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돌아봄 / by 명랑한김작가
음악이 켜지면 멈추었던 것들이 다시 춤을 춘다. 멈추었던 것 같던 숨도 다시 쉬기 시작한다. 아주 잠시 동안은 리듬에 맞추기 위해 숨을 고르며 맞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는 오르골에 올려진 인형처럼 안정적으로 리듬에 몸을 맡긴다.
후회하는 순간마저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지경이 되면 음악을 바꾸어야 한다. 지나친 몰입은 왜곡된 기억으로 빠지기에도 좋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겨울엔 추억이 들락거린다. 삶의 자취가 모두 추억이라면 추억이겠지만 우리가 추억이라고 일컫는 것은 잊히지 않으며 그리운 것이므로 꽤 깊은 자국일 것이다. 그래서 추억은 많이 아프거나 사랑스럽다. 그리워서 슬퍼지는 자양동 지하작업실은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장소이다. 사진 한 장 첨부해 볼까 싶어 앨범을 뒤져봤지만 작업실 풍경은 없다. 기억 속의 작업실을 그려봐야겠다.
지금보다도 더 철이 없던 그 시절 미대생이었던 나는 작업실이 갖고 싶어서 자취방을 정리했다. 잠만 자면 되는데 굳이 집이 뭐가 필요하냐는 생각에 방을 빼서 겁도 없이 건물지하 35평 홀을 계약했다. 부엌 달린 방 한 칸짜리 자취방을 빼니 지상에 있는 공간을 구할 돈은 안되고 지하 넓은 공간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100호 캔버스를 서너 개 늘어놓고 동시에 작업을 진행하는 상상을 하며 당장 화가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지금도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집과 작업실을 구분하기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일체형으로 살게 된다. 일반적인 집을 구해 살다가도 이게 아닌데 싶어 작업실 분위기로 바꾸게 된다. 물론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어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것 같지만 내가 확신을 갖으면 가족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물론 난 매번 흔들리고 어떤게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결정을 내리며 그래 이거야!를 외치고 실행에 옮긴다. 이게 나라는 걸 깨닫는데 30년 넘게 걸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귀기울이는데 집중하며 살고 있다.
자양동 작업실은 서울시 성동구 자양동 시장통에 있는 5층 빌딩이었다. 신축이어서 깨끗하고 주거밀집 지역이어서 안전했던 것 같다. 아님 내가 겁이 없었던 건지도...
집이 아니고 상가건물이어서 한 층을 내려가면 아주 큰 철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문을 열 때면 끼익 소리가 나고 닫힐땐 철컥하고 소리가 나는 큰 철문이었다. 열고 들어서자 시멘트 냄새가 매퀘하게 났고 기둥만 몇 개 있는 넓은 홀이었는데 웅장해 보였지만 훗날 그것은 무서운 난방비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선 배달 석유를 말통으로 매일 부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결국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했는데 이 지점에서 추억하나 추가가 된다. 지금은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지만 그때는 조소과 학생이었던 신작가가 합판 몇장으로 칸막이를 설치해주었는데 합판을 자르지 않고 중간문을 만들어서 열때마다 바람이 일었다. 불편함은 있었지만 친구가 만들어 준것만해도 감사해서 문을 열때마다 웃음이 났었다. 그 친구는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내 역사의 현장에 분기별로 등장한다. 실력있고 성실한 친구라서 등장해 주는것만해도 자랑스럽다. 그 친구에게 내가 그런 상대가 되어주지는 못했던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것을 안다면 흐믓해 할것이다. 3분의 1 지점을 막은 공간에 아늑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침대와 탁자, 책장과 오디오, 사진들...작은 히터 하나로 데워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칸막이를 넘어 바깥 공간에는 아빠가 구입해 주신 석고들과 이젤, 집에서 가져온 쇼파가 놓여졌다. 아빠는 딸이 작업실을 한다고 하니 화실을 생각하시고 학생들 수업을 위해 집기들을 준비해 오신거다. 딸의 작업을 위해 대형이젤도 함께 사오셨다. 지방에서부터 구입해서 트럭으로 싣고 오신 화실 집기들은 아빠가 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다.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청소도 해주시고 문제 있는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셨다. 지금의 내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양동 작업실을 떠올릴때면 자상하고 묵묵하게 이사를 도와주셨던 이모부가 생각난다. 이모부는 화나신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따뜻하고 깊은 분이시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뒤에 아빠처럼 보살펴 주셨던 이모부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이 필요할때 당연하고도 편안하게 도와주셨다. 그때는 이삿짐을 직접 날라서 이사를 했던 시절이어서 이모부의 도움은 대체불가능이었다. 며칠전에 가족모임에서 만난 이모부를 바라볼때 내 마음엔 애정이 가득했다. 표현을 다하진 못했지만.
그러고보니 나의 20살 즈음은 무척 풍요롭고 행복했구나.
자양동 작업실에서 시장통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수업을 했다. 생선가게 아들, 과일가게 아들, 분식점 딸...아이들의 그림에는 시장의 풍경이 담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한강공원으로 야외스케치를 나가고 전시회도 데리고 다녔다. 시장에서 신선한 재료로 조갯살 냉이국, 조갯살 미역국, 청국장을 끓여 친구들과 먹었다. 작업실엔 기타가 두대 있었는데 기타 연주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주 오겠다는 의지로 두고 갔다. 기타연주에 노래하는걸 좋아해서 밤이 새도록 부르기도 했다. 지하이다보니 해가 지고 뜨는것을 감지하기 어려워서 친구들이 한번 놀러오면 일주일은 기본으로 살았다. 시간은 멈춘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친구들이 놀다가 돌아갈때가 되면 큰 작업실에 혼자 남는게 무서워졌었다. 비가 오고 나면 곰팡이가 많이 생겨서 캔버스도 문제가 생겼다. 지방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지하실에서 곰팡이와의 사투였다. 지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외로워했던 20대의 내가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추억 속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