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읽기 4
* 괄호 안 숫자는 <천병희 역, 숲>의 페이지입니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2019년 현재를 지나며 드는 질문이다. 소수의 지식인과 무지한 다수의 대중이라는 구도는 여전히 견고하다. 하여 누구는 여전히 지식인이 너무 소수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무지는 위험하며 무질서하다는 판단도 반복된다. 그러나 때로는 대중의 이해가 바로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네 자신을 알라. 누구는 이렇게 비꼬기도 했다. '네 꼬라지를 알라'. 4권을 읽고는 이 문장이 떠올랐다.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건 말건, 그 말은 어떤 핵심을 겨누고 있다.
4권은 아데이만토스의 항변으로 시작한다. 3권에서는 이야기(시가), 글, 노래 등에서 내쫓아야 할 것을 열거했다. 그렇게 담박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든 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생활수준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이르자 문득 질문이 솟아난다. 그런 삶의 수준을 수호자들은 만족할까? 뭔가 부당하고 느끼지 않을까? 그들에게 전혀 이득이 없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수호자의 삶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의 삶이 그렇다면 누가 그 자리에 있으려 하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여럿일 수 있겠는데 소크라테스의 답은 이렇다.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목적은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209) 그래,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는 국가 전체의 행복이 중요하지. 그러나 이어지는 맥락을 보면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우리가 자네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농부는 농부가 아니고 도공은 도공이 아닐 것이며, 국가의 구성원들은 어느 누구도 제구실을 다하지 못할 것이네.'(210)
국가 전체의 행복이란 국가의 각 구성원이 '제구실'을 다하는 데 있다. 제구실을 다한다는 말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각자 맡겨진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는 뜻으로. 또 하나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상황에 머물러 있다는 뜻으로. 전자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이다. 제 맡은 일에 각자 책임을 져야지. 그러나 그것이 한계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책임과 의무를 넘어 그 그저 거기에 머물러 있음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소크라테스는 타고난 본성, 혹은 적성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그래, 사람마다 타고난 자질이 다르다.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본래적으로 자신의 현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현재는 늘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변화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국가> 안에서 그는 매우 정태적인 세계를 꿈꾸는 인물로 그려진다. 변화에 대한 경계, 그가 꿈꾸는 나라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가난과 부는 둘 다 장인들이 만드는 제품과 장인들 자신을 더 열등하게 만드네.... 부는 사치와 나태와 변혁을 낳고, 가난은 변혁에 대한 욕구에 더하여 비열함과 기술의 퇴보를 낳으니 말일세."(212)
부도 말고 가난도 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마도 이는 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리라. 신은 하나며 그는 변화하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감각을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양념과 과자, 감각을 일깨우는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것들. 그런 것을 내쫓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자. '음악양식의 변화는 언제나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하기에 하는 말일세.'(217) 게임, 놀이도 착한 것으로.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곧장 더 규율을 지키는 놀이를 해야 하네. 놀이가 규율을 지키지 않고 아이들도 덩달아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아이들이 규율을 지키는 책임감 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218)
2권부터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그의 후예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좋은 정신이 좋은 삶을 낳는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먹고 보고 듣고 즐길 것. 이 문제는 좀 조심스레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혀 근거 없는 억측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렇다고 바로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양념은 정신을 흐트러뜨리는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마라麻辣에 대한 추구는 사회적 광기의 한 잣대가 될 것이다.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 화음을 깨뜨리는 기묘한 노래, 경박한 박자는 삶을 타락시키는가? 그렇다면 '유산슬의 뽕포유'는 말 그대로 말초적인 즐거움으로 삶을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전장을 누비는 게임은? '배틀 그라운드'에서 서로를 죽이고 홀로 살아남는 놀이는 말 그대로 범죄의 온상일 테지.
이성의 대변자 소크라테스가 이토록 윤리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란다. 옛 중국 철학자들에게 지나치게 윤리적이라며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은 당최 무엇을 본 것일까? 따라서 거꾸로 드는 질문. 동양의 철학자들이 서양의 철학자들보다 더 윤리적인가? 잘 모르겠다.
돌아가자. 어쨌든 이 논의는 국가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 대한 것이기도 하므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해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정의를 위한, 건강한 삶을 위한 삶, 지복을 위한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진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렇게 치부하는 것도 바른 독해는 아닌듯하다. 그는 비유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 아니었나?
그의 국가는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좋은 양육과 교육 체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은 성격들이 태어날 것이고, 좋은 성격들이 좋은 교육을 받으면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더 나은 자식들을 낳는다는 점에서 선대보다 더 나은 성격으로 발전할 테니 말일세.'(216) 그렇게 좋은 성격의 자식을 낳는 것이 사소한 규율이나 법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쓸모없이 사소한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치 휘드라의 머리를 베듯이.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건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건 진정한 입법자는 굳이 이런 종류의 법률과 제도들을 만드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네.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고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고,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중 더러는 아무나 찾아낼 수 있고 나머지는 우리가 앞서 정한 생활방식에 저절로 수반되기 때문이네.'(222)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소크라테스의 이 확신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일까? 드디어 정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네가지 물건'이 중요하다 말한다. 나라에 필요한 네 가지 미덕,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 그는 나머지 셋을 발견하면 자연스레 네번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왜 넷인지는 묻지 말자. 다양한 미덕을 정리해서 넷으로 추린 것이 아니므로. 찾고 찾아보니 넷이더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넷이다. 앞뒤 없이 4딸라?!
첫째는 지혜 혹은 지식. 넷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 그 가운데 으뜸은 지혜라고 하겠다. 그는 이 지혜가 특정한 무엇에 대한 지식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라 안의 특정 요소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관해 결정하되 대내외적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그런 분야의 지식'(226)이 필요하다. 헌데 이러한 지식은 적다. 지혜를 가진 자도 적다. 이 지혜를 소수가 치자가 되어야 한다. 아니 소수의 치자는 이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연의 원칙에 따라 세워진 나라가 지혜로운 것은 전적으로 지도자와 치자 집단이라는 최소 부류와 그 부류가 가진 지식 덕분이네, 그러니 모든 지식 가운데 유일하게 지혜라고 불릴 수 있는 지식을 가진 것은 본성상 가장 적을 수밖에 없는 이 부류인 것 같네."(227)
지혜를 가진 소수가 다수의 사람을 지배하는 것. 그의 나라는 이렇게 지식의 위계로 상하로 나뉘어 있다. 그는 그 아래의 많은 이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예들과 자유민이라 일컬어지는 평범한 다수'(232)가 욕구, 쾌락, 고통 등을 지니고 있다 말한다. 지식은 작고, 욕망은 크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기개 혹은 용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기개 혹은 용기란 바로 '보전', 즉 지킨다는 미덕을 가리키는 말이라 본다. '어떤 경우에도 견지한다는 내 말은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그런 소신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존한다는 뜻이라네'(228) 소수의 지식인을, 고귀한 지혜를 지킬 것. 무엇으로부터? 바로 욕구, 쾌락 등으로부터. 이들은 지식을 집어삼키고 지혜를 씻겨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단단한 방패가 필요하다.
"소다나 잿물보다 더 세척력이 강한 쾌락, 고통, 공포, 욕망 같은 강력 세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법이 승인한 올바른 소신을 어떤 경우에도 보전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을 나는 용기라고 부르네."(229)
그는 지식과 지혜를 부동의 자리에 놓고 욕망과 쾌락을 능동의 자리에 놓았다. 변혁이란 욕망과 쾌락으로부터 시작한다. 변혁은 그 자체로 고귀함을 흔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전, 즉 기개와 용기의 방패로 단단히 막을 것. 그렇게 그는 소수의 지식인과 다수의 대중을 구분하고, 지혜로운 인물을 욕망의 파도에서 지켜내고자 한다. 욕망과 쾌락이 클수록, 그 역동성이 강할수록 더욱 그 방패는 크고 견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어떨까? 지혜와 지식이 본질적으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라면? 용기와 기개는 방패만 들 것인가? 욕망과 쾌락을 향해 칼을 들지는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개에게서 기개와 용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개는 집을 지키기도 하지만, 사냥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병사들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전장에 나섰다. 그러나 한쪽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창을 들었다. 용기와 기개가 지키기만 한다는 그의 말은 일부 기만을 감추고 있다. 욕망과 쾌락을 막는 방패는 언제든 욕망과 쾌락에 칼날을 들이댈 수도 있다.
"반면 지성과 바른 소신과 숙고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 절제된 욕구들은 가장 훌륭한 본성을 타고난 데다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발견하게 될 걸세"(232)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혜와 용기를 이어 세번째 미덕은 절제이다. 절제란 이 간극, 소수의 지혜자와 욕망을 품은 다수 사이에 벌어지는 합의이다. 그는 더 나은 소수와 더 못한 다수 가운데 무엇이 통치해야 할까 묻는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더 나은 소수가 다스릴 것. 그는 노예와 주인의 비유를 통해 절제란 '일종의 질서이며. 특정 쾌락과 욕구의 억제'(231)라 말한다. 노예란 나쁜 부분에 끌려다니는 존재를, 주인이란 좋은 부분으로 자신을 경영하는 이를 일컫는다.
"내가 보기에,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각 개인의 혼 안에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이 있는데, 본성적으로 더 나은 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네. 칭찬의 표현으로 말일세. 그러나 나쁜 양육과 나쁜 교육 탓에 소수인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에 의해 제압당하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한 일로, 사람들은 그런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노예'라고 부른다네."(231)
이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권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국가는 크고 개인은 작지만 이 둘은 동일한 구조 속에 있다. 따라서 내 안에 하나의 국가가 있다. 이 국가가 어떠냐에 따라 자신이 주인이 되느냐 아니면 노예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바람직한 나라와 어지러운 나라도 마찬가지일 테다.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인가? 마찬가지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될 것인가 어지러운 나라가 될 것인가?
'따라서 절제란 국가에서나 개인에게서나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 가운데 어느 쪽이 통치할 것이냐에 대한 이러한 합의'(233)이다. 그러나 다시 보건대 이것이 개인의 문제라면 합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가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 내면의 합의, 혹은 결심, 타협은 쉽지만 한 사회는 더 복잡하다. 도리어 방패와 창이, 아니 때로는 날카로운 칼날이 지나간 이후를 합의라고 말하지는 않는가. 어쩌면 합의라는 말 뒤에는 피 묻은 칼날이 숨겨 있을지 모른다. 거세당한 욕망 덩어리도 함께 숨기면서. 따라서 그의 말을 비꼬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혜란 우쭐거림이며, 용기란 꼰대질이고, 절제란 억압이라고.
이제 정의의 문제. 그는 실상 정의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이쿠! 이미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었구나. 그는 앞서 말했던 하나의 전제를 다시 이끌어낸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자 자기 적성에 가장 잘 맞는 한 가지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235) 그것이 바로 정의의 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235)
지혜와 용기, 절제로 구성된 이 나라의 구조 그 자체가 정의이다. 그러니 반대의 부정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쉬이 알 수 있다. 욕망에 지혜를 투사하는 것. 욕망이 지혜를 삼켜버리는 것. 절제의 합의를 어기고 욕망과 지혜를 마구 뒤섞어 버리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무엇이 부정의일까. 대중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 대중이 지식인을 압도하는 것. 지식인과 대중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 등등.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소크라테스는 나라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꼬라지를 알고 제 분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타고난 장인이나 사업가가 부나 대중의 지지나 체력 따위에 우쭐해져서 전사 계급에 진입하려 든다거나, 아니면 전사 중 한 명이 적성에 맞지 않는데도 결정권을 가진 수호자 계급에 진입하려 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걸세. 만약 이런 사람들이 도구와 사회적인 지위를 바꾸거나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러한 교환과 참견이 나라에 파멸을 안겨줄 것이라는 데에 자네도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238)
나라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 때문이다. 삶은 왜 망가지는가? 욕망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불의를 설명하며 동시에 삶의 불행도 함께 설명한다. 국가와 개인은 같은 구조 속에 있으므로. 그래서 바람직한 나라를 위해 우리는 대중의 발을 묶어야 한다. 대중은 그저 대중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때 정의가 발현된다. 농부는 농사를, 제화공은 신발 만들기를, 상인은 물건 파는 일을.
누구는 '거리의 정치'라는 말을 하며 이를 파시즘의 전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거리'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거리의 남성은 사납고 포악하며, 거리의 여성은 타락하고 음란하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대중은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거리는 그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자리라는 생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각자 생업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숨겨져 있다. 자신의 자리에 걸맞게 지식을 사용할 것. 신발 만드는 지식, 옷 짓는 지식, 밥하는 지식을 가지고 제 욕망을 제 자리에서 실현할 것. 나라를 다스리는 지식은 따로 있다.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불의는 틀림없이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내전이요 참견이요 간섭이며, 혼의 한 부분이 전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네. 그런데 혼의 그 부분이 혼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그 부분은 정당하게 지배하는 부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일세."(258)
그는 본디 자연적인 상태가 상하의 안정적인 구조의 조화로움이라 말한다. 부적절한 상황, 내전 상황은 역동적인 욕망 때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 불안정한 사회의 책임은 무지한 대중에게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래서 다시 던지는 질문.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인가?
* 매주 화요일 '우리실험자들' 세미나에서 나누는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