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전사의 글쓰기 #4
이 글은 <루쉰, 전사의 글쓰기>에서 나눈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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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없는 삶이 있다. 실상 역사란 기록할만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므로 담아낼 만한 것이 없다면 역사가 없기도 하다. 물론 세상 사람 가운데 귀한 것만 모아놓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쓸모없는 것, 정말 아무런 쓸모없는 것을 모아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악취미라고 하면 악취미일 텐데, 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두기만 한들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흑역사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사라져야 할 운명을 지녔다. 사라져야 하며, 사라질 수밖에 없다. 혹여 누군가 폐기 처분하는 것을 깜빡 잊었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언젠가 자연스레 사라질 테니.
그러나 국가와 민족이라는 놈은 좀 다르다. 국가는 역사의 굳건한 토대 위에 자리 잡는다. 민족은 어떤가. 민족에는 뿌리가 있기 마련이며 그 뿌리란 캐고 캐어도 뽑히지 않는 튼튼하고 건강한 것이어야 한다. 역사의 토대 없는 나라도 있을 테고, 뿌리 없는 민족도 있을 테다. 아니,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이건 상관치 않는 삶도 있을 테다. 헌데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영 그렇지 않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단일민족의 굵고 질긴 뿌리야말로 귀한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들에게 진시황의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불쑥 이런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때 우리나라는요? 나의 대답은 영 불친절하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내용이 많지는 않다고. 금세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언젠가는 단군 운운하기에, 그건 역사가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라 말해 또 기운을 꺾었다. 중국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던 중에는 드디어 고구려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중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고구려가 쳐들어왔으면 운운. 왜 고구려는 서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히지 않았느냐. 웅성웅성 좀 시끄럽게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폭발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고구려 핏줄을 이은 것도 아니며, 설사 이었다 해도 고구려 아닌 것이 훨씬 많다고 땅땅 못을 박았다. 고구려와 아무 상관없다고. 고구려 역사는 고구려 사람의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단호할 필요가 있었을까. 문득 후회 같은 생각이 스치면서도 아이들이, 채 국사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저 유구한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반만년이 반토막 나고, 아니 고작 100년이 채 안 되는 나라에 산다는 이야기에 어질어질해하는 눈빛을 보면 대관절 저 역사와 뿌리에 대한 탐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호기심? 헌데 호기심이란 보통 남의 것에 대해 생기지 않는가. 내가 성급하게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다 배운 탓이다. 루쉰의 말을 빌릴까. ‘그래, 알겠다. 놈들 에미 애비가 일러준 게야!’<광인일기>
루쉰이 싸움을 건 대상은 여럿이었다. 그중에는 ‘전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 전통을 척결하는데 단호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찌되었든 동서남북 위아래로 찾아 나서서 가장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한 저주의 글을 얻어 가지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부터 저주하려고 한다. 설사 사람이 죽은 뒤에도 정말 영혼이 있어 이 극악한 마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 마음을 고쳐먹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쨌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24효도>
20세기 초, 루쉰의 시대에 벌어진 논쟁 가운데 하나는 ‘고문과 백화 논쟁’이 있었다. 어떤 글로 쓰고 읽어야 하는가를 두고 다투는 가운데 고문古文, 옛 글의 형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백화白話, 사람들의 입말에 맞는 글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루쉰은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는 나아가 한자라는 낡은 문자를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로마자 표기로 발음을 옮기면 되지 않을까?
1918년, 그러니까 정확히 100년 전 루쉰은 <광인일기>라는 백화문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듬해 1919년 5.4 신문화운동은 새로운 문예를 필요로 했는데, 이때 루쉰의 글이 널리 읽혔다. 루쉰은 <광인일기>를 통해 고문은 물론, 전통을, 식인(吃人)의 음험함을 폭로하며 이것들을 일소해버리고자 했다. 최초의 백화소설 <광인일기>는 그렇게 고문과 전통을, 식인의 낡은 풍습에 칼을 꽂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이란 낡은 신체는 힘이 세서 쉬이 숨이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 위 <24효도>는 1926년의 글이다.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한 저주의 글’로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1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18년 중국에서 서점을 들렸을 때 나는 먼저 루쉰의 글을 찾았다. 그의 글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있었다. 도리어 잘 보이는 곳에는 역사를 다룬 책이 즐비했다. 그런가 하면 흥미롭게도 장제스, 후스 등에 대한 책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것뿐인가. 학생을 위한 교재 가운데는 ‘반드시 익혀야 하는 고시문古诗文’과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이 즐비했다. 기차를 타고 칭다오를 벗어났을 때였을까? 이런 문자가 날아들었다. ‘四面荷花三面柳, 一城山色半城湖’ 풀이하면 이렇다. 사면이 연꽃이고 삼면이 버드나무라, 성은 푸른 산의 색으로 가득한데 절반은 호수라네. 지난济南으로 오라는 광고 문자였다. 21세기 스마트폰으로 날아 들어온 이 구절을 어찌 보아야 할까.
중국몽을 꿈꾸는 대륙의 기상을 보면 이제 루쉰의 비판은 낡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중국은 과거로부터,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끌어내는 중이다. 공자의 시대가 저물고 루쉰의 시대가 되었다면, 이제 루쉰의 시대가 저물고 다시 공자의 시대가 부활하는 건 아닐까? 실상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전통이냐,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낡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한편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도 중요한 질문거리이다. 루쉰의 시대에, 고문은 이미 낡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민중에게 글을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그 필요에 맞는 역할을 한 것뿐이다.
<흰 빛>은 루쉰의 전작들과 공명한다. 과거 시험에 연거푸 낙방하여 헛것을 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광인일기>와 <쿵이지>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광인일기>가 전통의 식인 풍습을 폭로하는, 그렇기에 미쳐버린 인물을 그렸다면 <흰 빛>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흰 빛>의 주인공 천스청은 아직도 옛 시간에 묶인 인물이다. 쿵이지와도 다르다. 쿵이지는 ‘가게 안팎으로 상큼하고 발랄한 공기가 가득 차’ 게 하는 존재였다면 천스청을 본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여 잠을 이루기에 바빴다. 아마 이 차이는 우선 천스청의 시대엔 아직 과거제가 남아 있었고, 쿵이지의 시대엔 이미 과거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과 이미.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직 몰락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몰락을 두려워하나, 이미 몰락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몰락 이후를 살아나간다. 그러나 문제는 더 근본적인 데 있기도 하다. 설사 과거제가 폐지된다 하더라도 천스청은 도무지 ‘이미’를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는 흰 빛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흰 빛이란 중의적인 표현이다. 동그랗게 떠오른 달을 의미하는 가하면, 그 달빛 아래 그 손에 쥔 쟁기를 떠오르게도 한다. 한편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할머니에게 들려오는 이야기, 어딘가 묻혀있다는 엄청난 은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천스청은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사실을 알자 그전처럼 발작이 인다. 어디엔가 있다는 은자를 찾아야지. 그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그의 집은 실제로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저곳을 파해칠 수 있다는 축복이 그의 발작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천스청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흠뻑 땀에 젖은 채 조급하게 땅만 긁어 댈 뿐이었다. 그때 심장이 공중에서 파르르 떨렸다. 또다시 이상한 물건이 감지된 것이다.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것이었는데 손을 대 보니 퍼석거렸다. 그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파냈다. 조심스레 들어 올려 등불 아래 자세히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썩은 뼈다귀 같았다. 듬성듬성 이빨이 그 위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이것이 아래턱뼈임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뼈가 손 안에서 덜커덕거리더니 히죽히죽 입을 여는 것이었다.
“또 땡쳤구먼!”
<흰 빛>
은자 무더기를 파해치는 천스청에게 닥친 또 다른 불행은 파보면 뭔가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때로는 사기 조각도 나오고, 녹슨 동전도 나오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나뭇조각이며 돌무더기, 하다못해 단단한 흙덩이도 나왔을 테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그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저 모래뿐이었다면 좀 나았으려나. 혹은 또 모르지, 모래에도 마음이 동했을지. 미련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은 없으므로. 길어보면 무엇이라도 나오기 마련이므로. 미련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 혹시 모르지 않는가? 실제로 천스청의 집 어딘가에 은자가 숨어 있을지. 그렇게 큰 집이라면 파고 파다 보면 은자가 아니더라도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지 혹시 아는가. 집이 큰 이유는 이유가 있겠지. 파고파다 보면 무엇인가 걸리기 마련이다. 유구한 바닥은 늘 무엇인가를 던져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 혹시 아는가 나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을 세운 장군이 있고, 천하를 호령한 재상이 있고, 하늘 아래 두려울 것 없는 황제가 있을지 아는가. 하다못해 비스무리한 무엇이라도 있지 않을까. 환영처럼 들러붙는 말, 환영처럼 들러붙는 욕망이야 말로 천스청이 쿵이지가 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덜커덕 거리는 뼈다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천스청의 몰락을.
쿵이지에게 없고 천스청에게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루쉰은 천스청을 이끈 것이, 그를 성문 밖으로 과감하게 이끈 것이 ‘공포 어린 희망의 비명(希望的恐怖的悲声)’이라 말한다. 여기서 거꾸로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공포란 희망의 다른 말이라는 점이다. 희망이 없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거꾸로 두려워하는 자야 말로 희망을 필요로 한다. 기꺼이 몰락하는 자는 희망이 없이도 살아가나 거꾸로 몰락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유예하는 자야말로 희망을 갈구한다. 그렇기에 공포건 희망이건, 어느 쪽이건 비애 어린 호소(悲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천스청은 결국 성을 떠나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처참하게도 열 손가락에 강바닥 진흙이 잔뜩 끼어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그는 성문을 벗어나 강바닥에서도 은전을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바닥을 바닥을 바닥을! ‘했었다’는 과거는, 할머니의 할머니 어쩌면 그 할머니도 할머니의 할머니에게 들었을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를 강바닥으로까지 끌고 내려갔다. 그가 단련된 신체였다면, 조금의 지혜가 있었다면 강바닥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바다로, 심해까지, 혹은 지층을 뚫고 어디까지 내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를 비추었던 흰 빛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늘에 높이 솟아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발작을 추동했던 달빛은? 그가 성문을 나섰을 때엔 달빛은, 무쇠 같은 빛은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러나 그는 달 빛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달 빛 아래 선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고향>의 주인공이다. 그는 달 빛 아래 바닷가 푸른 모래밭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알고 있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하나는 천스청이다. 그는 막다른 길을 마주한다. ‘무너져 내린 전도가 그 앞에 드러누어 있었다. 이 길이 점점 넓어지더니 그의 모든 길을 막아 버렸다.’ 아뿔싸 길이 끊어졌다.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애당초 없었던 것이란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있었던 것이 사라지면 있어야만, 기어코 있어야만 한다.
길이 끊어진 그곳에서 누군가는 그저 발을 내딛는가 하면, 누군가는 쟁기를 들고 땅을 파낸다. 역사가, 전통이, 과거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유효기간을 다한 순간 누군가는 미래를 기억하지만 누군가는 유구한 뿌리를 캐내려 호미를 든다. 역사란 뿌리란, 그렇게 상실과 절망의 반대면에 자리 잡고 있다. 상실이 클수록 집착도 큰 것이며, 절망이 클수록 요청되는 희망도 클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란, 뿌리란 그에 대한 집념이 강할수록 현실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루쉰은 20세기 초, 미래로 내딛지 못하고 주저하는 시대에 채찍질을 해댔다. 1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만년의 역사와 한민족의 위대함에 대한 향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길고 질기다. 뿌리가 아니라 그 집념과 집착이. 그러니 귀를 기울여 들을 말이다. ‘또 땡쳤구먼.’
잠깐. 그럼 오늘날 중국은? 왕서방네 집은 본디 크고 으리으리하며 게다가 지금은 매우 잘 살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할지는 담 넘어 차근차근 구경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