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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Oct 30. 2019

철학자는 왜 왕이 되어야 하는가?

<플라톤의 국가> 읽기 6

* 인용문 번역은 <천병희 역, 숲>을 참고했습니다.



1. 철학자, 비뚤어진 인간


철학과로 대학원을 진학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철학관을 차려 점쟁이가 되려느냐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쓸데없는 것을 배워 취업이나 하겠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호의적이라면 대단히 어려운 것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 막상 철학과에 입학하고 보니 철학과 안에서도 그리 대우가 좋지 못했다. 우선은 동양철학을 배운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멸시를 당했다. 비록 철학과라 하지만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전공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철학과는 철학교수가 되려는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전업으로 학문을 매진할 연구자, 더 구체적으로는 대학의 철학과를 생업을 삼을 사람만을 원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철학을 공부했지만 짧은 경험은 '관념적'이라는 평가가 얼마나 적합한 말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하다. 지혜란 꽤 낯설고 까다로운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철학과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만큼, 철학과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다시피 한다. 게다가 지혜란 동서를 가로지르는 차이를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상아탑 바깥으로 벗어날 줄 모르기도 한다. 그러니 지혜, 보편적인 '앎'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기만적인가. 


하여 철학자, 철학하는 사람,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에 대해 좀 못마땅한 시선을 갖는 것도 나름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시야가 좁고, 도량도 작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살아가기 쉽다. 개념과 관념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삶을 소진하겠지. 철학한다는 사람치고 지혜롭다는 사람을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다. 지혜는 물론, 삶의 덕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더라. 그런데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철학자에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5권에서 보았듯 철학자야말로 실재하는 것, 영원한 것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의견, 그때그때 다르게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된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구불변하는 것을 포착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럴 능력이 없어서 변화무쌍한 잡다한 것들 속을 헤매는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둘 중 어느 쪽이 국가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까?"(484b)


그는 5권에서 지혜를 꿈에서 깨어남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6권에서는 실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을 장님에 비유한다.(484d) 장님이 어찌 나라를 이끌 수 있겠는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선한지를 볼 수 없는데 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국가>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 방대한 대화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빼어난 말솜씨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철학자에게 나라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에 반론을 펼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철학자에게 나라를 맡겨야 하며, 그토록 좋은 덕목을 지닌 이를 비난할 수 없다는 말에 아데이만토스가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요. ...(중략)... 자기는 말로써는 질문받은 것 하나하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실제로 보면 철학에 전념했다가 젊은이로서 교양을 쌓은 뒤에도 손을 떼지 않고 계속 철학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대게 완전한 악당은 아니더라도 비뚤어진 인간들이 되더라고, 또한 그중 가장 우수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도 선생님께서 찬양하시는 그 일 때문에 나라에 쓸모없는 인간들이 되더라고 말이예요."(478b-d)


소크라테스 당대에도 철학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일일이 소크라테스의 말에 반론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왜 철학한다는 인간은 비뚤어진 인간이 되는 걸까? 나라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걸까? 그런데도 철학자를 찬양하다니 불편함을 감추기 힘들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좀 아닌데 하는 식의 생각이 든다는 말. 


소크라테스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철학하는 사람들은 비뚤어진 인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한다. 철학자에 대한 그런 평가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우선은 '푸대접'(488a) 때문이라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라를 배에 비유한다. 배가 하나의 나라라면 누가 배를 몰아야 하겠는가? 당연히 항해술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배는 무질서한 사람들로 가득 찬 배여서 진정한 키잡이가 배를 몬 적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진정한 키잡이, 즉 철학자들을 얏보았다. 따라서 아데이만토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평가는 당연한 일이다. "만약 철학자들이 존경받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일"(489b)이다. 



2. 유튜브 철학자는 가능할까? 


배의 비유를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키잡이, 진정한 지도자, 진정 지혜로운 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음을, 아니 어쩌면 단 한사람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름답고 고귀한 것은 그렇게 드물다. 소크라테스는 도무지 다수, 대중에게서는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철학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들조차 대중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당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해주게. 또한 이들 우수한 사람들이 무용지물이 된 책임을 이들 우수한 사람들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이들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라고 하게나. 키잡이가 선원들에게 자신의 지배를 받아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현자가 부자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사리에 어긋나기 때문일세. …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이 나면 의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배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도리이기 때문일세. 진실로 유능한 치자라면 피치자들에게 자기의 지배를 받아달라고 간청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489b-c)


그렇다. 아데이만토스의 반론은 틀리지 않았다. 철학자는 비뚤어진 사람이라며,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손가락질받는다. 그것이 철학자의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나 철학자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철학자는 철학자인 까닭에 멸시를 당한다. 철학자가 대중에게 환영받는다면 그를 철학자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귀한 것은 어째서 소수일까?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 어려운 일일까? 사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상세히 논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자의 성품은 매우 드물고 보기 힘들다는 게 그의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다. 아마도 이는 신의 단일성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신은 오직 하나라는 생각, 그 자체 - 이데아 역시 하나라는 생각은 다수에 대한 경계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지식, 지혜는 하나일 수밖에 없으나 의견은 여럿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는 지혜를 가지나 대중은 의견을 가질 뿐이다.(493a)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다수가 소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철학자를 멸시하는 현실이 그래도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쉬이 말하면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다만 이는 결코 쉽지 않다. 후대의 용어를 빌리면 이 사이의 심연은 오직 계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계몽의 세례를 받아 대중이 제대로 깨치기만 한다면 철학자를 그렇게 핍박하고 멸시하지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대중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기다릴 뿐이다. 그날이 오기를. 그들이 무지를 깨닫기를.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자. 소크라테스는 대중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철학은 늘 불가능으로만 존재한다.


"다수의 아름다운 것에 대립되는 아름다운 것 자체의 존재를, 또는 다수의 개별적인 것에 대립되는 개별적인 것 자체의 존재를 대중이 받아들이거나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그런 일은 아마 결코 없을 거예요. / 그렇다면 대중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네. ... 그렇다면 철학하는 사람들이 대중에게 비난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 또한 철학 하는 사람들이 대중과 사귀면서 대중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저 개인교사들에게 비난받는 것도 당연한 일일세."(494a)


여기서 말하는 개인교사들이란 당시 그리스에서 활동하던 소피스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에게 유용한 지식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왜? 신은 단일하며, 그 자체 이데아 역시 단일하니, 그에 대한 지식은 물론 철학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길거리에 쉬이 보이는 소피스트를 어찌 철학자라 할 수 있을까. 다수와 소수의 대립은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관통하고 있다. 


이것이 이론적인 이유라면 현실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철학도 그것만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선 철학의 성품은 매우 드물지만 그것이 타락하는 방법은 수 없이 많다.(495b) 게다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그의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제 각기 적성에 맞는 한 가지 일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철학은 철학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고귀한 일이다. 어찌 제화공이나 농부가 철학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전문 기술에만 전문가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전문 기술을 버리고 철학에 뛰어든다는 자들을 좋지 않게 본다. 이들은 진정으로 철학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의 명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다.(495d) 


하여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할 수 있는 품성을 지니지 못했음에도 철학의 명망을 얻고자 기웃거리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방금 감옥에서 풀려나와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신랑처럼 차려입고는, 주인 딸이 고아가 된 것을 기회로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돈 많은 작은 몸집의 대머리 땜장이"(495e)와 비슷하다고.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소크라테스에게 날아올 것이다. 철학할 수 있는 품성을 따로 타고나는 것이냐고. 다행히 그는 어떤 고귀한 혈통이 따로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기술을 얻기 힘들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정말로 철학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면 다른 기술을 경멸하고 그 기술을 버리고(496b) 철학만을 추구해야 한다. 여가 시간을 제외하고는 철학 이외의 다른 일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498b) 그러나 당대에도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가가 날 때 틈틈이 철학을 하는 사람.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그렇게 만만한 태도로 철학을 대해서는 안 된다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이란 전적으로 철학만을 과업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 쉬이 말한다면 철학 전공이 아닌 자는 떠나라는 말씀. 또한 철학이 전공의 울타리를 넘어 다른 것과 만나는 일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으리라. 무슨무슨 철학이라는 것이 도무지 가당키나 한 일일까? 


오늘날 유튜브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과거처럼 온라인의 세계가 따로 있고 오프라인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식의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한 일이다. 가상은 더 이상 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 세계의 연장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혹은 현 세계와 독립적인 법칙과 문법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성공한 유튜버 가운데 '대도서관'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누군가에게 유튜브는 이 세계만큼 큰, 혹은 이세계보다 더 큰 지식의 공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는 유튜브란 선동과 거짓의 온상이라 말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온통 오염된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유튜브에 몰두할수록 세계를 이해하기는커녕 특정한 방향으로 오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난다. 억견, 혹은 그릇된 의견만을 갖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보면 유튜브는 철학의 도구도 철학의 장소도 되지 못할 것이다. 대도서관이라는 말은 지식의 타락을, 의견이 지혜로 둔갑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에 불과할 것이다. 대중에게 철학이 불가능하듯 대중매체에서, 이름 없는 다수가 교차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철학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마구 복제가 가능한 그 공간은 철학자와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일 테다. 소크라테스가 보았다면 최악의 정체를 보여주는 예 가운데 하나로 유튜브를 추가해야 하지 않았을까? 



3. 보지 말 것, 상상 금지!


사물과 이데아의 구분. 사물은 볼 수 있으나 이데아는 볼 수 없다. 이데아는 지성으로만 알 수 있는 대상이다. 사물이 감각을 통해 파악된다면 이데아는 감각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지각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물과 시각에 빛을 추가한다. 


"눈에는 시각이 있어서 눈을 가진 자가 시각을 사용하려 해도, 또한 가시적인 사물들에는 색깔이 있다 해도, 본래부터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제3자가 개입하지 않는 한 시각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색깔은 보이지 않을 걸세." / "그게 뭔가요?" / "그건 자네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네." (507e)


후대 철학의 용어를 빌리면 주체와 대상뿐만 아니라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빛, 즉 태양의 비유로 이를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눈이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이 태양을 닮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눈이 가진 능력은 넘쳐흐르는 태양에서 눈으로 흘러든 것'(508b)이다. 여기서 빛과 태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복잡한 문제를 낳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게다가 이 태양을 '선의 자식'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인식 능력을 부여하는, 혹은 인식을 낳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 된다. 모든 좋은 것은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신, 존재뿐만 아니라 인식의 원인이 되는 신을 상상하게 된다. 더구나 소크라테스는 이 빛과 시각, 태양과 눈의 관계가 선의 이데아와 지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은 태양을 자기를 닮은 것으로 낳았네. 그래서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에 대해 맺는 관계는, 선이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세계에서 지성과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다네."(508c)


소크라테스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것이 있다 말한다. 바로 영원! 철학자가 위대한 이유는 이 영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영원한 것이 다른 것을 생성하거나 소멸시키는 원인이라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실재를 '훨씬 초월한다'(509b) 말한다. 이 초월의 간극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생성하며 소멸하는 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아예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는가? 글라우콘의 말, '참 대단한 초월'(509c)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개별의 다수 사물과 사물 자체, 그 이데아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각각의 대상을 아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바로 상상과 신념 그리고 사고와 지성이다. 상상은 모상, 즉 사물의 그림자와 같은 영상을 보는 것과 같다. 보기는 하나 그 구체적인 사물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상상은 상상일 뿐. 신념은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그것을 아는 것이기는 하되, 참된 지식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앎은 사고와 지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고는 마치 기하학과 같이 시각의 힘을 빌려, 하나의 가설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앎은 이런 것의 도움 없이도 바로 가능하다. 지성, 이데 자체를 아는 능력이 따로 있다. 이를 직관이라 해야 할까? 


철학자가 수학자보다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학의 사고는 지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문학이나 다양한 상상이 끼어들겠는가? 사물을 묘사하는 예술도 마찬가지. 이렇게 철학은 모든 앎 가운데 최고의 차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감각적 대상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이데아 자체에 의해 이데아로 내려와 이데아로 끝맺는 것'(511c)  소크라테스는 여기에도 하강과 상승이 있다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물 개별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며, 당연히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내려 올리도 만무하다. 그렇게 철학자는 왕을, 구중궁궐 깊숙이 앉아 고독한 옥좌에 오른 왕과 닮아있다. 


왕이 왜 철학자가 되어야 하나?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를 붙일 수 있다. <국가>의 말을 빌리면, 바로 정의를 위해서라고 단박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쉬이 답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국가>를 찬찬히 뜯어보면 철학자에게 허락된 자리는 왕의 옥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안타까운 사실은 왕은 왕이되 왕좌를 잃은 모습으로 쉬이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푸대접과 멸시, 타락과 오염의 구덩이에서 이 왕을 건져내고 있다. 진정한 철학자라면, 왕의 옥좌 이외에 어디에 대체 그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매주 화요일 '우리실험자들' 세미나에서 나누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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