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 & The LUV, 꿀벌과의 하루
마드리드행 비행기에서 본 영화 <롱 샷> 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무장폭도에 공격받는 상황에 대처하며 세스 로건에게 침착해지는 호흡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둘-셋-넷 들이쉬고, 다섯-여섯-일곱-여덟 내쉬고를 반복했다. 영화 속에서 90초 후 쯤부터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으니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몇 번 더 반복해 본다. 자연스레 깊은 심호흡을 하며 침착해진 미쇼 씨, 다시 사물함을 열고 자물쇠의 구조를 들여다본다. 집에서라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일단 양 손에 목장갑을 단단히 끼우고 공구 상자를 가져왔겠지. 몽키스패너(육각렌치)가 필요하겠구나. 나사를 조여 크기를 맞추고 자물쇠 돌아가는 방향을 맞춘 다음 매우 조였겠지. 내 힘으로 안 되면 A를 기다렸다가 매듭 지어달라고 사진을 찍어 보냈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고, 혼자니까. 나는 양손을 허공에 착착 털며 비장한 각오를 했다. 오른손으론 자물쇠 방향을 맞춰 잡았고 왼손으론 육각 링을 돌려봤다. 어랍쇼, 돌아가네? 사람을 안 불러도 되겠구나!! 순간 어디서 괴력이 샘솟았는지 맨손으로 나사를 힘껏 조이기 시작했다. 흙먼지 가득한 운동화로 돌아다니는 바닥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펴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놈의 사물함을 고쳐내고야 말았다. 의지롭구나 미쇼야!!
몽키스패너 대신 아쉬운 대로 몽키(원숭이띠)인 나를 녹여 넣었다. 교통사고로 다친 손목과 손가락 관절의 충격파 치료를 출국 직전까지 했을 만큼 아파서 시큰시큰했지만 이럴 때 써먹으려고 저 인천공항에서부터 2만 원이나 주고 손목 보호대를 구매한 거라 굳게 믿었다. 그래 뭐든 쓰임이 있는 거다. 마드리드에게 나도, 나에게 마드리드도, 사물함 조일 때엔 손목 보호대도. 나보다 힘 쎈 사람이 뒤흔들어 반대로 비틀면 열리겠으나 우악스럽게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고, 방 출입문은 카드키로만 열리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불안함을 애써 잠재웠다.
드디어 생애 첫 외국 호스텔에 안착. 짐을 사물함에 보관하고 체크인하며 받은 안내용지를 손에 들고 건물 시설 점검에 들어간다. 일주일이나 지낼 곳이니 구조를 파악해 두는 편이 좋겠지? 전체 몇 층인지, 물론 방에 욕실은 있지만 공용 욕실과 세탁실은 어디인지, 공용 주방과 사용할 수 있는 집기류, 시설들은 몇 시까지 운영되고 어디까지 사용 가능한지, 객실 내 특별 규정이 있는지 차분히 확인 및 숙지한 후 가장 가깝고 큰 슈퍼마켓을 소개받았다. 슈퍼와 시장이 결합된 형태의 메르까도나(Mercadona)가 같은 블록에 있다고 했다. 럭키!!
호스텔의 공용 공간 내 주방 집기류로는 물 끓이는 전기포트와 전자레인지, 빵을 데울 오븐, 접시와 컵, 포크와 수저, 빵 나이프, 공동 냉장고가 있었다. 간단 조리가 가능하니까 일주일 동안 어떻게 생활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객실에 여러 명이 몰리기 전에 첫 타자로 샤워를 마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게 급선무!! 욕실엔 핸드워시와 샴푸+바디 클렌저, 헤어드라이어가 준비되어있었다. (칫솔, 치약, 수건, 개인용품은 알아서 챙겨 오기. 물론 리셉션 혹은 슈퍼마켓에서 사면 됨) 정말 사전 공지와 똑같았다. 깨운-한 마음으로 머리를 말리며 츄리닝으로 환복, 장바구니 대용으로 사용할 야들야들한 에코백을 손에 들고 슈퍼마켓으로 향한다. 이제 저녁 8시를 향해 가는데 해는 아직도 중천, 살갗이 막 따갑다. 이래서 스페인 사람들이 저녁을 9시에 먹는가 보다.
이 곳 메르까도나는 San Enrique(산 엔리께) 시장과 공동 운영된다. 지하는 대형 슈퍼마켓, 1층은 잘 정비된 전통시장 구조다. 시장은 이미 문을 닫았기에 슈퍼마켓으로 내려가 토마토, 양상추, 한국에선 구하기 힘들었던 락토프리 저염 크림치즈, 두유 요거트, 생 햄과 하몽, 바삭하게 구워 말린 타파스 용 통밀 과자, 후무스, 생수를 구입해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까바(스파클링와인)를 각각 한 종류씩 구매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로 알코올은 아직 금물 ㅠ. 대신 마드리드를 상징하는 맥주 mahou(마오우)의 무알콜 맥주를 한 캔 챙겨 왔다.
공용 공간. 이곳에서는 ‘Common Area’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는데 아침 조식(€4)이 준비되고, 투숙객들이 언제든 개별적으로 식사를 하고 업무, 미팅, 친구 초대 등 여러 가지를 처리할 수 있는 다용도 공간이었다. 그곳에 흔히 우리네 고깃집에서 소주와 맥주 보관하는 냉장고로 익숙한 투명 유리 냉장고가 게스트들의 공용 냉장고로 제공된다. 내 식료품 보따리에 퇴실 일과 객실 번호, 이름(닉네임)을 적어 한켠에 잘 수납해두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길. 이제 내 몸 눕힐 작은 침대가 있는 방, 301호로 향한다. 가볍게 쪽잠을 자고 9시에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 나도 스페인 사람들과 사이클을 맞출 수 있겠다는 설레는 기분으로 301호의 문을 열었다.
놀랍도록 달고 독하고 텁텁한 향이 문틈으로 푸슉- 새어나오더니 이민가방이라 불리는 30인치도 훨씬 넘는 여행 캐리어가 토하듯 옷을 쏟아낸 채 문을 막고 있었다. 왓더F..?? 간신히 숨을 참고 문을 밀며 들어와 보니 자그마한 체구에 긴 머리, 화려한 치장을 마친 젊은 아가씨가 끈 없는 브라와 팬티 차림으로 날 반기며 HOLA! 를 외친다. “오...올라..?!”라 응수하며 빠르게 방 안을 스캔했다. 짧은 찰나였지만 그 과정 속 부득이 아가씨 몸매도 스캔 완료한 건 안 비밀. >.< (이 아이콘을 부끄러운 표정으로만 보는 당신은 순수한 사람. 많은 것을 함축하였음.)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스페인 미녀의 모습이었다. 물론 얼굴은 아니고요.
D침대를 배정받은 이 파티애니멀 아가씨는, 자신이 가져 온 코스모폴리탄 잡지 두 권과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은 분홍색 헤어롤을 내 침대 위에 올려 둔 채 패션쇼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 전신거울이 내 침대 옆에 있어서 그랬겠거니 추정할 뿐(여기서 두 번째 울컥). 욕실엔 기내용 핫핑크 캐리어 차지였다. 킬힐 3켤레와 운동화 2켤레를 비롯해 다량의 신발, 번쩍이는 소재의 벨트 대여섯 개, 소형 핸드백 댓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흡사 도살당한 분홍 돼지 한 마리의 창자가 널브러진 듯 끔찍한 광경이었다. 사람이 들어오건 말건 옷이 산더미처럼 바닥에 쌓여있건 말건 속옷 바람에 뭘 입을지 결정을 못 내려 전신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래도 옷 무더기들을 밟지 않으려고 아크로바틱 한 자세로 어흣어흣 소리를 내며 겨우 내 침대로 갔다. 그녀는 날 보곤 “우히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온 방안을 발 디딜 틈도 없는 난장판으로 만들고 거기에 강려크한 냄새까지 그득 살포한 주제에, 너의 옷더미를 밟지 않으려 애쓰는 나를 지금 비웃은거니? (여기서 세 번째 울컥,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딥빡침 발사의 시간!!) 속 편하게 한국말로 “이건 안 치울 거니?” 하며 쳐다보자 그제야 내 침대에 널브러진 자신의 짐을 수거하고 바닥의 옷을 둘둘 말아 캐리어로 속으로 막 던져 넣는다. 옷에 달린 장식과 스팽글들, 양모 털, 오만가지 먼지가 바닥에 떨어지고 공기 중에 나풀거렸다. 나는 침대 옆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침구에 들러붙은 그녀의 머리카락들을 떼어낸 뒤 다시 공용 공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뒤에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내가 이 아가씨와 투숙객들에게 별명을 붙이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일단 이 아가씨의 별명은 JOB으로 정했다. 그렇다. 매우 JOB 스러운, 그 욕 맞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로만 남겨두고 ‘JOB것’ 으로 명명 하겠다.
턱까지 가득 찬 향내와 옷 먼지로 버거웠던 호흡을 공용 공간 라운지로 나가 가다듬는다. 테라스를 곳곳에 잘 배치해 둔 호스텔이라 다행이다. 어쨌든 빨리 저녁을 먹는다 생각하고 야채들을 다듬어 취식을 마치고 설거지를 한다. 내내 마주치는 사람들과 ‘올라!’를 해 대느라 긴장도 됐고 아직은 공간들이 어색해서 팍팍 섭취가 안됐다. 그래도 충분히 분위기는 즐겼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제발 난장판이 해결됐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이건 욕을 해야 되나 소리를 질러야 되나 화를 내야 되나 만감이 교차했다가 결국 기막히고 황당해서 푸허허허 웃어버렸다.
JOB것의 침대 D는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인데, 웬 남자가 편하게 드러누워 반갑게 눈웃음까지 날리며 HOLA를 외치는 게 아닌가! @#%$^&%@?? 정말 너무 의외의 장면인지라 잠깐 사고 정지. 몸동작도 정지. ‘방을 잘못 찾았나? 카드키로 문을 열었는데???’ 나는 닭처럼 목을 뒤로 땡겨 방 문 앞 ‘301’이란 글자를 다시 확인했다. “네? 뭐라고요??” 내게 알아듣지도 못할 스페인어를 쏟아내는 이 훈남은 JOB것의 남자친구정도로 판단되었다. 다행히 JOB것처럼 헐벗지는 않았고 하늘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양말까지 꼭꼭 싸매 잘 챙겨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JOB것은 어디 갔지? 둘러보니 없고 맹렬한 물소리가 들린다. 음. 그녀는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몽둥이 좀 주세요.
기막히고도 무례한 이 상황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뇌를 쥐어짜 두 마디를 내뱉었다. “쏘리, 노 에스빠뇰. 우먼스 룸 온리” 문법이고 뭐고 알게 뭐냐. 내장 깊수—욱 한 곳으로부터 샘솟은 빡침이 전해졌는지 남자가 알아들은 듯했다. 때로는 문법보다 감정, 영어보다 쌍욕이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드디어 침대에서 등을 떼고 앉았다. 샤워실을 가리키며 또 뭐라뭐라 말하는데, 그래 JOB것이 나오면 같이 나가겠다는 말이겠지. 손사래 치며 “Si, Si.(=yes)” 라 대충 대답하고 내 침대 옆 테라스로 나갔다. 사람 소리가 나니 궁금했는지 JOB것이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튀어나와 남자와 대화를 나눴고, 남자는 곧 내게 “Adios(아디오스)”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나도 아주 호쾌하게 “아.디.오-스!”라고 대답했다.
며칠 지내보니 호스텔은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한정된 공간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얼마나 자신이 맘 편히 즐길 거리를 찾느냐에 따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도 있고 최악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다. 서울 같으면 이웃집의 쿵쿵 소리에 시끄럽다고 짜증 부렸을만한 소음임에도 기절해서 잠든다는 사실이 일단 신기했다. 여행의 피로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만 숙박 일수가 쌓여갈수록 더욱 숙면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불면증인데! 물론 뒤척이고 깨기도 했지만 다시 잠드는 속도도 빨랐다.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금토일 3일은 호스텔 위치에 관계없이 모두가 파티 분위기에 취한다. 우리 호스텔 테라스에서도 밤 8시부터 12시까지 라운지 파티를 한다고 온 사방 군데에 무서운 글씨체로 “WE WILL WAIT FOR YOU”라는 공지가 붙어있었다. 머리맡에서 헬게이트가 열리겠구나!!! 예전 같으면 나도 참여했을 텐데, 이제는 체력도 달리고 알코올은 더 딸려서 전해지는 젊은이들의 광기만을 흡수할 뿐이다. 재미있는 건 음악인데, 한 2,3년 전쯤 유행하던 인디-댄스록과 DJ들의 노래가 주로 나왔다는 거다. 다들 나가 웃고 즐기는 가운데 나 홀로 방 안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려 본다. 귀마개와 안대를 착용하고 이불도 완벽히 뒤집어쓴 채 참을 청하니 제법 숙면을 했다.
다음날, 우리의 호프 JOB것은 검정 스키니진에 검정 브라, 뱀피 무늬 하이힐을 신고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흰색 브라탑이냐 검은색 브라탑이냐를 고민 중이었는데 브라 위에 조금 더 큰 브라 하나 더 입는 걸 저렇게 까지 호들갑인지 모르겠네. 안전벨트 소재로 된 탑(굉장히 굉장했다), 고무줄로 쭈글쭈글하게 조여 봉긋하게 된 탑, 일반적 쫄쫄이 탑, 그물 망사형 탑(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 아주 많은 종류를 서너 번씩 입고 벗으며 B침대의 멕시코 계 언니와 품평회를 열고 있었다. 결국 뭐든 입고 나간 JOB것에게 안녕을 고하며 나도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JOB것은 그날 밤 외박을 했다. 브라탑 하나에 왜 그렇게까지 비장했는지, 다음날 아침 깨달았다. (그 다음날도 안 돌아왔어....)
동시에 B침대를 사용하는 멕시코 계 언니의 쇼도 시작되었다. 이 언니 역시 빤스에 브라만 입고 방안을 돌아다녔다. 동양인은 소유하지 못한 빵긋한 힙라인과 나이에 따른 똥배가 좀 있었지만 뭐, 여자들끼리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것쯤은 괜찮다. 단지 한 시간 정도를 전신거울 앞에서 포즈만 취하고 있는 걸 보아야하는 게 곤혹스러웠다. 특히 가슴 선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며 브라와 가슴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만 보고 싶은데.., 하는 순간 옷을 갈아입으려는 지 핫팬츠를 들고와 입고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가슴 매무새를 또 확인하다 그대로 상의 탈의! 악, 내 눈. 오, 마이 아이즈!! 안 본 눈 삽니다 ㅠ. 왜 내 침대 발치에 전신거울이 있는거냐고! 나는 가져간 빨랫줄 걸이를 침대 난간에 부착하고 머플러를 메달아 커튼처럼 활용하기로 했다. 거울을 떼 버릴 순 없고, 두 여자의 몸매 감상을 막을 수도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
내 침대에 커튼을 장착하는 사이 B침대 멕시코계 언니는 매직기(=고데기, 아이론)로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나가는가!’는 착각. 다시 속옷 차림인 채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고 엄청 쩝쩝 소리를 내며 타코를 먹는 게 아닌가?!! 객실에서는 물, 음료 외에는 취식과 흡연 금지였음에도 온몸에 이불을 휘감고 누워서 타코와 부리또를 냠냠 쩝쩝 잘도 먹었다. 중간에 타코를 들고 욕실로 가더니 용변을 보면서도 먹고, 나와선 방귀를 뿡뿡 뀌며 또 먹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가슴과 엉덩이 매무새 확인하는 센스! 와.. 이건 문화 충격인지 개인차인지 도저히 판단 불가. 자기애가 무척이나 강한 이 언니의 별명은 The LUV으로 정했다.
낮에는 JOB것의 미친 방향제 냄새와 옷 더미가, 저녁엔 자기애 폭발하는 The LUV의 타코 냄새 (이 언니는 새벽 3시, 4시에도 가리지 않고 타코를 먹으며 역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가 나를 강타했다. 포장지도 객실 안에 버렸으므로 공기는 점점 더러워져 갔고 나는 틈만 나면 테라스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JOB & The LUV 듀오는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나의 첫 호스텔, 4일간 애증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내 위층 침대 E를 사용하는 파트너들이 굉장히 조용하고 매너가 있었단 사실이다. 마지막 4일간을 함께 사용한 친구는 이탈리아에서 온 ‘꿀벌’씨였다. 공용 공간에서 먼저 마주친 그녀는 처음 인사할 때부터 경쾌하게 꿀 떨어지는 미소를 활짝 보이며 HOLA! 를 건넸다. 그리고 따뜻한 물에 늘 꿀을 타 먹길래 나는 그녀에게 꿀벌이란 별명을 붙였다. 늦은 저녁 방에서 만난 그녀는 나보다도 작은 체구였고, 우리네 계량한복과 유사한 린넨 소재의 둥근 통을 가진 갈색바지를 입고 있어서 정말 꿀벌같이 귀여웠다. 방에서도 꿀벌씨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조그만 캐리어를 내 침대 앞 공간에 세워두어도 될지 물어보며 통성명도 나눴다.
웃는 왕 입이 너무 예쁜 (나는 입 큰 미녀들을 좋아한다.) 꿀벌씨와는 이후 호스텔 생활을 의지하며 지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사물함도 나랑 같은 상황이었기에 나는 있는 힘껏 다시 자물쇠와 암, 수 나사를 맨손으로 꽉 고정해 주었다. 이탈리아 최북단 Trieste가 고향인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 전공자다. 마드리드에서 특별 수업(혹은 연주회)이 있어서 1년간 머물며 연주를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뮤직비즈니스를 했단 사실을 알고 더욱 반겨 주었고, 아침을 차려먹으며 자리가 없으면 서로의 옆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퇴실하기 전날, 꽁냥꽁냥 아껴 둔 담양 창평의 장인이 만든 약과 두 개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내게 보라색 돌들이 예쁘게 반짝이는 팔찌를 선물로 주며 SNS로 연락을 주고받자고 먼저 제안해줬다.
이렇게 기쁠 수가! 그날은 바로 내 생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이 마드리드행의 시발점, 마흔의 마흔을 위한 바로 그 날이었다.
BGM l beirut - No No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