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1
멀리 강의를 떠나는 날이면 묘한 긴장감이 앞섭니다. 시간은 늦지 않을까,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대체로 강의에 늦는 일은 없는데, 아주 가끔 버스 시간을 잘못 계산하거나 하는 바람에 제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뭐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겠어요.
전북 진안에 내려가는데, 찾아보니 버스가 딱 두대뿐입니다. 오전 하나, 오후 하나. 오전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얼추 시간이 맞겠습니다. 10시 10분 버스인데, 한 3시간 걸린다네요. 행여 늦을지도 몰라 좀 빠른 길은 없나 찾아보는데 참 까다롭습니다. 전주를 들려서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버스 갈아탄답시고 한정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일단 오전 직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로.
좀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남아 무얼 할까 하다 아침을 먹기로 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기는 글렀어요. 버스에 내리자마자 학교로 가야 시간이 맞습니다. 무얼 먹을까. 베테랑 칼국수에 눈이 갑니다. 전주에 있는 베테랑 식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 흔한 바지락 칼국수와는 영 다른 모양인데 어릴 때 먹던 맛과 비슷한 바람에 참 반가웠었지요.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한참 버스를 타고 오가는 통에 제대로 끼니를 챙길 수 없을 테니 밥을 먹기로 합니다. 옆 한국관에서는 비빔밥이 있고, 건너 삼백집에는 콩나물 국밥이 있습니다. 비빔밥보다는 콩나물 국밥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근데 시켜놓고 보니, 어라? 전주 근방으로 내려가는데 전주에 본점이 있는 식당 밥을 먹고 있습니다. 뭔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솔솔 옵니다. 버스에서 책이라도 볼까 했는데, 역시나 흔들리는 버스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핸드폰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볼까 하다 꾸뻑 졸고 맙니다. 한참이나 가야 하는데 잠이나 자야지요.
얼마나 잤을까. 휴게소에 잠깐 내렸습니다.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지요. 바깥공기도 쇠고 구경도 할 겸 나왔습니다.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이제는 하도 잠을 자서 별로 졸리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개운하지도 않은, 뭔가 피곤한데 잠을 더 잘 수는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렇게 멀리 강의를 갈 때마다 제법 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직도 한참이나 더 가야 한다니. 바깥 풍경을 보지만 뭐 그리 흥겹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이 무료합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기묘하게 생긴 산이 보입니다. 마치 뿔이 솟아난 듯 기묘한 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다른 산들은 산자락을 걸치고 있는데 이 산은 그냥 우뚝 서 있습니다. 누가 일부러 꽂아놓은 듯이.
저것이 소문에 듣던 마이산이구나. 진안군에 내려 보니 두쪽 산이 우뚝 선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산을 찾아온 등산객도 보이네요. 어디 카페에라도 앉아 좀 쉬고 싶지만 시간이 다 되어 학교로 바로 가야 합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1.3km. 좀 걸어도 되겠습니다.
출발할 때에는 아침 온도가 좀 차더니 한낮은 제법 온도가 올랐습니다. 좀 걸으니 땀이 나네요. 얼마나 걸었을까. 마이산을 바라보며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찾아갔더니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학교가 있습니다. 작은 운동장에 축구를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정겹네요.
뒤늦게 알았는데 총 4개 반이 동시에 강의를 듣는 날입니다. 1학년과 2학년. 두 반씩 있는 이 학교에서 4명의 강사가 모였습니다. <나를 위해 공부하라>는 제목으로 저를, <독서의 기술, 책을 꿰뚫어 보고 부리고 통합하라>는 제목의 책으로 허용우 선생님, <듣는다는 것>의 이기용 선생님,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오창익 선생님. 아무리 보아도 저와 만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공부'와 '공자'를 주제로 강의를 듣는다니. 다른 재미있는 강의도 많은데.
이기용 선생님은 밴드 '허클베리 핀'의 리더기도 합니다. 저는 1학년 1반, 이기용 선생님은 이웃 1학년 2반입니다. 교실에 들어가서 알려줬더니 아니나 다를까 부러워하는 눈치입니다. 옆반에는 밴드 활동을 하는 작가님을 모셨는데, 여기서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고등학생들에게 '공부'를 주제로 강의해야 한다니. 몇 번이나 강의했던 주제이지만 늘 까다로운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결론이야 뭐 대단한 게 있을까요. 공부하라는 이야기이지요. 학교 공부 말고 다른 공부가 있다고, 좀 다른 길을 보여주고 싶지만 자꾸 공부라는 말에 발목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은은히 흐르는 피로의 흔적이 더욱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가능한 쉽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려는데 혼자 문제집을 풀고 있는 손, 꾸벅꾸벅 조는 머리, 어느새 책상에 엎드린 몸 등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결국 준비했던 내용을 건너뛰고 서둘러 결론을 말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아무래도 별 볼 일 없는 거라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실제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로, 중국, 언어, 시험 준비, 글쓰기 등등.
끝나고는 책에 저자 사인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단한 책도 아니고, 유명 저자도 아니지만, 게다가 공동 저술한 책이라 제 사인을 써 주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인가 질문이 들기도 하지만. 뭐,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라 생각하고 합니다. 글쓴이를 직접 만나고 자기 이름이 들어간 저자 사인을 받으면 책을 좀 아끼는 마음이 들지 않을지요.
멀리서 와서 짧게 강의를 하고 돌아가려니 좀 아쉽습니다. 다음에는 뭐라도 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다못해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걸 그랬는지. 이렇게 수고롭게 글을 쓰는 것도 기념으로 무어라도 쌓고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은 시간이었다는 추억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학교를 나서는데 아직도 해가 중천입니다. 돌아가는 길은 좀 다른 길을 골랐는데 이 길이 조금은 더 번화한(?) 길이네요. 초등학교에 중학교도 함께 모여있습니다. 학교 앞 분식집, 작은 문방구, 작은 가게를 지나 조금 걸으니 금방 터미널입니다.
주변 시장이라도 둘러볼까 했는데 글세요, 눈이 가는 게 없습니다. 뒤늦게 이 고을이 홍삼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걸 알았으나 저와는 별무상관입니다. 결국 하릴없이 전주행 버스 티켓을 바로 끊었습니다. 서울로 가는 직행이 없어 전주를 들렀다 가야 합니다.
전주 터미널에 내려서는 쫄면을 한 그릇 먹었습니다. 전주 쫄면은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을까 싶어서. 뭐 별로 그런 건 없네요. 뚝딱 한 그릇 해치우고 바로 서울행 버스를 타기로 합니다. 헌데 서울로 가는 버스 가운데 ‘프리미엄’ 버스가 있다고 해요. 할인기간이라 가격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호기심에 한번 타보기로 합니다.
자리도 널찍하고 커튼을 칠 수도 있는 데다, 좌석 앞에 모니터가 달려있네요.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데 뭐 역시나 금방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프리미엄 버스라 자잘한 기능이 많은데, 피곤한 사람에게는 다 소용이 없네요. 그저 널찍하고 편한 게 제일입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또 한참을 버스에서 자고 결국 한밤이 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럴 때면 하루가 참 꿈과 같이 지났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다음 7월에는 동해에 갈 일이 있는데 좀 더 재미나게 다녀와봐야겠다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