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쓰 드림 ?!!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 전에 그의 고향이었던 말라가를 느끼고 싶어 말라가행을 결정했고 이어 론다를 찾았다. 마드리드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어제 세비야에 왔다. 그렇다면 이제 마드리드로 향하는 것일까?
아니요, 저는 지금 스페인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향하는 야간버스 안에 있습니다요! 그것도 무려 화장실 칸 앞에 앉아있어요 >.<
예약한 좌석은 버스기사 대각선 뒤, 3번 좌석이었는데 중동 커플이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깨어 있었는데, 갑자기 숙면 중. 당황해서 기사님께 예약증을 보이며 어필해봤지만 ‘리브레, 리브레!!(자유석)’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나를 뒤로 보내버렸다. 시각은 밤 12시 35분. 원래 11시 59분 출발 예정이었던 버스가 늦게 와서 뒷 스케줄도 밀린 상황. 앞으로 장장 8~9시간을 이 상태로 가야 하는데 멀미도 걱정되지만 생리까지 터진 오늘 밤, 나는 최악의 상황과 컨디션으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화장실 부스 앞자리 당첨. 엄마...
그러니까 리스본행은 어쩌다 결정하게 된 것인가?!!
1. 속옷밴드의 ‘멕시코행 고속열차’라는 곡이 나오고 있었다.
2. 커피와 함께 ‘에그 타르트’를 먹고 있었다.
3. 한인민박에서 만난 ‘애슬래틱 언니’와 ‘베이비 페이스’가 리스본을 어필했다.
4. ‘해물밥’이 먹고 싶었다.
5. 자우림이 떠올랐다.
자, 그럼 시간을 잠시 되돌려보기로... 치지지직.
세비야의 에어비앤비는 정말 작은 원룸이었지만 현관 앞에 테라스가, 그 옆엔 공용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원형 계단이 있었다. 콩콩콩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호스트는 낡은 모카포트(유럽에서 흔히 쓰는 에스프레소 추출 주전자)와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새 원두, 올리브유, 식초 등을 숙소에 구비해두었고 나는 간밤에 모카포트를 완전 분해해 박박 씻고 식초+열 소독 한 뒤 잘 걸어 말려두었다. 커피에 대한 작은 습관과 취미(=카페인 중독자)는 여행 중 카페인 수급에 활기를 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빵집에서 에그 타르트와 우유를 사 왔다. 모카포트로 진~한 원액을 추출해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떼를 동시에 즐겼다. 오늘은 세비야의 마지막 낮과 밤이 될 테니 계획을 좀 세워볼까? 그전에 마드리드행 기차와 숙소도 예약해야지!
예전부터 세비야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다. 바로 플라멩코 배우기! 허나 화려한 흔들기만큼 힘찬 스텝도 필요한 게 플라멩코. 사고와 수술 이후 고장 난 발로 이미 너무 많이 걸었기에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과욕을 부리는 순간 2박 3일은 누워있어야 하니까.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다녀온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허리가 안 펴지는 일이 있었다. 같은 방에 머물던 ‘애슬래틱 언니’가 다년간의 경험으로 내 등을 서서히 쫙 펴주었고, 몇 가지 스트레칭을 알려주셨다. 재활에 분명 도움이 되니 그녀의 가르침대로 스트레칭을 하며 플라멩코에 대한 욕구는 내려놓기로 했다. 가장 살고 싶은 곳, 세비야는 반드시 다시 올 테니 그때를 위해 남겨두기로 하자.
대신 한인민박에서 만났던 ‘베이비 페이스’의 인스타그램을 슬며시 들여다본다. 그녀는 리스본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세비야에 도착한 다음, 숙소 입실까지 시간이 붕 떠서 플라멩코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했다고 SNS에 업로드한 당시의 동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관종까진 아니고 부러움 품은 대리만족이랄까, 나는 그녀의 춤을 보며 남은 여정도 응원하고 싶어 졌다(하지만 지금은 계정 아이디를 잊어버렸...).
리스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에그 타르트의 본령이다. 폐공장들을 재생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LX Factory’도 그곳에 있다. 밴드 자우림이 작년에 비긴어게인 2편 촬영을 했던 ‘코메르시우 광장’도 리스본에 있다. 갤러리 관련 일을 하는 애슬래틱 언니도 리스본의 언덕길들과 와인, 트램에 관해 이야기하며 시간이 되면 리스본에 꼭 가보라고 내 등을 쫙쫙 펼 때 강추했다. 베이비 페이스 친구는 덜 매운 짬뽕 같다는 ‘해물밥’도 먹어보라고 부추겼다. 갑자기 너구리 라면이 급 땡기고.., 핸드폰에선 밴드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의 대표곡 ‘멕시코행 고속열차’ 라이브 버전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야간버스가 한 방향만 운행하는 건 아니겠지? 세비야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것도 있을 거야.” 그리고 어느새 나는 내일 밤 11시 59분 출발하는 리스본행 버스를 예약해 버렸다. 이어서 숙소. 트램과 버스를 적절히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위치를 잡아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내일 하룻밤은 버스에서 묶을 거니 그것은 그것대로 멋져 보였다. 결과는?
갑작스러운 생리로 인한 두통과 근육통에 야간버스를 기다리느라 바깥에서 오랜 시간을 방황 해 지쳐있었다. 더불어 화장실 앞 좌석에 앉아 뒤통수에서 풍겨오는 찌릉내를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운명. 하나도 안 멋졌어! 버스가 급정차할 때마다 탱크에서 출렁이는 대소변 소리와 새어 나오는 메탄가스의 융단폭격이란...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었지만 앞쪽으론 만석, 뒤쪽엔 아프리칸 청년들이 스쿨버스 뒤를 장악한 일진들처럼 자리를 잡은 채 수다 삼매경이었다. 동양인은 중국계 여성 한 명과 나뿐. 우리는 전우처럼 서로의 뒤를 봐주며 무언의 동행을 했다. 이 버스는 직행도 아닌 완행이라 가방도 걱정되어 새벽 4시가 넘도록 잠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손등이 간지러워 보니 빈대가 떡하니 내 피를 섭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체 21세기가 맞나? 일단 때려잡아 죽이고 흥분을 가라앉힐 찰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달빛을 받으며 커다란 강이 나타났다.
과디아나 강이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에 입성하는구나. 마흔에 체험하기엔 결코 추천할 수 없는 여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낭만이 15그램 정도 있는 것 같다. 국경을 넘어 조금 더 달리자 기사님이 뮤지컬 배우 뺨치는 중후한 톤으로 크게 외치더니 차가 정차했다. 심야의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제법 크고 쾌적했다. 중국계 여성과 2인 1조로 동행하며 우선 화장실로 돌진. 다행히 깨끗했지만 화장지는 없었다. 어쨌든 말끔히 심신을 정리하고 보니 추위가 엄습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느끼는 첫추위는 영하에 육박하는지 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였다. 다행히 깔깔이를 챙겨 왔다. 말라가에서부터 쓸 일이 없던 깔깔이를 짐짝으로 여길 뻔했으니 미안하구나, 깔깔아. 오늘 너를 장착해주마!
어쩐지 야근, 철야를 하는 기분도 든다. 아직 버스 출발까지 23분이나 남았고 기사님은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먹고 있었다. 일부러 옆에서 알짱대본다. 나 놓고 떠나지 말아 달라는 작전이다. 포르투갈 사람인 그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콧수염 양 끝을 둥글려 익살스럽게 손질했다. 190cm이 넘는 큰 키에 듬직한 체격, 중년의 품격인 뱃살과 제복, 몇 가지 안전용품이 부착된 벨트까지 두루 갖춘 모습이었다. 거기에 뮤지컬 배우 같은 동굴 발성은 역시 뱃심이겠지? 그를 관찰하다 눈이 마주쳐 서로 찡긋- 인사를 나눴다. 야간버스의 캡틴, 기사 아저씨의 듬직함에 점점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마음 놓고 휴게소 안을 둘러본다. 무인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금액은 알겠는데 작동법은 잘 모르겠고, 일단 동전을 넣자 주문 가능한 음료에만 불이 들어온다. 역시 자본의 원리는 같구나. 리스본 도착까지 화장실에 갈 수 없을 테니 양이 적고 가장 저렴한 1유로 커피 중 PINGADO를 골랐다. 알 순 없지만 설명을 보면 느낌적 느낌이 꼬르따도(Cortado, 에스프레소 라떼 같은 작은 양의 밀크커피) 같았다. 근데 왜 설탕이 들어있는 거죠?!! (나중에 사진을 보니 터치 비전 위에 설탕 조절 버튼이 있었다는 사실.)
출발 5분 전, 다시 화장실에 가 마지막 전의를 다져보고 버스에 올랐다. 기사님이 시동을 걸고 끝까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들어오라고 소리친다. 새벽 4시 반, 버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출발하는데 내가 예약했던 3번 바로 뒤인 7번, 8번 좌석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냅다 뛰어 가방을 던져 앉았다. 럭키 쎄븐! 안녕 메탄까스, 안녕 멀미, 안녕 빈대!!!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 포르투갈의 시골 풍경은 전체적으로 낮아 보였다. 작물도 나무도 건물도 버스터미널도 작고 낮고 낡아 보였다. 그렇게 창밖 풍경을 감상하다가 몇 번의 정차를 더 할 즈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BGMㅣ우리는속옷도생겼고여자도늘었다네 - 멕시코행 고속열차
파스텔 뮤직에 근무하던 시절 함께 일했던 밴드, 우리는속옷도생겼고여자도늘었다네. 오래전이라 멤버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온몸으로 기억하는 밴드이며 곡이다. 비를 철철 맞으며 연주하던 전주의 영화제 공연도, 급작스런 폭우에 홍대 일대가 정전되어 공연도 정전 된 데이먼 앤 나오미의 내한 공연에서 그들의 슈게이징 대폭발 사운드도, 투톤슈 내한공연에서 같이 고생했던 기억들도. 언제나처럼 빗소리 가득한 터널을 빠져나오듯 끝자락에서 기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