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어디 즈음/ 웃는 권 작가
주저하던 워크숍을 참여하러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안동교회 쪽으로 걸어간다.
가을의 청명한 파란 하늘은 안국동의 매력을 한껏 더 높여준다.
아기자기 기와도 보이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작은 상점들은 안국동만의 한적한 가을을 선사한다.
한복을 입고 기와 담장 아래 사진을 찍는 젊은 친구들,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지나가는 외국인, 그 광경을 느긋이 바라보는 동네 아저씨, 지체 높으신 분이 방문하셨나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보디가드. 어느 것 하나 이곳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살랑이는 기분 좋은 바람은 공기의 온도가 달라졌음을 알려주고, 그 바람은 맞는 사람의 감정도 한 없이 높은 하늘 어딘가로 데려간다.
가을 하늘이 높다.라는 말을 하는데 20대 이전엔 하늘을 바라 볼 여유도 시선도 없었다.
30대 이후에 들어서서 하늘은 바라보게 되었다. 좋아서, 힘들어서, 외로워서, 기뻐서, 눈이 와서, 낙엽이 떨어져서, 머리 위에 흐드러진 꽃잎이 예뻐서, 태양이 너무 쨍해서.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늘 중 뭐니 뭐니 해도 가을 하늘이 으뜸이다. 너무 아름답다. 해가 뜰 때, 해가 질 때, 낮에도 둥근달이 뜨는 밤에도.
신선한 공기와 머릿결을 스치는 상괘 한 바람이 가을 하늘을 그렇게 만든다. 마음을 그렇게 만든다. 가을을 타게 한다. 울렁증이 날 정도로.
목적지 건물 빨간 벽돌 건물에 초록 담장이가 예쁘게 올라탔다. 왠지 더 근사해 보인다.
고등학교 때도 도서관 건물이 빨간 벽돌에 담장 넝쿨이 무성해서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졸다 보면 벌레들이 극성이었다. 보기보다 낭만적이지 않은 담장 넝쿨에 대한 추억이 떠 올랐다. 하지만 오늘은 상쾌한 바람과 구름에 가는 길이 경쾌하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배움이 날 오늘 기분만큼이나 새롭게 해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경쾌한 발검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끝나고 나오는 길 다시 안국역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니 빨간 벽 위에 생명을 다 한 담쟁이 줄기가 붙어 있다. 생명력을 잃었지만 가지가 뻗어 나간 발자국이 예술이다.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 또한 가을 하늘과 맞닿으니 새로운 프레임이 나온다. 아. 오늘은 그냥 이렇게 감탄과 감명을 받는 날이구나 싶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창경궁 쪽으로 옮겨 본다. 멀리 종묘와 연결된 새로 난 길이 보인다. 팩트는 일제 강점기 때 끊긴 길이 복구가 된 것이지만, 우리에겐 새로운 시선이다.
잠시 돌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노을이 예쁘게 깔려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흡사 호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지만 행복했다.
기대하지 않고 내렸던 안국역에서 오늘 약간의 해방감과 새로움을 느낀다.
가을이 주었던 선물 같다.
누구나 바라 볼 시선과 마음의 여유만 갖고 있다면 받을 수 있는 신의 선물.
기대하지 않았던 가을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