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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야구 게임

from 2020.5.25 facebook

by zzoos

야구 게임이란 게 있다. 각자 네 자리 숫자를 생각하고는 그걸 맞추는 게임인데, 번갈아 가면서 짐작한 네 자리 숫자를 부르면 스트라이크와 볼로 그 결과를 알려준다. 자리와 숫자가 다 맞은 숫자는 스트라이크, 숫자는 맞지만 자리가 틀린 숫자는 볼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한 숫자가 1234인데 상대방이 1357로 공격해 온다면 숫자와 자리가 다 맞은 1은 스트라이크, 숫자는 맞지만 자리가 다른 3은 볼이므로 원 스트라이크 원 볼로 판정을 내리는 식이다.


물론 목표는 네 자리 숫자를 모두 맞추는 홈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결과가 있다. 바로 낫띵. 그러니까 노 스트라이크 노 볼이다. 자리가 맞는 숫자도 자리만 다른 숫자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 어찌 보면 카운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지만 이건 다음 상황을 매우 좋게 만들어준다. 방금 불렀던 네 개의 숫자는 상대방의 패에 절대로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0~9의 열 개 숫자가 아니라 네 개를 제외한 여섯 개의 숫자로만 추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취향은 일상에서도 이어진다. 오늘 들렀던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제 다신 여기 안 오면 되겠네. 하나 지웠으니 됐어.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나왔는데 먹어보니 별로면, 하나 지웠으니 됐어. 저 사람의 더러운 면을 봤으면, 하나 지웠으니 됐어. 이 회사의 마음에 안 드는 면을 봤으면, 하나 지웠으니 됐어 같은 식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낫띵을 지우는 과정이 아니라 스트라이크를 찾는 과정일 텐데, 난 낫띵을 지우느라 정작 스트라이크 존이 어딘지를 잊고 있는 건 아닌가. 숫자 야구는 0~9라는 좁은 범위에서 벌어지는 게임이지만, 인생이라는 무한의 가능성에서도 낫띵이 숫자 야구에서만큼 주효할까.


어쩌면,


지금 나는 어디에 서서 어디로 던져야 하는 건지조차 모르는 투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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