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읽기 7
* 인용문 번역은 <천병희 역, 숲>을 참고했습니다.
"우리는 전처럼 첫째 부분은 지식, 둘째 부분은 사고, 셋째 부분은 신념, 넷째 부분은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세. 그리고 나중 두 가지를 합쳐 의견이라 부르고, 처음 두 가지를 합쳐 지성이라 부르기로 하세. 의견은 생성에 관련되고, 지성은 실재에 관련되네. 또한 지성이 의견에 대해 맺는 관계는 실재가 생성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으며, 지식이 신념에 대해 맺는 관계나 사고가 상상에 대해 맺는 관계는 지성이 의견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네." (534a)
플라톤의 <국가>는 세계를 둘로 나눈다, 생성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 이를 잘 익혀두면 <국가>를 읽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꿈과 깨어남, 어둠과 밝음, 동굴과 대지, 하강과 상승... 그리고 지성과 의견. 6권에서 플라톤은 앎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상상, 신념, 사고, 지식. 이 구분은 생성과 실재의 구분과 동일하다. 끊임없이 바뀌는 세계와 변화가 없는 세계.
소크라테스는 근본적으로 이 두 세계가 완벽하게 다르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문제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바뀌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매여 있다는 사실이다. 철학자는 이러한 생성의 세계를 벗어나 실재의 세계로 도약하는 사람이다. '도약'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성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빛과 어둠 그 사이가 없듯.
소크라테스는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철학자를 설명한다. 그는 지하의 동굴에서, 사슬을 끊고 지상에 올라와 세계를 관찰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비유를 통해 어리석음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어리석음이란 제대로 못 본다는 것인데, 하나는 어둠에 있던 사람이 밝은 세계를 맞닥뜨려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 또 하나는 밝음 속에 있던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한다.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밖에 볼 수 없네.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 그 담은 인형극 연출자들이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들 앞에다 세우는 무대와도 비슷하네."(514a)
이 동굴은 분명 자연적인 동굴이 아니다. 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뻥 뚫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래로 곧게. 따라서 이 동굴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 태양으로부터 내리쬐는 햇볕을 그대로 받는 지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아주 캄캄한 동굴은 아니다. 다만 흐릿한 빗과 그림자들이 어른거리는 곳이다.
이 동굴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신체가 묶여 있다.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동굴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제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시선은 오로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동굴 속으로. 그는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만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신체가 묶인 존재로 살아간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실제로 천병희는 이들을 수감자라 표현하며, 이들이 놓인 곳을 감옥이라 표현했다.
이들은 이 동굴, 감옥에 갇힌 까닭에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실재인줄 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빌리면 이렇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그림자들이 실재라고 믿지 않을까?"(385b) 앞에서 의견과 지성의 구분을 기억하자. 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통해 우리는 기껏해야 신념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실재와 무관하게 그럴 것이라는 단정 혹은 단편적인 판단.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세계를 둘로 나눈다. 이를 극장의 안과 밖으로 비유해볼 수 있다. 극장 안에서는 밖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상관이 없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삶이 있다면 어떨까? 극장에서 태어나 극장의 스크린만 보았다면? 그렇다면 그는 눈으로 보는 저 길고 긴 영화가 세계의 전부인양 생각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는 사슬에서 풀려난 사람이다.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며 불빛을 쳐다보'(515d)는 사람. 앞서 감옥과 수감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그는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선 빛에 눈이 익숙해져야 한다. 눈부심이 지나가면 낯선 것들을 보게 될 텐데 이것을 보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자로 보던 것보다는 더 화려하며, 생동감이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그가 보던 것이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재는 따로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필요한 단계가 있다. 사슬에 묶인 바람에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한 다리를 끌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와야 한다. 그것도 오르막길을 올라.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노력'(517c)이란 바로 이 상승의 과정을 말한 것이리라. 단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높이 고개를 들어야 한다. 위로 더 높이!!
"… 위쪽에 있는 사물들을 보려면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그는 역시 처음에는 그림자를 가장 쉽게 볼 수 있을 것이고, 다음에는 물에 비친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의 영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실물 자체를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다음으로 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보게 될 텐데, 그에게는 밤에 별빛이나 달빛을 보는 것이 낮에 해나 햇빛을 보는 것보다 더 수월할 것이네. … 마지막에는 태양을 보게 될 텐데, 물이나 그밖에 태양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비친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태양 자체를 직접 보며 관찰하게 될 것이네. … 그다음 그는 벌써 계절과 해(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태양이며, 또한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의 동료 수감자들이 동굴 안에서 보아온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네."(516a)
소크라테스는 이 동굴의 비유를 이용하여 더 높이 보는 과정을 상세히 말하고 있다. 그림자, 그다음은 물에 비친 것과 같은 영상, 마지막으로 사물 자체를 보기까지. 더 나아가 시선은 지상의 사물들, 그 위를 향한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별과 달 그리고 태양까지. 시선은 환하게 빛나는 태양에 이른다. 그가 말한 선의 이데아는 그렇게 홀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 태양을 바라보는 자, 선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비유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인간은 눈으로 태양을 직접 볼 수 없다. 태양을 직접 본다 하더라도 그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저 눈부심만 느낄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눈부심이 사라질까? 눈은 언제 태양에 익숙해질까? 그러나 인간의 눈은 연약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문제는 이렇다. 맨 눈으로 태양을 보면 눈이 멀 수 있다는 점. 눈부심에 그치지 않고 시력이 손상되는 결과에 까지 이를 수 있다. 태양 자체를 보면 사물을 제대로 불 수 없게 된다는 말씀.
따라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태양처럼 빛나는 선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본디 우리에게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건 아닐까? 맨눈으로 태양을 볼 수 없듯. 혹은 그 선의 이데아가 우리의 인식을 압도해 버린다면? 태양이 눈을 멀게 만들 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태양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영영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는 빛을 걸러내는 방법이 있다. 요즘이야 특수 안경이 있지만 예전에는 맥주병을 이용해 태양을 관찰하곤 했다. 일종의 장벽을 설치하기. 또 하나는 태양의 형상을 비춰 간접적으로 보는 방식이 있다. 일식 관측 때 쓰는 방식 가운데 하나인데, 종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 태양의 상을 맺히게 할 수 있다. 좁은 구멍을 통과한 태양빛은 스크린에 태양의 모습을 비춰준다.
결국 태양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관찰할 수 있다. 태양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스크린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태양을 관찰할 수 있다. 적당히 태양빛을 걸러내는 것이든, 아니면 태양의 모습을 맺히는 것이든. 실제로 눈의 각막과 망막은 이 둘의 기능을 한다. 각막은 빛을 매개하며, 각막을 통해 투과된 빛으로 망막에 상이 맺힌다. 이처럼 눈이란 하나의 작은 극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극장으로만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동굴의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뭘 그리 시시콜콜 따질 것이 있을까.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은 접어두자. 소크라테스가 어찌 위와 같은 내용을 알았겠는가. 그러니 다시 동굴로 들어가자. 소크라테스 역시 동굴로의 회귀를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동굴에서 탈출한 철학자에게 허용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지상에 머무는 것이다. 동굴에서 벗어나 실재의 세계에 노닐더라도 그는 다시 저 낮고 어두운 생성의 공간으로,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보게, 자네는 우리 법의 관심사가 국가 안의 특정 계급의 특별한 행복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행복이라는 것을 또 잊고 있었구먼."(519e)
그래, 우리는 국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전제일 뿐 어째서 힘겹게 상승한 이가 다시 하강해야 하는지, 그 동굴 속으로 굴러 떨어져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영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적인 관조의 경지'이며 다른 하나는 '비참한 인생살이'(517d)이다. 누가 신적인 세계를 버리고 비참한 인생살이로 떨어지고 싶겠는가.
이런 질문이 드는 것은 비유가 비유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통해 우리는 어느새 소크라테스가 말한 구도 속에서 생각하곤 한다. 어째서 앎이란 상승하는 것이며 무지란 하강하는 것일까? 앎이 천상의 세계로 날아오르고, 무지가 저 지하의 세계로 처박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지식이란 불가능하며, 허공으로 허공으로 두둥실 떠다니는 무지는 불가능할까?
그는 상승과 하강의 구도를 통해 지상을 좋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지상이, 빛의 세계가, 지혜가 더 좋다는 것을. 어째서 자연스레 행복을 가져다주고 무지는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위를 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납덩이, 즉 이 가벼운 혼을 붙들어 놓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쾌락과 욕구가 문제다. 교육이란 이것을 일찌감치 잘라내는 것이다.
"생성과 동족관계에 있는 납덩이를, 즉 탐식이나 탐식과 관련된 쾌락이나 욕구 탓에 그 혼에 들러붙어 혼의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는 납덩이를"(519b) 잘라내는 것이 교육이다. 물론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생성의 세계에서 실재의 세계로 전향시켜야 한다'(518d)고 말하는 가하면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 선을 보도록 강제'(519d)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납덩이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실재의 세계로 나아가가도록 몸을 돌려야 하며(전향), 가파른 동굴을 거슬러 올라가도록(노력) 강제해야 한다.
이처럼 참된 앎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선이, 사물 자체가, 이데아가 행복을 가져다줄 만큼 좋고 아름다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보다는 실물의 세계가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림자극의 매력을 채 알지 못하고 말았다. 어울 거리는 그림자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 스스로 극장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다. 모상들은 사람의 시선을 빼앗으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야기는, 과장과 거짓이 뒤섞인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제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를 낳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생성의 세계란, 소멸해야만 하는 필멸의 세계에 그치지 않는다. 생성과 생성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생성의 고리들로 이어지는 멈추지 않는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극장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자들이,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 노니는 공간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 그 거대한 기만의 극장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은 손발이, 고개마저도 쇠사슬에 묶여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동굴에 사람들을 묶어 놓은 것이 누구인지를 결코 묻지 않았다. 어째서 그들은 빛을 등진 채 그렇게 그늘진 곳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걸까? 수감자로 그들을 그 무지의 감옥에 가둔 것은 누구란 말인가?
기억하자. 소크라테스가 이 비유를 내놓은 근본적인 이유를. 그는 '국가의 건설자'(519c)로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한 동굴이란, 앎과 무지를 형상화한 공간인 동시에 하나의 작은 국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국가는 사람들을 묶어놓고 하나의 가치를, 편향된 시선을, 강요한다. 국가야 말로 이 거대한 극장에 사람들을 묶어놓은 장본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건설자'를 자처했으나 국가의 기만과 폭력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국가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교육되어야 할 내용 가운데 가장 최상의 것, 문답법이 '법률을 마구 무시'(537e)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이 상상, 신념, 사고가 아닌 지성의 방법이라 말한다. 문답법이야 말로 철학과 가장 가까운, 아니 철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길고 긴 대화는 바로 이 문답법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 문답법은 위험하기도 한데,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큰 악이 얽혀'(537e) 있기도 한데, 그것은 법률을 마구 무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어떤 신념들을 갖고 있어, 언제나 이것들에 복종하고 이것들을 존중하며 마치 부모에게 양육되듯 이것들 속에서 양육되었네."(538c) 법률이란 어릴 때부터 가진 신념을 말한다. 신념인 이상 지성의 탐구방법, 문답법을 통해 부정되어질 수밖에 없다. 문답법이란 그렇게 법률을 깨뜨리는, 커다란 악행의 방법이다.
주어진 윤리과 상식, 규범의 근거를 묻고 나아가 그것의 균열을 발견하며 깨뜨리기도 하는 것. 문답법이 힘이 있다면, 철학이 힘이 세다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유를 제한하는, 몸을 묶은 사슬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그러나 다시 드는 질문. 사슬에서 풀려난 이들이, 자유로운 정신이 태양을 향해 걸어 나갈 필요가 있을까. 누구는 컴컴한 대지 위에 제 몸을 놀려 춤을 출 것이며, 누구는 뻣뻣한 고개를 뉘어 잠이 들 수도 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들을 비웃을 것이다. "돼지처럼 쾌적한 기분으로 무지의 진창 곳에서 뒹둔다"(535e)며. 소크라테스는 또한 진정한 철학자는 또한 권력을 하시下視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는 무지의 진창에도, 권력의 다툼에서도 빗겨나 있다. 오직 하늘을, 태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테다.
반면 권력을 하시下視한 또 다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너저분한 진흙탕 속에 뒹굴며 멋대로 살래. 국가에 묶여 살며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보다 내 멋대로 살련다.(我寧游戲污瀆之中自快,無為有國者所羈,終身不仕,以快吾志焉。)" 아마도 그는 국가의 본질적인 속성이 차꼬를 채우는 것(羈)이라 여겼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