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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13. 2019

철학과 시는 사이가 나빠

<플라톤의 국가> 읽기 10

1. 창조, 제작, 모방


좀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뻔한 정의 말고. 철학이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지? 감정? 욕망? 악덕? 소크라테스의 논의 가운데 여러 가지를 골라낼 수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모방'을 빠뜨릴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국가> 전체 내용을 매듭짓는 10권에서 다시 시인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내놓는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이상 국가에 시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설사 그가 호메로스와 같은 이름난 시인이라 하더라도. 어떤 인간도 진리보다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되므로.(596c)


시인에 대한 철저한 배척은 '진리의 첨탑'을 자처하는 교회에서도 쉬이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문학 자체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이는 대중문화, 더 넓게는 예술로 주제를 넓혀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시는, 문학은, 예술은, 그리고 대중음악은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오로지 진리만을 바라볼 것. 여기에는 창조와 제작, 모방이라는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침대를 예로 든다. 침대를 만드는 자, 목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침대를 만드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바로 침대 자체, 침대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9권의 표현을 빌리면 저 하늘 어딘가, 천상에 본보기로 있는 침대의 이데아 덕택에 목수는 침대를 제작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만드는 침대가 제각기 침대의 이데아를 다르게 실현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침대를 만들지만, 각기 다른 침대를 모두 침대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침대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소크라테스는 비헬라인, 저 동방 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침대라는 관념조차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그저 바닥에 몸을 뉘일 뿐이다. 그는 어쩌면 딱딱한 바닥에 잠을 청하는 이들을 보고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추운 겨울이 되면 뜨근한 바닥에 몸을 뉘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니 비록 침대의 이데아는 없지만 구들장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자. 침대의 이데아와 구들장의 이데아, 더 넓게는 잠자리의 이데아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국가>에서 내내 이데아는 하나라고 말한다. 다만 그 하나의 이데아가 사물의 수만큼 존재하는지, 아니면 몇 가지 이데아가 있어 각기 사물을 포괄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말의 이데아와 당나귀의 이데아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오늘 우리에게는 흥미로운 질문거리겠지만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사물 그 자체, 이데아는 곧 신에게 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침대, 아니 구들장은 물론 모든 잠자리의 창조라를 '신'이라 일컫는다. 이제 앞서 언급되었던 신에 대한 중요한 정의,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좋은 것들의 원인이고 나쁜 것들의 원인은 아니다'(379b)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된다. '신은 침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587d)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양쪽 문장에서 사용된 '모든 것'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앞의 주장이 신에게서 악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면, 뒤의 주장은 신으로부터 모든 사물의 이데아가 나온다는 뜻이다. 


'창조자'라는 표현이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만 기독교의 창조주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근원으로서 신을 이야기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데아가 나오지만, 그는 어떤 행위를 수행하여 만물을 직접 빚어내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신은 움직이지 않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는 영원불멸하는 존재이며, 털끝만큼도 달라지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도 꿈쩍하지 않듯이. 


모든 개별 사물은 제작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데아를 따라 목수가 침대를 만들었듯. 그런데 여기 기이한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소크라테스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적성에 따라 한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런데도 이 사람은 침대뿐만 아니라 구두, 옷, 음식, 나아가 여러 자연물도 척척 만들어낸다.


어떻게? 소크라테스는 거울을 들고 사방을 돌아다니면 된다고 말한다. 바로 모방자를 말한다. 화가는 대표적인 모방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다. 모든 것을 낳는 사람. 어쩌면 신과 가장 가까울 것처럼 보이는 그를 소크라테스는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재가 아닌 가상을 모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방자는 '실재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것'(597a)을 만들어낸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이는 모방물이 실재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제작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침대도 실재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제작물과 실재, 진리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화가의 그림은? 진리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실재에서 3단계나 떨어져 있다'(597e)고 말할 수 있다. 3단계! 왕도정치로부터 민주정의 거리를 가늠하던 표현을 기억하자. 3단계의 3단계!! 이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이 점은 비극작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그도 모방자라면 말일세. 그는 본성상 왕과 진리에서 3단계 떨어져 있으니까. 이 점은 다른 모방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일세."(597e)


따라서 모방은 진리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 더구나 모방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지 않는다. 실재를 모방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모방이란 실재의 사물을 제작한 결과물, 하나의 구체적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소크라테스가 이를 '영상'(589b)이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그림자와도 같다. 저기 천상의 세계에 이데아가 있다면 이 땅에는 개별 사물이 있다. 이 개별 사물에 달라붙어 있는 그림자, 일시적인 영상을 보고 넋이 나간 이들. 소크라테스는 결코 이들을 자신의 이상 국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2.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모방의 문제는 모방물이 이데아와 아무런 직접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점이다. 비록 이데아와 사물(제작물)의 관계가 사물(제작물)과 모방물의 관계와 비슷하지만 그뿐이다. 그러니 모방은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방해할 수밖에. 따라서 이 모방이란 무엇인가의 형상을 본떴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는 '진리와 무관하게 닮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들었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첫째, 모방은 결코 무엇인가를 낳을 수 없다. 모방은 수 없이 다양한 영상을 내놓을 테지만 모두 허깨비 같은 것에 불과하다. 모방에는 생성의 능력이 없다. 둘째, 모방은 결코 창조가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세계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행여 새로운 것이 있다면 뭔가 악한 것, 이 완벽한 세계를 망가뜨리는 예측치 못한 악덕일 것이다. 모방은 말 그대로 제작물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창조자, 신과는 더더욱 무관한 것이 바로 모방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좇아가면 모방은 결코 긍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논리적 체계에서만 모방을 비판하지 않는다. 모방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보이는 대로 사물을 본뜰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마치 호메로스의 시가 전쟁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시인들은 전쟁을 노래하지만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마치 침대를 그리는 화가가 침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리듯이.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기술이 있다 말한다. 사용하는 기술, 제작하는 기술, 모방하는 기술.(601d) 사용하는 기술이 사물 자체의 미덕과 관계가 있다. 쓰임에 따라 사물은 그 미덕을 발휘한다. 사물에 대한 바른 지식도 마찬가지. 사용하는 사람이 사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 제작자는 비록 그 사용의 기술을 잘 알지 못하지만 사용의 기술에 맞게 사물을 만드는 사람이다. 모방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모방자들이 보이는 대로 사물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방자는 사람들에게 좋아 보이게끔 사물을 모방한다. 대중의 기호에 맞게. 그래서 모방은 종종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을 추동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모방을 다음과 같이 혹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모방술은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들을 낳네."(603b)


이렇게 모방은 진리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악덕을 낳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혼에 나쁜 정체를 만든다'(605c)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방이란 진리에 비해 저급할 뿐 아니라, 악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니 이상국가에서 시인들과 화가를 내쫓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서구 역사에서 '작가'의 출현이 혁명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이 철학의 시녀도 되지 못하는 시대에 스스로 창조적 행위를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태어난 작품은 세계에 균열을 내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 정확히는 모방자가 창조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 이제 신은 필요하지 않다. 그 역시 하나의 모조품의 자리로 굴러떨어져내렸으므로.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만들어놓은 진리의 사다리를 걷어차버린다면 낡은 말은 새로운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방은 그저 모방을 낳을 뿐이라고. 태초에 모방이 있었다. 아니, 어쩌다 보니 모두 모방일 뿐이다.



3. 좋은 선택을 위하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삶이 미덕을 쌓는 것이며 무지한 삶이 악덕을 쌓는 것이라 말한다. 당연히 지혜로운 삶은 행복을, 무지한 삶은 불행을 안겨준다. 현재의 삶에도 또한 사후에도. 소크라테스는 혼의 불멸을 이야기하며 이 혼이 아주 길고 긴 윤회의 과정을 거친다 말한다. 에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죽어서 사후 세계를 경험하는데, 그가 도착한 불가사의한 공간에는 하늘과 땅으로 각각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길, 왼쪽으로는 땅 아래로 내려가는 길. 살아서 미덕을 쌓은 이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악덕을 지은 이들은 땅 아래로 끌려 내려간다.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겠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땅 아래에서 살아서 지은 악덕을 10배로 고통당한다는 이야기. 다행인 것은 영원한 고통은 없다. 악덕의 죗값을 치르고 나면 땅 아래에서 이 불가사의한 곳으로 다시 올라올 수 있다. 오른쪽 길을 통해서. 하늘에서도 왼쪽 길을 통해 불가사의한 곳으로 내려온다. 


땅 아래서 올라온 자들이 그 길을 따라 그대로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없다. 그들은 불가사의한 곳에서 제비뽑기를 한다. 무엇을 위한? 바로 다음 생을 선택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그 순서대로 이후의 삶을 선택한다. 순서가 늦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뽑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는가 하면 천상의 즐거움에 취해 악한 삶을 선택하기도 하고, 지하의 고통애 단련되어 선한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삶이 서로 뒤섞인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지혜로운 자, 철학의 세례를 받은 자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그는 살아서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면 죽어서도 천상의 삶을 누릴 것이오, 다음 생애에서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하나 더 중요한 것. 이들이 각기 다음 생을 선택한 뒤에 망각의 들판에 흐르는 '무념의 강'에 이르러 강물을 마시는데, 지혜로운 자는 적당히 마신다. 이 강물은 이전의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만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설사 그가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천상에서 보았던 그 본보기를 완벽하게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비밀 하나가 풀린다. 동굴에 갇힌 수많은 사람 가운데 어째서 철학자 홀로 동굴 밖의 세계로 나갈 생각을 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무념의 강물'을 덜 마셨기 때문이다. 지혜는 망각되지 않는다. 설사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러니 지혜로운 자는 쉬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잊고 있었던 저 천상의 본보기를, 망각의 들판과 강을 가로지르기 그 이전의 사건을!


그러나 모든 것을 망각해버려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남는 것은 믿음뿐이다. 그러니 믿는 자는 구제를 받을 것이고...


"그리하여 글라우콘, 이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고 구제되었네. 그리고 우리가 이 이야기를 믿으면, 이 이야기는 우리를 구제해줄 걸세. 그리하여 우리는 망각의 강을 무사히 건널 것이고, 우리의 혼을 더럽히지 ㅇ낳을 것이네. 따라서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혼이 불멸하며 어떤 악도 어떤 선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끊임없이 향상의 길을 나아가며 가능한 방법을 다해 지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래야만 우리는 이승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경기의 우승자들이 상을 타가듯 우리가 나중에 정의의 상을 탈 때도, 우리 자신이나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네. 또한 이승에서도, 앞서 우리가 이야기한 천 년의 여로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걸세."(621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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