 속물이랬다. 딱 그 시기에 교내 활동에 대한 지원금을 따내려고 학과장 교수에게 생떼를 부렸었다. 그날은 여느 때처럼 잠이 부족한 오후였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아무래도 잠을 팔았던 건 확실하다. 가난한 사람이 제일 팔기 쉬운 게 내 입으로 들어갈 것들과 잠이다. 빨갱이와 속물이 서로 붙을 수 있는 단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욕망하는 모순을 느꼈다. 잠과 음식을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는 꽤 많은 돈을 욕망했고, 닥치는 대로 팔지 않아도 적당히 살 수 있는 해방사회를 욕망했다.
먹는 데보다 마시는 데에 더 썼다. 그래야만 팍팍한 삶 가운데 조금쯤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에는 꽤 마셨던 것 같다. 속으로 맘껏 중얼거렸다. 나는 속물이다. 그런데 빨갱이야. 그런데 속물이지. 지금 확신한다. 학우가 건넨 말에는 경멸이 없었는데, 내 속의 경멸을 건드렸다. 빨갱이와 속물 중에서 어떤 단어가 더 듣기 싫었는지는 모르겠다. 대신 그날 이후 '나는 빨갱이이자 속물'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자랑하면 숨길 수 있었다. 사실은 빨갱이도 경멸하고 속물도 경멸했다. 사실은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았고 오직 잠만을 원했다. 기나긴 휴식, 모든 책임이 소멸하는, 영원히 얻지 못할, 얻는 순간 사라지는 욕망, 영면(永眠).
모든 것에 대한 경멸로 가득했던 사람은,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잠도 열심히 자고, 먹기도 열심히 먹는다. 여전히 가난해서 팔기는 하지만, 그때보다 덜 파는지는 또 확신이 안 서지만 살아있기는 하다. 이제 '잠'이라는 단어를 보더라도 영면(永眠)보다 "그래, 곤히 잠자. 그레고리 잠자" 따위의 말장난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잠든 잠자의 둥근 등딱지"를 떠올린다. 갑작스레 바퀴벌레가 된 잠자가 무슨 꿈을 꿀지 생각한다.
팔다 팔다 경멸까지 팔아버린 사람은 대신 말장난을 얻었다. 말장난은 모든 걸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끝없이 가라앉는 단어의 의미보다 둥글고 모난 글자의 모양으로 시선을 꺾는다. 지나가는 고양이의 하품, 욕하는 사람들 다 망하길 바라는 욕망. 구름으로 깜박거리는 햇살, 자기애와 자기 애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들. 커피잔에 맺혀 얼룩지는 이슬. 뭐 이런 식이다. 한껏 진지한 경멸보다 텅 빈 미소가 살기에 한결 낫다. 어떤 말장난도 사실은 웃기지 않다는 점이 진짜 웃기다.
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그래, 곤히 잠자. 그레고리 잠자"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다른 진지할 뻔한 얘기들은 모두 뒤로하고, 꿈결 정도로만 스쳤으면 좋겠다. 다들 밤에 푹 자고,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든든히 챙겨 먹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