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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oos Apr 09. 2020

24. 태풍이 지나간 미야자키

미야자키 신궁, 현립 미술관


호텔 창밖으로 미야자키 과학기술관이 보인다.


태풍으로 시끄러웠던 지난밤 잠을 잘 수 없어 넷플릭스로 기묘한 이야기 시즌 2를 다 보고 새벽에야 잠들 수 있었다. 엄청나게 흔들리며 소리를 내던 창문이 깨지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 건물 자체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바람이 심했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니 느지막이 일어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그쳤고 무엇보다도 바람이 잠잠했다.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조용한 풍경 안에 미야자키 과학기술관이 보였다. 저 동그란 돔 지붕은 어제 구경했던 그 플라네타리움의 지붕이겠지. 세계에서 세 번째던가? 여튼 손가락에 꼽히는 규모의 플라네타리움이라더니 정말 크기는 크구나.


어제 마음에 들었던 라멘집에 다시 한 번 방문


체크아웃 시간에 쫓기듯 밖으로 나와서 일단은 점심을 해결하러 라멘집에 들렀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야마고야(山小屋)가 마음에 들어 다시 한 번 방문. 라멘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다른 집을 검색해서 찾을 의욕이 없기도 했다. 두 번째 먹은 라멘은 여전히 괜찮았다.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국물이 너무 가벼운가?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주말에 사용할 수 있는 버스 일일권을 구매. 미야자키 신궁 구경하러 가야지.


미야자키에 왔으니 미야자키 신궁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가는 방법을 좀 찾아보니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해 보인다. 그리고 주말에만 쓸 수 있는 버스 일일권이 500엔이다. 오늘 하루 버스를 적어도 세 번 이상은 탈 것 같으니 일일권을 사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서 판매처가 있는 미야자키역으로. 마침 역 앞에는 버스 노선도 많으니 이래저래 편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건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길래 미야자키 신궁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 그건 00번 버스를 타면 되는데...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한다. 응? 무슨 일이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더니, 잠시 뒤에 지금은 괜찮으니 버스를 타도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되물어보니, 오늘 시간대에 따라 버스를 통제하는 구간이 있다고 한다. 왜 그런지 다시 물어보니 미야자키 신궁대제(宮崎神宮大祭)라는 커다란 축제(마쯔리)가 있다는 거다. 오~! 이거 럭키인 건가! 일본에서 축제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마침 오늘이 축제일이라니.


버스 정류장에도 버스 안에도 차량 통제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버스 정류장에도 버스 안에도 차량 통제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짧은 일본어 실력과 그나마 몇 글자 알고 있는 한자 실력에 더해 번역 어플의 힘으로 읽어보니, 일단 오늘 나의 이동 스케줄은 교통 통제 구간이나 시간과 큰 상관이 없다.


미야자키 신궁은 일본의 초대 천황을 모시는 곳으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곳 중의 하나다.


버스를 타고 5분? 10분? 정도 걸렸을까?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 앞에 내렸다. 어느덧 날씨는 화창해졌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그런지 공기가 깨끗하고 깔끔하다. 뭐랄까, 기분 좋은 산책이 될 것 같은 느낌.


미야자키 신궁은 그동안 가봤던 신사나 신궁과는 달랐다. 아, 참고로 신사(神社)는 일본의 일반적인 신을 모시는 곳이고 신궁(神宮)은 왕족을 모시거나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신을 모시는 곳을 말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가봤던 신사들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곳들이었다. 규모가 좀 크다고 하더라도 화려하다거나 장엄하다거나 신성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좀 있다. 아무래도 자주 들러서 일상의 소원을 빌기도 하는 곳이라 일상생활에 밀접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신궁은 많이 가보진 못했는데, 교토에 있는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을 떠올려보면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곳 미야자키 신궁은 그 느낌과도 다르다. 규모가 아주 크지만 화려하거나 압도하는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고즈넉하고 신성한 느낌이 든다. 헤이안 신궁은 왕권의 탄탄함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지어진 것이라면 이곳은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나무에 스며있는 세월의 흔적들과 차분한 규모의 건물들이 저절로 마음을 잔잔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구름이 좀 있지만 화창해진 날씨는 산책을 부추겼다.


원래의 계획은 마음 내키는 대로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는데, 미야자키 신궁대제가 있다고 하니 행렬을 언제 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잠깐 검색을 해보니 이 축제는 일본에서 가장 큰 축제 중의 하나라고 한다. 10월의 마지막 토요일과 일요일에 진행하는 축제라고 하니 우연히 축제일에 미야자키에 묵고 있는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신궁 앞에 있는 가게에 들러 축제 행렬을 언제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후 네 시 정도면 다시 신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토요일에 신궁에서 출발해 일요일에 신궁으로 돌아오는 행렬이다. 지금 시각이 한 시 반이니까 두 시간 반 동안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마침 근처에 큰 공원이 있고, 미야자키 현립미술관(宮崎県立美術館)이 있다. 구름이 좀 있긴 하지만 날씨도 화창해져서 산책하기에도 좋은 상황.


미야자키 현립미술관에서도 피카소, 에른스트, 키리코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미야자키현 종합문화공원(宮崎県総合文化公園)은 크고, 넓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적어서 한적한 것이 더 좋았는데, 어쩌면 모두 축제 행렬을 보러 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립미술관 안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몇몇 작품만 촬영이 가능했다. 특별전은 별로 관심이 없는 내용이라 상설전만 관람했는데, 피카소, 에른스트, 키리코 등등 현대 미술의 거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의 미술관에는 왜 이렇게 유명작가의 그림이 많은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보니... 혹시 80년대 버블 시절에 넘쳐나는 돈으로 미술품 경매에 참여했던 걸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볼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날씨가 훨씬 좋아졌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훨씬 좋아졌다. 이젠 태풍이 멀리 벗어난 걸까. 넓은 잔디밭과 띄엄띄엄 서 있는 큰 나무들, 파란 하늘에 살짝 떠 있는 구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이 아니라 벤치에 앉아서 이 조용한 풍경을 즐기고 싶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풍경. 오랜만에 느끼는 햇볕의 따뜻함. 여행하면서 태풍을 두 번이나 만나다 보니 이렇게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멀리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공놀이. 그 옆에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신나서 페달을 밟는 아이의 뒤로 웃음을 가득 품은 얼굴의 아버지가 보인다. 나무 그늘 아래 깔아둔 돗자리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어머니의 얼굴. 그 옆으로 어깨에 가방을 하나 멘 젊은이가 하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심한 듯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방인의 눈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한가로운 풍경은 나의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리고 오르막길이라 진땀 쏙 뺐다.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자체는 좋았는데, 시간을 확인해보니 세 시... 한 시간을 더 앉아 있는 건 지루할 것 같았다. 지도를 살펴보니 왕복 한 시간이면 헤이와다이 공원(平和台公園)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기도 했고, 공원까지 올라가는 길이 꽤나 오르막이라 힘이 들었다. 그리고 날씨가 너무(?) 좋아져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공원에는 숲속을 걸을 수 있는 산책로도 있고, 넓은 공원 안에 다양한 볼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네 시까지 미야자키 신궁 앞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평화의 탑(平和の塔)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그래도 땀을 식히기 위해 소프트 콘을 하나 사 먹을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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