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땅콩의 글쓰기
청소년 글쓰기 교실에서 학생들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관련내용은 OZGZ.NET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사를 가기로 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한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을 치우던 도중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편지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존과 내가 나눈 대화들이었다.
“어이, 이강. 멀리 여행 간 김에 거기 술 좀 사와쥐 않겠어? - 존이...1590.05.25. ”
내가 존을 본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무덥고 짜증나는 날씨였다. 시장에서는 여는 때처럼 소음이 가득했고 사람들이 붐볐다. 환호성이 들렸다. 소음에 이끌려 술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존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큰 목소리로 왁자지껄 떠들면서 있는 대로 술을 입에 퍼붓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웃고 취하고 춤추고 있었다. 술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동참했다. 존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와 내가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연극이었다. 어느 날 존은 연극을 하고 싶다면서 주위에 떠벌렸다. 모두들 그를 거부했다. 대부분 그를 믿지 못 했다. 무거운 분위기의 연극과 존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부탁한 사람이 나였다. 인맥이 넓은 그는 연극이 성공하지 못 해도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내 줄 것이었다. 적자는 안 나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빌려줬다.
놀랍게도 그의 연극은 성공했다.
“존, 여기 술은 나만 마시도록 하지. 엄청 맛있거든. -이강...1590.06.02. ”
내 답장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재미가 붙어서 편지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이강, 이번 연극도 성공적! 또 돈 벌려고 멀리 여행 가서 참으로 불쌍하군. 모두가 나를 찬양했단 말이지. -존이...1594.08.21. “
존은 승긍장구했다. 원래 인맥도 넓었던 터라 연극이 퍼지는 건 일순간이었다. 일 때문에 해외에 많이 있었던 나는 존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 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나와 함께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편지로 의견을 물어봤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리 재밌지도 않고 다루기에는 까다로운 그런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은 나와 우정을 이어갔다. 내가 이유를 물어보면 “고지식하긴.” 이라면서 웃어 넘겼다.
그는 완벽한 친구였다.
“그래서 기분 좋았나 보네? -이강이...1594.09.13. ”
“삐지기는. -존이…1594.10.04. “
그랬던 우리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언제일끼? 편지를 열어봤다.
“이번 연극의 감상평 좀 내놓아 보시지. 후훗. -존이...1596.07.21. “
어느 새엔가 존은 힘을 잃어갔다. 연극은 과거의 빛을 찾지 못 했다. 그가 마시는 술에는 환희와 오락이 아닌 쓴 맛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괜찮은 듯 연기했지만 그 연기는 끔찍했다. 존의 눈은 언제나 미래를 응시했지만 점점 과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날부터 존은 변했다.
추운 겨울날, 난 카페에서 존과 만났다. 새로운 연극 기힉이 목적이었다.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나는 평소랑 똑같이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일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수익도 대단하겠구먼. -이강이...1596.09.15. “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답했다.
“또 그 소리. -존이…1596.12.15. “
그 당시 대화와 완전리 똑같은 편지를 보자 얼굴이 찡그러졌다. 떠올리기 싫은 것을 생각해버렸다. 편지들을 다시 상자에 예쁘게 모아놀은 뒤 일어섰다.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내 머릿속에는 존이 나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 문장은 머릿속에서 점점 내려와 혀로 스며들었다. 입은 단어를, 문장을 내뱉기 시작했다.
“존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존은 우정을 중시했다. 연극을 지원해주는 친구들이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내가 그와 진정한 마음으로 대화한 적이 있었던가?
내 눈은 더 이상 허공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잉크에 담겨진 펜촉과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지를 응시했다. 서둘러 펜을 잡았다. 이번이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보낸 편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