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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13. 2019

행복의 나라로

<플라톤의 국가> 읽기 9

1. 철학자는 꿈꾸지 않는다. 


"혼의 다른 부분,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통제력을 행사하는 부분이 잠들어 있는 동안, 잔뜩 먹고 마신 동물적이고 광포한 부분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갈 때 잠 속에서 깨어나는 욕구들 말일세."(571c)


당연히 소크라테스는 꿈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꿈은 하나의 상상이며 지혜가 눈을 감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군가의 말처럼 꿈이란 욕망이 실현되는 현장 아닌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꿈속에는 가능하다. 현실의 의무, 혹은 이성 등에 의해 억눌러졌던 것들이 밤이 되면 깨어나 활개치며 돌아다닌다.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특정한 욕망에 휩쓸려 통제력을 잃은 존재가 참주제적 인간이라 말한다. 참주제적 인간은 술 취한 모습에, 애욕에 빠진 모습에, 혹은 미치광이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573c)


민주제와 참주제는 무질서하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민주제에서는 여러 탐욕들이 위계없이 난삽하게 등장한다면, 참주제에서는 특정 욕망이 횡포를 저지른다. 마치 독재자처럼. 소크라테스는 애욕, 에로스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특정 욕망의 노예가 된 자, 결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욕망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준 것이 바로 참주제적 인간이다. 그 결과 참주제적 인간은 가장 사악하다. 무질서를 넘어 마구 횡포를 저지르므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언급한 다섯 정체의 순서대로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최선자정체(왕도정체), 명예지상정체, 과두제, 민주제, 참주제. 마찬가지로 인간도 크게 다섯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다섯 순서는 미덕의 순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참주제적 인간은 가장 사악하고 가장 비참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참한 삶이 있다. '참주제적 인간이면서 불행히도 운이 나빠 참주가 된 자'(578c) 그가 가장 비참하다. 비참에 비참을 더한 삶. 어째서 일까? 


참주의 권력이 가진 불안정한 속성 때문이다. 참주는 무질서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무질서 위에서 태어난 까닭에 언제든 그 자신도 무질서 속으로 집어삼켜질 수 있다. 특정 욕망이 다른 욕망들을 억누르고 횡포를 저지르지만 언제든 다른 욕망에 그 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까닭에 소크라테스는 전정한 참주란 '가장 저질스러운 아부와 예속을 감수해야 하는 노예이며, 가장 사악한 자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알랑쇠'(579e)라 말한다. 그렇게 참주의 욕구는 늘 충족될 수 없다. 


참주제에서는 참주와 시민 쌍방이 노예이다. 시민은 참주의 횡포 아래 그 어느 때보다 예속된 삶을 살지만, 참주 역시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실상 권력의 작동방식 그 자체가 아닌가? 권력이란 누군가를 예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지만, 그 구속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늘 위태롭다. 이러한 비판은 영속적이고 자연스런 권력이란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속적이고 자연스러운 지배 구조가 있다면 어떨까? 


소크라테스는 이성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마치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듯. 이는 하나의 당위이며, 위아래로 이분화된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성의 통제는 마땅한 일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종종 꿈을 통해 고삐 풀린 욕구가 횡포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꿈은 꿈일 뿐이므로. 이성은 욕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실재의 세계에 속하는 인물이며, 현실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다. 아마 꿈도 꾸지 않을 테다. 실현되지 못한 욕망이 어디 있으며 이성을 압도할 역량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그가 역동성을, 변화를 곧바로 소멸로 연결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성하더라도 그것은 곧 소멸될 것에 불과하다. 꿈처럼, 신기루처럼, 그림자처럼.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꼬박꼬박 쉬지도 않고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인간이 잠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그래서 난잡한 파티의 현장, <향연(Symposium)>에서는 애욕, 에로스eros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2. 누가 행복한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혼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 명예와 승리를 사랑하는 부분, 돈과 이익을 탐하는 부분. 마찬가지로 인간을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승리를 사랑하는 자, 이익을 탐하는 자.'(581c) 범주는 좀 다르지만 우리는 이 밖에도 둘을 더 추가할 수 있을 법하다. 이런저런 욕망에 마구 휘둘리는 자, 특정 욕망에 얽매여 노예가 된 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렇다. 이 셋 가운데 누가 가장 행복할까? 누구의 삶이 가장 아름다울까? 저마다 자기가 사랑하고 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다른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경험과 지혜와 이성(582a)을 판단기준으로 삼아 이야기해보자고 말한다. 


우선 경험. 간단히 요약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명예로부터 얻는 즐거움도 이익으로부터 얻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그렇지만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을 모른다. 돈과 이익을 탐하는 자는? 오직 그 자신의 즐거움만 알 분이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즐거움에 대한 경험이 가장 많다. 지혜로운 자의 승리! 경험으로 보아 지혜로운 자가 으뜸이다. 그다음 기준, 지혜와 이성은 말할 것도 없을 테다. 지혜로운 자의 즐거움이 가장 크며, 당연히 지혜로운 자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 


물론 이는 앞서 끊임없이 반복된 주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사물 그 자체의 실재 세계를 추구하는 자가 가장 올바른 삶을, 가장 행복한 삶을, 가장 즐거운 삶을 살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는 합리적인 것이 곧 윤리적인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영 낡은 이야기이다. 합리적인 삶이 곧 윤리적인 삶이라 할 수 없을뿐더러,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곧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셋은 각기 따로 있으며 그렇기에 현대인의 삶은 복잡하다. 


그래도 소크라테스의 논의에 귀를 기울이자.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고통이 전혀 다르다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고통의 중단이 즐거움이며 즐거움의 중단이 고통이라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보는 것.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그저 하나의 환상이자 요술에 불과하다 말한다.(584a) 왜냐하면 이러한 판단, 특히 고통의 부재를 즐거움으로 착각하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서 생겨나지 않은 즐거움'(584a)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우리는 고통의 멈춤이 순수한 즐거움이고, 즐거움의 멈춤이 고통이라고 믿지 않기로 하세."(584c)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진정한 즐거움, 고통에서 생겨나지 않은 순수한 즐거움을 모를까? 그것은 위아래로 구분된 상대적인 세계의 척도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자연계에는 절대적인 척도의 기준이 없다. 기준선을 정해놓는다 해도 임의로 정해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위아래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아래는 늘 무엇보다 아래이며, 위는 늘 무엇보다 위일 뿐이다. 고통과 즐거움도 마찬가지. 그렇게 이 둘은 종종 혼동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혼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말한다. 고통과 즐거움은 명백하게 다르다. 둘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고통이란 곧 불필요한 욕망의 결과물이다.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은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대지의 인간, 가축에 비유한다. 


"그들은 가축처럼 언제나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대지, 즉 식탁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배불리 먹고 교미한다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고 쇠로 된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서로 떠받고 서로 죽인다네. 그들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실재하는 것들로 충족시키는 것도 아닌 데다, 그들이 충족시키는 그들 자신의 부분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밑 빠진 독과 같기 때문일세."(586b)


소크라테스는 세계를 철저히 둘로 구분한다. 천상의 세계와 대지의 세계. 천상의 세계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라면 대지는 모든 것들이 변하는 세계이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즐거움이란 영원한 것을 향하는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인용한 글에서 말하는 '실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눈 앞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정반대이다. 대지위의 사물, 눈 앞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변화하는 것, 언젠가는 소멸할 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실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이데아, 사물 그 자체라는 표현을 기억하자. 소크라테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의 모상, 즉 진정한 것을 본뜬 가짜 혹은 허상,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일시적인 것이라 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 눈은 쉽게 속으니까. 실재는 따로 있다. 


9권까지 이어진, <국가> 전체를 관통하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진짜는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즐거움이란 고통과 달리 천상의 세계에 따로 있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추구하려면 또 다른 것, 이 땅에 존재하는 것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아름다운 국가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선생님께서는 방금 우리가 논의하고 건설한 가상 국가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런 국가는 지상에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 말예요." ... "하지만 그 국가는 아마 본보기로서 하늘에 비치되어 있을 것이네. 누구든지 원하면 그것을 보고, 본 것에 따라 자신 안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말일세. 그 국가가 어디엔가 존재하느냐 또는 존재할 것이냐는 문제 되지 않네. 그는 오직 그 국가의 국사에만 관여할 뿐, 다른 국가의 국사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592a~b)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국가는 아득하다. 마치 그가 말하는 이데아니 실재니, 사물 그 자체니 하는 말들이 그런 것처럼. 본보기로서 하늘에 비치되어 있는 것, 그것을 알아야 참 즐거움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믿음의 문제는 아닐까? 


글세,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질없는 질문을 쏟아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행복의 나라는 가 없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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