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힘은 SNL, 민주당은 TED
두 당의 토론회는 재미없었다.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한다고 한탄할 처지가 아니다. 국민의 힘은 마치 MBTI 검사지를 들고 와 출석 체크만 한 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퇴장한 꼴이었고, 더불어민주당은 그럴싸한 PPT를 띄운 다음, 질문이 날아오면 "그건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라고 회피한 꼴이다. 전형적인 말만 많은 회의, 결론 없는 워크숍, 네 글자로 시간낭비.
사실 저 자리의 후보들에게 소주 한 잔 따라주고 "그 얘기 좀 더 해주세요."라고 하면 1시간 동안 누구보다 흥미롭게 떠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저 자리까지 올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전 국민이 보는 토론회라는 무대에 서면, 이들은 무미건조한 말들만 뱉을 뿐이다. 딱히 기억에 남는 말도 없다. 어쩌면 이게 이들의 본모습일까? 어쩌면 이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정치 토론이라는 형식을 너무 고지식하거나 얄팍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란 사람도 결국은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일 뿐인데, 그들을 '정답을 말하는 기계'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토론은 누가 더 화려하게 말하나 가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하게 말하나의 장이 되길 바란다. 그런데 이번의 토론회가 그들의 최선이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소름 돋고 무서운 일이다.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가나다 순으로 국민의 힘부터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국민의힘 경선 토론회는, 정치적 스피드 데이팅에 가까웠다. 후보자들은 A조와 B조로 나뉘어 등장했고, 각자의 정책, 비전, 심지어 MBTI까지 들고 나왔다. MBTI는 왜 들고 오는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 아침 뭘 먹었는지 이야기한 후보가 없었다는 데 있다. 대통령 후보를 검증하는 자리에서 이런 걸로 시작한다는 건 예능프로 SNL이 대선 캠페인을 접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의도는 이해한다. 무당층의 눈길을 끌고자 했을 테니까. 문제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지도 설득력 있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A조 토론은 마치 리더라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결국 누가 진짜 리더인지보다 '제가 진짜 리더입니다.' 같은 자기 복제가 반복된 시간이었다.
이어서 정책 토론을 들여다보면, 사실 정책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다. '일하는 대통령', '첨단 산업 대통령', '기업 하기 좋은 나라' 이쯤 되면 표어 콘테스트라도 하는 줄 알겠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런 건 장식일 뿐이라는 듯이 디테일은 온데간데없었다. 청년 문제, 연금 개혁, 군대 이야기 등 다룰 건 많았다. 하지만 결국 '뭔가 하겠습니다.' 정도의 수준에서 멈췄다.
그나마 살짝 잠이 깼던 순간은 안철수 후보가 김문수 후보에게 AI와 양자컴퓨터를 혼동했다며 날린 직격탄이었다. 드물게 등장한 지식 기반의 팩트 검증이었다. 나는 덕분에 "드디어 토론이라는 걸 하는구나." 싶은 감흥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은 민주당 비난에 시간을 할애하며 귀중한 토론장을 일방향 불만 창구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1) 밸런스 게임, 현실 정치 퇴행의 시작
황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문제인의 운명 VS 조국의 시간', '기본소득 VS 지역화폐' 같은 밸런스 게임이 나왔다. 이쯤 되면 이 토론회는 유권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코미디쇼의 관객 취급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능에 가까운 연출을 굳이 정치에 이식하려는 시도. 물론 대중성을 확보하는 건 좋다. 하지만 정치는 대중성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무시한 셈이다. 그럴 거면 유재석, 손흥민, BTS, 김연아가 대통령 되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비전을 말하려면, 솔직히 말해 1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 안에 국가의 외교, 경제, 복지, 교육을 다 설명하려면, 자연스럽게 게거품이 입가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귀중한 시간에 그들이 한 일은 뭐였을까? 밸런스 게임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선택은, 기묘하게도, 후보들의 정치적 성향을 단 몇 초 만에 보여주는 데 효과가 있다. 마치 ‘이 후보는 라면 파야, 치킨파야’ 같은 식으로 단번에 구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국가의 리더를 뽑는 자리 아닌가? 회식 메뉴 고르기가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흥미가 아니라 책임이 있어야 빛나는 자리다. 그런데 이 게임적 형식을 그 자리에 들여놨다는 건, 진지함을 희화화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무릎 담요를 두르고 TV 앞에 앉아 있는 유권자들에게 "우리는 나름 유쾌해요."라고 외치는 꼴이다. 반성해도 모자랄 시국에 이런 형식을 짜고 있다니.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포인트가 하나 있다. 이런 형식은 인지도가 높은 후보에겐 짧고 강렬한 어필의 기회지만, 그렇지 않은 후보들에겐 그야말로 억울한 코너다. MBTI가 이니셜이 아니라 마케팅 도구가 되는 순간, 정책은 뒷전으로 밀리고 만다. 정치가 예능을 닮을 때, 정작 웃지 못하는 건 유권자일지도 모른다. 이건 웃기려다 국정을 놓친 사소한 패착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착오다. 그리고 이 착오에 이름을 붙인다면, '현실 정치의 퇴행'에 가깝겠다.
2) '누가 이재명을 이길 것이냐?'라는 협소한 시각
더욱 가관인건 몇몇 후보들이 이재명 후보와의 결투를 토론의 핵심으로 만든 듯했다는 점이다. 마치 중세 기사들처럼 "누가 이기느냐"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이재명 사냥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도통 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국민들이 진짜 궁금해하는 것은 “누가 이재명을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 나라의 5년을 설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그런데 그건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정말이지, 똥볼을 찬 것도 모자라 자랑까지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축구였으면 감독이 옷 벗고 나갔을 장면이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는 누가 준비된 사람인지, 누가 슬로건이 아닌 실현 가능한 청사진을 갖고 있는지를 유권자가 스스로 가늠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거기다 SNL 식 게임을 끼얹는다고? 이건 토론이 아니라, 이념 코스프레가 되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유치 찬란한 질문에는 다들 신속하게 답하면서, 정작 나라의 설계를 묻는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밸런스 게임이 아니라 균형 감각이다. 다음 토론회에서는 MBTI 대신 정치 철학을, 허세 가득한 스피치 대신 디테일한 정책 설득을 보여주기를. 난 퀴즈쇼를 보려고 풀 영상을 본 게 아니다. 받아 적을 만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이번 국민의힘 토론회 기획한 사람은 반성문 10장 써야 마땅하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자들의 첫 TV 토론회는, 적어도 형식만 놓고 보자면, 꽤 괜찮았다. 아니, 의외로 성숙했다. 정치 토론을 보면서 “오, 이건 SNL이 아니라 진짜네?” 하는 반응이 나올 줄이야.
세 명의 후보는 정치, 경제, 외교, 안보, 사회 같은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와, 마치 학교 발표 준비를 세 번은 해온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정책 방향을 열심히 설명했다. 누군가는 파일을 뒤적였고, 누군가는 수치를 읊었으며, 누군가는 본인의 경험을 슬쩍 녹여냈다. 이쯤 되면 “그래, 이게 그나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지” 하고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주도권 토론도 제법 괜찮았다. 누가 누구를 지명해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또 누가 당황하거나 반격하거나, 가끔은 “좋은 말씀입니다”라는 의외의 평화 공세까지. 어쨌든, 최소한의 상호 검증 구도는 만들어졌고, 무엇보다도 사회자의 질문에 시간 내 답하려는 태도에서 뭔가 '정책 중심 토론'의 본분을 지키려는 진정성 같은 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 판을 농담으로 덮지는 말자”는 뜻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형식은 좋았다. 후보들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정책을 말했고, 마치 준비해 온 리포트를 낭독하는 듯한 진지함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실속이 없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랬다. 정책을 '말하는 모양새'는 완비됐다. PPT 슬라이드라도 들고 나왔으면 감동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마치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고기는 없고, 접시에 칼질 자국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김동현 후보는 간병 국가책임제니, 기획재정부 해체니, 심지어 재정 연방제 수준의 자치분권까지, 듣기만 해도 국정 전환기의 현기증을 느끼게 할 법한 굵직한 개혁들을 쏟아냈다. 이재명 후보는 실용주의를 걸치고, 세종 집무실 이전부터 성장과 복지를 병행하는 대장정을 제안했다. 김경수 후보는 5대 권역 메가시티를 구축해 국가를 리모델링하겠다고 했다. 지방정부 권한 강화, 자영업 총량 관리, 교육 책임 분산까지 척척 나왔다.
이쯤 되면 듣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래, 말은 참 좋다. 근데, 그래서 어떻게?”
이후가 없었다. 즉, 계획이란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국민에게 그건 전달되지 않았다. 뭔가 ‘그럴싸한 말’과 ‘실제로 되는 일’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협곡이 있었고, 그 누구도 협곡에 다리를 놓지 않았다. 다만 서로 좋은 풍경 사진을 보여주기 바빴을 뿐이다.
결론은 이렇다. 이번 토론은 '정책을 말하는 척'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정말 뭘 하겠다는 건지’를 다시 혼자 유추해야만 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정치의 기술일지도 모르겠다. 많이 말하되, 정확히는 말하지 말 것.
1) 공약과 공상은 한 끗차이
김경수 후보의 메가시티 구상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그럴듯하다. 거대한 행정개편, 첨단 인프라, 균형 발전 등은 마치 도시에 문명을 건설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유권자 입장에선 게임이 아니다. 예산은 어디서 나고, 법은 누가 바꾸며, 사람은 누가 뽑을 건가? 이 부분은 비어있다. 미사여구가 꽉 찬 구상은 결국, 슬로건에 감정이입한 PPT 발표처럼 느껴진다.
이재명 후보 역시 현실 정치를 강조했다. 문제는, 그가 내놓은 공약들이 현실을 직면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는 점이다. 에너지 고속도로? 근사하다. AI 공화국? 듣기엔 미래지향적이다. 하지만 예산 상황은? 우리가 카타르나 사우디 아라비아도 아니고, 국가 재정 구조는 구조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빈약하다. 그런데도 구체적인 설명 없이 조세 지출 조정 운운하는 건, "운동해서 살 빼면 되지 뭐", "공부해서 고시 합격하지 뭐."와 다를 게 없는 말이다.
특히 트럼프 정부와의 무역 외교를 포괄 협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건, 바둑판 위에서 체스를 두려는 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김동현 후보의 “의제별 분리 협상”이 훨씬 그럴싸했다. 경험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일 경우엔.
세 후보 모두 각자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데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이재명 후보는 "진보냐 보수냐는 중요하지 않다." 며 실용 중심의 접근을 강조했다. 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서 그가 실질적으로 어떤 가치 기반을 우선시하는 정치인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김동현 후보도 "공정과 사람 중심"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를 실질적으로 어떤 정치노선에 위치시켜야 할 것인지 애매하다. 현실정치에서 이러한 말은 "날씨가 좋은 날에는 기분이 좋다." 정도의 말만큼이나 진부하고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더불어민주당 토론 참여자들은 진보와 보수를 넘는 게 아니라, ‘어느 쪽도 확실히 밝히지 않는 편이 더 유리하다.'라는 계산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적 실용주의가 아니라, 물타기 전술에 가까울 뿐이다.
2) 토론회가 아닌 발표회 수준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상호 검증이 부실했다는 데 있다. 주도권 토론이라 불리는 이 경기에서, 누군가의 약점을 공략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날카로운 질문은커녕, 뾰족한 단어 하나 없이 토론은 흐르고 흘러, 마치 발표회에서 "다들 수고하셨어요!"로 마무리하는 학생회 모임처럼 끝이 났다. 국민의 힘은 SNL에 가까웠다면, 더불어민주당은 TED 강연에 가까웠다. 물론 네거티브 정치를 지양하자는 그 고결한 의도는 박수받을 만하다. 정치가 네거티브에 중독된 나라에서 정중함은 마치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을 낀 사람을 보는 것만큼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중함이 때론 너무 정중해서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는 점이다.
검증이라는 건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책이 과연 현실 가능한지, 논리적으로 맞는지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우리 잘해봅시다."라는 말로 마무리할 거면, 그건 토론이 아니라 다도회에서나 하면 된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랄까. 치과에 갔는데 스케일링은커녕 양치질도 안 해준 느낌이다. 중요한 건 뽀얀 미소가 아니라, 그 미소 뒤에 숨은 충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