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읽기 5
* 인용문 번역은 <천병희 역, 숲>을 참고했습니다.
까먹지 말자. 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여러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창작이기는 하나, 배경을 잊지 말도록 하자. 사실 기억하기 쉽지 않기도 한데 아데이만토스, 글라우콘의 번갈아가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으로 대화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독무대처럼 보이지.
5권은 이 사실을 환기시키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4권의 말미, 최선자정체政體,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를 이야기한 뒤 '나쁘고 잘못된 네 가지 범주'(440a)가 있단다. 이를 설명하려는 찰나 폴레마르코스가 갑자기 등장한다.
"폴레마르코스가 한 손을 뻗어 아데이만토스가 입고 있던 겉옷의 어깻죽지를 잡더니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신도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뭔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는데, 나는 다른 말은 모르겠고, '우리 그냥 놓아드릴까? 아니면 어떡할까?'라고 하는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네."(449a)
폴레마르코스는 케팔로스의 아들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집의 주인이다.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야기 중간에 끼어든 것일까? 혹시나 이야기가 지겨워서?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두꺼운 책은 반쪽이 되었으리라.
이 대목은 이 길고 긴 대화의 상황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또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처음 제기되었던 문제,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은 4권까지 대충 이야기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듣기 위해 국가에까지 눈을 돌려야했지만. 먼 길을 돌아,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 이야기되었다. 드디어 처음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지만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으려 했지만 폴레마르코스의 개입으로 이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세번의 파도라 언급한다. 결국 나쁜 국가의 네가지 예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미뤄진다.
"여자 인간은 본성적으로 남자 인간의 모든 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중 어느 것에도 동참할 수 없는가, 그도 아니면 어떤 것에는 동참할 수 있고 어떤 것에는 동참할 수 없는가? 그러면 군복무는 어떤 범주에 속하는가?" (453a)
첫번째로 여성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느냐를 다룬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과연 여성도 모든 활동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직업이나 사회참여에 남녀의 차이는 없어야 한다고.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특히 국가 기능 일부에 여성이 참여하는가 여부는 어느 정도 논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군인이나 경찰 따위가 그렇다.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이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여경 논란이 대표적이다. 한편 군복무 문제는 한국의 특수성을 보여주는데, 여자 경찰에 대해서는 탐탁지 않는 이들이 여성 군복무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네 현실은 그렇다 치고 소크라테스는 어떨까? 우선 소크라테스가 이천 년도 넘는 오래전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더불어 앞서 여러차례 보았던 여성에 대한 입장을 생각해보자. 그는 남성만이 진정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국정 운영과 관련된 업무들 가운데 여자가 여자이기 여자에게 속하는 것도 없고, 남자가 남자이기에 남자에게 속하는 것도 없네. 타고난 소질은 양성 사이에 고르게 배분된 만큼,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모든 업무에 참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세. 비록 모든 업무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약하긴 하지만 말일세."(455e)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성별에 따른 구분보다 어떤 적성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점이다. 적성이란 무엇일까. 남보다 쉽게 배우는 것, 남보다 빨리 익히는 것이다. 사람은 이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성별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모든 직업에, 소크라테스가 만든 정의로운 나라의 모든 계층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않았다. '여성 철학자'가 등장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그가 얼마나 이론적인 인물인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의 나라는 하나의 이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과연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 국가의 치자로 여성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그 질문에 대해 그저 형식적인 답을 내놓았을 뿐일까?
3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개별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수호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어야지 자기 재산을 지키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수호자는 집을 가져서도 안 된다. 가족도 물론.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독신을 주장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무래도 독신이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며 반대했을 것이다. 그는 '처자공유'라는 기이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처자공유라니, 여기서 '공'유를 문제삼는 이도 있을 테고 공'유'를 문제삼는 이도 있을 테다. 전자를 문제삼는다면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체제를 위협한다며 발끈했을 테고, 후자를 문제삼는다면 여성과 아이를 소유한다는 발상 자체를 문제삼았을 테다. 오늘날 현실을 생각하면 후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집과 매우 가까운 일상을 살고 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집과 매우 가깝지만 요즘 우리집 주방은 공동화되고 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는데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가 학교 급식을 이용하는 이유가 크다. 앞으로도 더욱 이런 부분은 늘겠지. 주방기능은, 주방의 크기는 앞으로 더 줄어들어도 될듯하다. 비단 주방뿐이겠는가. 전통적인 가족 기능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회로 이전되고 있다. 육아, 교육, 이제는 노후까지도. 앞으로도 가족은 더욱 많이 공공화되어야 한다.
여성을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동등한 주체로 인정했음에도 여성과 아이를 소유한다는 표현은 소크라테스의 한계를 보여준다.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도 있고, 그남(그리스 남성)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고, 철학자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사실 이 문제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우생학적 사회를 꿈꾸었다는 점이다.
"가장 훌륭한 남자들은 가장 훌륭한 여자들과 되도록 자주 성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열등한 남자들은 열등한 여자들과 되도록 드물게 성관계를 맺어야 하네. 또한 우리 집단이 최상급이 되려면 우리는 전자의 자식들을 양육하되 후자의 자식들은 양육해서는 안 되네."(459e)
그는 인간들 가운데 훌륭한 소수와 평범한 혹은 못난 다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수는 사회를 이끄는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또한 동시에 이들을 통해 사회를 더욱 나아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들의 자질을 이어받은 자녀들이 태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는 '처자공유'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기만을 자행하고 있다.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들을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소수가 독점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누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를 버려두고 추하고 못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하겠는가? 그럼 평범한, 혹은 추하고 못난 다수가 가만히 있을까?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거짓이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거짓말을 부정했으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그는 '교묘한 제비뽑기'(460a)를 고안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상 결과는 정해져있지만 운에 따라 상대가 정해진다고 여기도록 만들어야 하니.
그러나 이 기만보다 더 큰 문제는 훌륭한 이들의 자녀만을 선별적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부모가 직접 자녀들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가 이들을 기른다. 나머지는?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열등한 부모의 아이들이나 다른 집단에서 불구로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에 감춰버릴 것이네."(460c)
자, 이렇게 그의 나라에는 훌륭한 소수만이, 훌륭한 소수의 자녀들만이 남게 되었다. 역사는 그의 이상을 실행으로 옮긴 몇 차례의 시도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종종 그런 우생학적 실험을 단순한 예외로 치부하곤 한다. 정말 그럴까? 따져보면 그의 주장은 여전히 질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늘날도 비슷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나? 훌륭한 아이들을 더욱 훌륭하게 교육하고 기를 것. 열등한 아이들은? 그저 내버려 둘 것.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박노자는 최근 한 칼럼에서 한국 사회가 학력을 기준으로 신분제에 준하는 정도로 나뉘어 있다고 진단한다. 양천의 구분은 사라졌지만 SKY캐슬의 선민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 그는 이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질문한다. 특정 직업, 특히 고위직에 SKY 출신을 제한하자는 것. 역차별이 필요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나라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개인적으로 <국가>를 읽으며 그의 발칙한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돌아와 소크라테스가 꿈꾸는 나라는 가족을 공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족이 해체되었고, 국가라는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이들은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느낀다고 말한다. 국가의 성공을 나의 기쁨으로, 국가의 실패를 나의 고통으로. 그가 가족을 해체하려 한 것은 '가장 개인을 닮은 국가'(462c)가 최상의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족에 대한 감각은 헬라인과 비헬라인을 다르게 대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는 헬라인의 전쟁은 적당한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 말한다. 상대를 몰살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상대 국가의 국민을 노예로 삼지도 않을 것이라고. 이를 '내분'과 '전쟁'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470b) 헬라인들끼리의 다툼, 내분은 결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기대감의 표현에 불과하다.
천병희는 '철인 치자'의 문제가 세번째 파도라고 말한다. 반면 <플라톤 국가 강의>에서 이종환은 이상 국가가 현실에서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세번째 파도라고 말한다. 내용을 보건대 이종환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 이 세번째 파도가 '가장 크고 위협적'(472a)이라 진단한다. 크고 위협적인 만큼 소크라테스의 태도도 방어적이다.
소크라테스는 화가의 비유를 들어 비록 그 본성을 찾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의에 대한 탐구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말한다. 화가가 완벽한 인간을 세세하게 그린다하더라도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지를 증명할 수 없다. 훌륭한 화가는 그를 묘사하는 사람이지 그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주장한다.
"실천은 언제나 이론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실천이 이론에 비해 진리에 덜 근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자네는 이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 그렇다면 자네는 나에게 우리가 이론적으로 상세히 논한 것들이 현실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강요하지 말게나. 그보다는 오히려 만약 한 국가가 우리가 기술한 것에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네의 요구사항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찾아낸 것으로 인정해주게나."(473a)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한발 물러선다. 그가 이야기한 국가는 이상의 국가일 뿐 현실에서 실천하기에는 버거운 나라이다.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나라처럼 보인다. 그는 이 이상적인 나라를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저자 플라톤은 왜 이 부분을 넣었을까? 당당하고도 치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덩달아 그를 비판하고 공격하던 힘도 빠질 수밖에.
현실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진리와 영원한 간극으로 떨어져 있는 인간의 위치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 의심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주장을 내놓는다. 그 유명한 철인 통치자의 이상이 그것이다.
"철인들이 국왕이 되거나, 아니면 지금 국왕 또는 치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진정한 철인이 되기 전에는, 그리하여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결합되고 지금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따로따로 추구하는 여러 자질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당하기 전에는, 여보게 글라우콘, 국가들의 고통은, 아니, 인류 전체의 고통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네."(473d)
'국가들의 고통' 나아가 '인류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당혹스럽다. 트라쉬마코스의 반론을 하나씩 차근차근 부수었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왜 이렇게 널뛰기를 하는 것일까? 이상을 현실에 옮기기 힘들다고 이야기해놓고 뭇 국가들의 문제는 물론 인류 전체의 문제까지 확대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는 어째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당면한 현실을 마주하는데 힘을 기울이지 않는 걸까?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철학자(philosopos)가 누구인지, 철학자는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그 유명한 형상(idea), 지식/인식(episteme), 의견(doxa)에 대한 논의도 이어진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철학자는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475e)이다. 그는 개별적인 사물에 주목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자체 또는 아름다움의 영원불변하는 형상(idea)'(476b)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자체, 영원불멸하는 형상이 실재한다고 본다. 실재하는 것에 관련된 능력이 지식/인식(episteme)이며 실재하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것과 관련된 능력이 의견(doxa)이다. 그는 나아가 아름다움 자체를 믿고 이를 추구하는 자를 깨어있는 사람으로, 그와 반대되는 사람을 꿈꾸는 사람으로 이야기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의견이란 꿈과도 같다. 그것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철학자란 변하지 않는 것, 영원불멸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매번 사물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러야지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러서는 안되겠지?"(480a)
소크라테스의 말을 따르면 우리가 앎이라 생각했던 것 대부분은 의견에 불과하다. 지식이란, 인식이란 영원불멸한 실재에 대한 것이므로. 이는 매우 드물고 귀하다. 철학자는 이를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이다. 지식과 의견의 구분, 그리고 지식에 대한 나아가 영원불멸에 대한 추구. 이때 철학자는 매우 답답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홀로 보석을 찾는 사람과도 같다. 그의 지식은 영원불멸하나 그것이 너무 고귀한 탓에 사람들에게 두루 나누어 볼만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마치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들을 독점하는 소수의 수호자들처럼.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기만술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실상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자신만이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도리어 소크라테스가 거대한 파도를 맞이해 내놓은 말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 구경이란 몇 걸음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상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도리어 떨어져 있기에 보이는 것이 있다. 더불어 함께 볼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구경은 개인의 독자적인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구경하는 것이 지식이라면 어떨까? 그 지식이 꼭 철학자의 것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컷 구경해놓고 그것이 나만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으랴.
* 매주 화요일 '우리실험자들' 세미나에서 나누는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