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대학원이 인기가 없다하나 그래도 오늘도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중에는 한문을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분과 상담을 했는데, 기왕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정리해 두는 게 좋을 듯하여 짧은 글을 씁니다.
오래된 거짓말이 있습니다. 바로 '공부 잘하면 시험을 잘 본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공부와 시험은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더라도 시험을 못 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대학원 한문 시험이라 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문을 오래 공부했다 해도, 한문 독해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시험에 대해 잘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게다가 치명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문을 술술 풀이한다 해도 답안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한문을 우리 말로 풀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시험이 그렇듯 시험 준비는 따로 해야 합니다. 공부가 아니라 '시험공부'!
대부분 대학원 제2외국어 시험은 사전을 휴대하도록 합니다. 다만 전자사전류는 안됩니다. 한문시험을 치는데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사전은 필히 지참하겠지요. 손에 익은 옥편을 가지고 시험장에 가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전이라도 손에 익지 않으면 시간만 잡아먹을 뿐입니다. 사실 요즘 인터넷 사전이 워낙 좋아서 저도 옥편을 쓰는 일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시험을 치려면 손에 익혀 두어야 합니다. 없다면 하나 사야지요. 한한대자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옥편을 한자의 음과 뜻을 찾는데 쓰는 건 금물입니다. 예를 들어 '志'를 '뜻 (지) 이렇게 찾아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글자가 어떻게 풀이되는지,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용례를 알아야 합니다. 1:1로 대응하는 식으로 한자를 익히면 되려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똑같은 글자의 다른 쓰임을 두루 아는 것이 한문 실력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러니 훈음을 익히는 공부는 금물입니다.
배경지식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문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한자도 다 알고 문장도 어렵지 않은데 풀이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날 때입니다. 맥락을 모르면 전혀 동떨어진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시간이 있을 때 번역문으로라도 두루 한문 고전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효율을 따지면 <맹자> - <논어>를 우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한문 시험은 경서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지난 서울대 대학원 후기 전형의 경우 <맹자>와 <삼국유사>에서 문제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혹 <고문진보>나 <사기>에서도 문장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가능대로 가능한 풍부하게 읽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라 순수하게 시험을 준비한다면 <노자>, <장자>, <시경> 등을 붙잡고 끙끙대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힘도 많이 들뿐더러 한문 실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논어>나 <맹자>를 주주朱注를 붙여 읽는 게 좋습니다.
종종 연락 주시는 분을 보면 한문 공부가 처음이라 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하긴 나름 고문古文을 익혔다면 이런 정보를 찾느라 수고를 들이지 않을 테지요. 한문 공부에 기본이 없다면 일단 <대학>과 <맹자>를 익히는 것을 권합니다. 전문全文을 읽을 필요는 없고 깔끔하고 명확한 문장부터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대학>의 경우엔 경1장~전5장 정도까지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경1장은 달달 외는 것을 권합니다. 격물치지보망장은 난해하긴 하나 문장을 보는 눈을 기르는데 좋습니다.
시간이 정 없다면 <맹자> 명구名句를 익혀야 합니다. 문법도 익히기 좋고, 시험문제로 출제될 확률도 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제2외국어 시험이 실력을 측정하는 게 아니라 과락을 면하도록 하는데 <맹자>만 잘 익혀두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맹자>만큼 좋은 책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최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고전 강독 강좌가 많습니다. 아마 찾아보면 한문 강독 강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 공부가 목적이라면 크게 권하지 않습니다. 강독 강좌의 경우 진도도 느리게 나갈 뿐 아니라, 문장을 보는 실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통해 고전을 보다 명료하게 익히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만, 시험공부는 따로 해야 하기 마련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문으로 강독하는 수업을 들었다 해서 영어시험을 잘 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공부한다면 원문만 보며 풀이하기를 권합니다. 설사 번역본을 옆에 둔다 해도 원문만 있는 책을 첫 번째 텍스트로 삼아야 합니다. 원문 번역이 함께 실린 책의 경우 예를 들어 전통문화연구회 본과 같은 책은 도리어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번역문에 기대기 때문이지요. 현토가 달린 것도 똑같은 문제를 가집니다. 가능하면 한글 번역이 없는 텍스트, 나아가 구두점까지 없는 글로 보는 게 한문을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http://ctext.org에 대부분의 원문을 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문대계본 혹은 영인본을 이용하여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한문에도 문법이 있습니다. 영문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문법을 숙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문장을 보고 무엇이 주어인지 술어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아가 문장이 어디서 끊어지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한문은 다르게 끊어 읽으면 영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구두점이 없는 책을 보는 게 좋습니다.
서울대 기출문제의 경우 가끔 구두점이 잘못 찍혀 나오기도 합니다. 그 경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본적인 문법을 익혔다면 괜한 시간을 쓸데없이 소모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법만 잘 익히면 낯선 문장도 대충 흐름을 잡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시험이 그렇듯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풍족하게 시간을 주는 경우는 없어요. 제2외국어 한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한문 문장을 우리말로 옮겨야 합니다. 아무리 한문에 능통하고 전체의 맥락을 짚어냈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옮겨 쓰지 못한다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기출문제를 직접 풀어보는 게 좋습니다. 그냥 해석에 그치지 말고 우리말로 옮겨보아야 합니다.
특히,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쓸 것. 말로 풀이할 수 있는 문장이라도 글로 옮기면 어색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글로 옮기지 못해 끙끙거리다 시간을 다 소진하는 일도 있지요. 그러니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우리말로 옮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공부와 시험공부가 다르다는 것처럼 한문공부는 시험공부와 또 다릅니다. 시험공부는 요령이 중요하지만 한문공부에는 요령이 별 쓸모가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공을 위해 한문을 깊이 공부해야 한다면 시험공부는 따로 하되, 한문공부를 위한 긴 계획을 잡기 바랍니다.
과락을 면하는 것은 쉽지만 나중에 논문을 쓰거나, 학문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문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보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넓고 깊게 텍스트를 보아야 합니다. 주석도 읽어야 하며, 시대와 문화가 다른 텍스트를 비교하며 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먼 길은 또 따로 길게 준비해야 하는 법. 혹여나 시험을 잘 보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하길 권합니다.
適莽蒼者三湌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
잠깐 놀러 나가면 세끼를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나
백리를 가려면 밤새 곡식을 찧어야 한다.
천리 길를 떠나려면 몇 달이나 식량을 모야아하지.
<장자>
https://blog.naver.com/princeab/221295689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