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Nov 27. 2020

어느 나라의 탄생

보편적인 책 읽기 <메이지 유신>

청소년들과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읽고 있다.(링크) 산업혁명과 아편전쟁으로 시작해서 현재 9권까지 발간되었는데, 태반이 중국 역사와 일본 역사다. 한국(조선)이 가장 늦게 근대화에 돌입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중국사는 익숙해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는데 일본 역사는 영 아는 게 없더라. 그나마 <바람의 검심> 따위 덕택에 유신지사니 그런 걸 조금은 아는 데다, 이곳저곳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게 있어서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메이지 유신에 대해 조금은 공부해야겠다 싶어 이 책을 골랐다.


'서양의 충격 - 개항 - 불평등 조약 - 근대국가 성립'이라는 일반적인 테크를 생각하더라도 메이지 유신은 꽤 획기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흑선 내항(1853)으로 개항을 한 이후 구체제 - 막번체제가 무너지기까지(1867) 걸린 시간은 고작 15년이 채 안 된다. 이웃나라 청이 아편전쟁(1840)을 겪고도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1949)을 생각하면 한 100년을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보낸 셈.


http://aladin.kr/p/3yRPQ


저자는 메이지 유신을 세계 속에서 아시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9쪽)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던지는 통찰은 조금 더 깊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통일국가의 틀을 갖춘 것은 독일, 이탈리아와 비슷한 시기였다.


"폐번치현은 일본이 일단 통일국가가 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독일이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제국을 형성한 1871년과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탈리아가 거의 통일을 완성한 1870년과도 그 시기가 맞물린다. 유렵의 독일•이탈리아라는 후발 근대 국가와 동아시아의 일본이 거의 같은 시점에 근대적인 통일국가가 된 점에 유의해야 한다."(113쪽)


한편 메이지 유신이 메이지 헌법체제라는 근대 국가 형태로 완성된 데는 청일전쟁의 승리, 그리고 조선침략이라는 맥락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조선 문제는 일본이 이 군국주의•대국주의로 향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귀결되는 곳에 청일전쟁이 있었습니다."(249쪽)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말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졌다면 메이지 헌법체제=근대 천왕제 국가는 확립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250쪽)


얇은 이 책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세계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아시아적 맥락에서 메이지 유신이 갖는 맥락을 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저자는 메이지 유신을 상당히 폭넓게 설정한다. 흑선 내항에서 개항, 대정봉환과 메이지 헌법 및 교육칙어 발포까지 이어진 사건을 메이지 유신으로 본다. 즉, 메이지 유신이란 1868년, 메이지 천황 이후 벌어진 신정부 수립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항이후 근대 국가수립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폭넓게 메이지 유신이라 일컫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개국의 계기가 된 1853년(패리 내항)부터 메이지 헌법체제가 성립된 1889년~1890년까지를 그 범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 국내적인 모순과 국제적인 조건이 뒤얽혀 1853년 유신변혁의 기점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 즉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한 것, 이듬해는 1890년 교육칙어를 발포함으로써 근대 국가의 법체계와 이데올로기가 정비되어 메이지 유신이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10~11쪽)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생산 원료와 판매 시장을 찾고자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중국은 인도처럼 전면적인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내내 서양 제국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세계자본주의에 포섭되는 방법, 즉 인도가 식민지화되고 중국이 반식민지화되었는데 왜 일본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입장에서 격렬한 일본 자본주의 논쟁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인도, 중국,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31쪽)


여기에 조선을 더하면 더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다. 어째서 조선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따위가 아니라 어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막 근대국가를 세운 햇병아리 제국에게 침략당하게 되었나. 그러나 이는 결코 간단히 답할 문제는 아니다. 국가마다 자본주의의 성숙도가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국가로 진입하기까지 각 나라의 경험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라님의 사정도 저마다 달랐고…


"… 나아가 중국과 일본의 외입에 대한 대응방법의 차이, 여기에서 보이는 주체적 조건의 차이, 지형적,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조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2쪽)


어쨌든 개항과 동시에 세계자본주의에 포섭되자 위에서 아래까지 폭넓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이것이 막번체제를 와해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막번체제의 붕괴는 단순히 계층적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 아니라 지역적 모순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한데, 개항이 이를 가속화했다는 분석이다.


"개항과 함께 이루어진 상품 생산과 유통의 급격한 진전이 막부말기에 서서히 싹트고 있었던 부르주아적 경제에 자극을 주어 그 영향의 확산과 함께 지역적, 계층적 간극을 벌린 것이다. 이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모순이 막번체제의 각각의 영역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각 번의 실타래를 풀어서 이들이 외압 하에서 일본의 민족적 통일을 향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신속하게 준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36쪽)


'막부는 왜 무너졌는가?(2장)'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변혁의 주체가 어떻게 등장했는가에 주목한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미 농민들 사이에서 계층 분화가 이루어졌고, 계급 사이의 모순이 이미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다. 막부 말 농민 본기가 크게 늘었다는 것은 내부 모순이 적잖이 심화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모순 가운데 한쪽에서는 존왕양이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공무합체를 주장한다. 존왕양이는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하였던 반면, 공무합체파는 천황을 상대화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절대화와 상대화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토막, 막부를 타도하자는 주장이 등장할 수 있었다.


"존왕운동을 추진한 존양파가 모든 가치를 천황에게 귀결시켜 천황을 절대화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공무합체파는 천황을 상대하고 천황의 절대화로부터 어느 정도 이탈해 있었다. … 이 절대화와 상대화의 정치 논리의 대립•교차야 말로 게이오기에 토막파를 성립시키고 토막운동을 전개시킨 요인이었다."(66쪽)


"필자는 '옥'에는 '교쿠'라고 읽는 측면과 '다마'라고 부르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교쿠는 장기에서 말하면 궁이다. 적에게 빼앗기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옥은 절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마에도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가 있으나 여기에는 책략 등의 수단을 사용한다는 정치적인 이용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쿠는 존양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강렬하게 등장한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이고, 다마는 공무합체운동의 상대화에 의해서 탄생한 정치적 이용성을 나타낸다."(67쪽)


막부 말 유신지사들은 천황을 은어로 '옥'이라 불렀다. 저자는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읽어낸다. 누구는 천황을 절대적으로 여겼는가 하면, 누구는 상대적인 대상으로 생각했다. 후대의 역사에서 천황은 신격화되지만 거꾸로 말하면 천황이 상대화되고 하나의 정치적 도구처럼 다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영국의 입헌 군주제를 생각하자. 그런데 어째서 일본의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여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 바로 '미연의 가능성'이다. 즉, 역사에 기입되지 못했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으로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한다. 이렇게 도쿠가와 막부는 막을 내리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에는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계획이 숨어 있었다.


"<의제초안>은 대군을 영국의 왕, 터키의 술탄, 러시아의 차르에 필적하도록 했다. 이 대군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말하는 것으로, 의회제를 도입하여 권력을 요시노부에게 집중시키려고 하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통치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84쪽) 


그러나 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막부는 실각하고 요시노부는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한다. 몰락한 군주였음에도 그의 말년은 꽤 유유자적했다. 천황과 쇼군 가운데 쇼군을 중심으로 한 근대 국가의 가능성은 영 불가능한 것이었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연이 역사의 중요한 변화를 낳는 것은 종종 보는 일이다. 저자는 만약이라는 가정 대신 '미연의 가능성', 즉 역사에 기입되지 못했던 또 다른 가능성에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이 '미연의 가능성'에 대해서 한 마디 더 첨부한다면 이것은 패자의 관점과도 통할 것이다. 그때의 조건에 의해 승자와 패자의 입장이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승자가 되어버리면 '이기면 허물이 없다'라는 말처럼 승자의 눈으로밖에 역사를 보지 않는다. 아니, 승자를 정당화하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개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승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패자의 입장에서 본 역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발을 밟은 쪽에서는 알 수 없는 밟힌 쪽의 아픔이 있다. 이 통증을 가진 역사는 '미연의 가능성'이라는 발상을 내포한 역사와 중첩되는 것이다." (85쪽)


저자가 '미연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은 더 멀리 있다. 막번체제 붕괴 이후 다른 정부가 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맞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근대 국가로 바뀌면서 다른 국가 모델, 군국주의적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로서의 가능성도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우리가 잘 아는 그 이토 히로부미가 맞다)와 나카에 초민을 떠올릴 수 있다. 둘 모두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구 국가를 돌아보며 향후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사절단 가운데 이토가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영국 유학을 한 경험이 있었다.


"부사 이토 히로부미는 여기에서 영어로 스피치를 했다. 바야흐로 일본은 봉건제도에서 근대 국가로 '한 개의 탄환도 쏘지 않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이행했다고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세계 어느 국가가 전쟁을 하지 않고 봉건제도를 타파할 수 있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장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히노마루'는 '라이징 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때까지 외국인들은 일장기에 대해서 하얀 각봉투를 빨간 봉랍으로 밀봉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쇄국 일본의 상징이라고 비웃고 있었다."(140쪽)


웃기지만 여기서 눈이 간 것은 이토의 활약보다는 일장기에 대한 인식이었다. 일장기의 붉은 원이 태양을 상징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다른 상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장기를 빨간 봉랍으로, 쇄국 일본의 상징으로 생각했다니. 역시 맥락 없는 상징은 없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을 시작으로 여러 서구 국가를 탐방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프러시아 즉, 독일과 같은 모델이 있었고 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영국과 같은 모델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대국론과 소국론으로 구분한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서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자유민권운동의 역량 역시 성장한다. 민권운동파가 기획했던 헌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헌법을 반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토 히로부미.


"자유민권론이 만연해서는 정권이 통일을 강화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 독일의 '부국강병'과 국민의 '안녕•행복'은 '자유민권의 씨앗'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국왕이 '남긴 법과 덕의 여운'에 의한 것이라고도 언명했다. 이것은 이토가 이 땅에서 배운 프러시아 군주 전제 체제에 대한 확신으로, 반자유민권을 강하게 표명한 것이었다. 이토에게는 자유민권 그자체가 바로 적이었던 것이다."(201쪽)


결국 일본이 선택한 것은 강한 국가, 이토가 주창한 대국주의 노선이었다. 나카에 초민이 주장한 소국주의 노선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소국주의 조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수면 아래 움직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나아가 이웃 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노선이 폐기되고 다른 노선이 선택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국주의 노선은 결국 조선의 불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서 군국주의를 강화한다. 이것은 일본이 점차 대국주의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그와 비례해서 민권운동의 소국주의는 초민 등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억압되어 수면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아니, 수면 하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214쪽)


부국강병, 강한 국가에 대한 욕망은 천황을 신격화하는 길로 이어진다. 이토는 천황 중심의 통일된 국가를 구상한다. 이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끔찍한 구호가 된 '천황폐하 만세' 따위가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토는 종교가 미약한 일본에서 그것을 대신할 '중추'를 황실=천황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토는 새로운 제도로 천황의 주변을 강화시켜 나갔다." (220쪽)


천황을 중심으로 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서 천황은 신인 동시에 군주였으며 초헌법적 존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헌법은 천황도 헌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황도 헌법의 일개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권적, 절대적인 천황이 헌법에 의해 통치하는 입헌국가'라는 모델이 등장한다.(223쪽) 이 헌법을 읽고 나카에 초민의 반응은 이랬다고 한다.


"나카에 초민이 이 헌법에 대해서 '한 번 통곡하고 단지 쓴웃음을 지을 뿐'이라고 하고, 헌법 발포 1주년에 즈음해서는 '나도 축하하고 있다. 그 시시한 헌법을'이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이야기를 초민의 제자인 고토쿠 슈스이가 전하고 있다."(222쪽)


흑선의 내항 이후 전개된 근대 국가 수립의 여정은 메이지 헌법 제정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헌법이 제정되었다고 모든 국민이 천황의 신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에 '교육칙어'가 가 제정된다. 모두가 충효라는 전통적인 유가 규범 아래에서 천황의 신민임을 학습하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고깝게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저자는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사건(239쪽)'을 소개한다.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그 혼자 경례하지 않았다. 그는 무교회주의자로 유명하며, 함석헌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교육칙어의 내용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사소한 반항도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웃 식민지 백성에게는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다. 여기에 잔혹한 수탈까지.


저자는 이 대국주의가 메이지 헌법체제로 완성되었으나 8•15 패전(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기념하는 표현이 다르다)으로 파괴되었다고 말한다.(252쪽) 이를 종합하면 메이지 유신으로 수립한 근대 국민국가의 모습이 1945년 일단락되었다는 말씀. 여기에 '미연의 가능성'으로 소국주의가 새로운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메이지 유신에 의한 대국주의가 맺은 결실은 메이지 헌법체제의 확립으로, 결국 메이지 국가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8•15의 패전으로 파괴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미연의 가능성'으로서의 소국주의는 역사의 수맥으로 지하로 스며들면서 때로는 고개를 쳐들었다가 다시 아래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패전에 의해 일본국헌법에 포함되어 비로소 체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의 최종적인 결착은 8•15이고, 대국주의는 무너졌으며 계속 지하에 있었던 소국주의는 새로운 일본국헌법의 체제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252쪽)


저자의 주장을 참고하면 이른바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핍박 역시 메이지 유신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메이지 헌법 체계가 파괴되기까지 이웃 나라의 백성은 매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아가 한국사의 유신헌법(1972년)과 국민교육헌장(1968년)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낯선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를 메이지 유신 탓이다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저자가 '미연의 가능성'을 논하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의 결과가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그리고 이어진 군부독재까지 생각하게 하나, 그것이 역사의 필연은 아니었아 말한다. 자유민권운동의 흐름이 그 아래 면면이 이어졌으며 패전 이후 일본 헌법의 초석이 되었다. 


서지 정보를 보니 원서는 2000년에 발간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메이지 유신을 평가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국주의의 노선이 새롭게 부활하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패전으로 메이지 헌법은 폐기되나. '미증유의 가능성'은 또 살아남아서 적합한 시기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비판하지는 않으련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웃, 중국과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과연 우리가 얼마나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반문하곤 한다. 오늘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소용돌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이웃나라에도 비슷하게 던져져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으나 19세기, 20세기의 문제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꽤 멀리 떨어졌다고,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별로 큰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낡은 숙제를 붙잡고 여전히 끙끙대는 건 아닐까.


그나마 작은 위로는 이웃나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 나카에 초민이 썼다는 <삼취인 경륜문답>에 호기심이 생겼다. 수유너머에서 나왔다는데, 대체 누가 작업한 걸까? 2005년 발간되었으니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하기는하다. 그래서 '나카에 초민'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나?

http://aladin.kr/p/pFHe5


* 이 책을 세미나 하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미나 할 것까지는 아니고, 함께 읽을 사람이 있다면 온라인에 이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해 볼 여지는 있다. 댓글을 남겨주시기를. 

작가의 이전글 아! 근본 없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