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 어제의 나 .
세상의 끝에 섰다. 아니 앉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뚫고 화강암 절벽에서 상승기류까지 만난 세찬 바람이 귀싸대기는 물론 전신을 강타한다. 내 몸이 해안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직진은커녕 가만히 서 있기조차 버겁다. 그래서 앉았다. 발아래는 벼랑 끝 천 길 낭떠러지와 숨 막힐 듯 차오른 북대서양이라는 극강의 콤보가 펼쳐져 있다. 햇볕에 잘게 부서진 바닷물이 반짝이며 파도를 일으킨다. 하지만 시야 확보가 불가능할 만큼 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를 끝내 이겨낸다. 이 자리에서 조금만 더 몸을 움직이면 1) 바람에 날려 구를 것이고 2) 괴성을 지르며 3) 풍덩, 바다로 떨어진 뒤 4) 죽겠지 5) 수영도 못하니까.
이곳은 호카곶(Cabo da Roca, 까보 다 호카). 옛사람들이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유라시아 대륙,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끝이다. 안전난간에 팔 하나를 휘감고 행여나 떨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하며 호카곶의 공포를 만끽하는 미쇼씨. 식은땀도 살짝 난다. 뒤와 옆엔 전 세계에서 몰려온, 특히 방금 관광버스 3대에서 일제히 내린 100여 명이 넘는 중국계 관광객들로 북적한데 나 홀로 고요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애써 집중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두 다리와 공포에 흔들리는 두 다리 아래로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본다.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본다. 머리 위로 햇빛도 본다. 따뜻하네.
그리고 풍덩! 어제까지의 나를 벼랑 끝에 내 던진다.
안녕 , 어제의 나 .
안녕 , 오늘의 나 .
리스본 대탐험의 마지막 날, 가보고 싶은 많은 선택지 가운데 ‘탐험’을 하기로 했다. 몸이 이렇게 아파지기 전에는 국외로 나가면 꼭 자연탐방에 하루를 투자하곤 했다. 영국 브라이튼에서는 세븐 시스터즈 해안절벽을 보러 안개를 뚫고 다녀왔었고,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해안 사구(모래언덕) 뒨 뒤 필라를, 일본에선 일본인도 안 오른다는 후지산을 다녀왔다. 그리고 리스본에는 호카곶이 있었다. 그곳에 가려면 신트라(Sintra) 지역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파보면 파볼수록 신트라 역시 대박적!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되었을 만큼 독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트라를 열심히 조사했다. 영국의 낭만시인 바이런은 ‘위대한 에덴’이라며 이곳을 기억했다. 수세기 동안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이 산길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건축 양식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슴슴한 외부보다 내부의 절경을 뽐내는 ‘신트라 궁전(Palacio Nacional de Sintra)’, 폐허가 된 수도원 터를 알록달록 동화의 성으로 개조한 ‘페냐 국립 왕궁(Palacio da Pena)’, 짓궂은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 8세기에 무어인(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할 때 지어진 산속 성터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을 비롯한 엄청난 문화유산들이 가득했다. 나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신트라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이미 예약해둔 터였다. 더 이상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즉흥적 여행 즉, 충동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깝지만 자제해야 했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듯 여행을 즐기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나의 여행은 잘 알려진 명소를 포함해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나 예술가와의 연계성, 독보적인 커피가 있는 곳, 지인들의 추천 가운데 놓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요즘엔 그 모든 것을 결정짓는 최우선 순위가 ‘체력’이 되었다. 몸이 버티질 못하면 어딜 가도 앓아눕기 바쁘기에 의욕보다는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씀! 게다가 ‘정리여행’이 아닌가. 전투적인 현실에서 한 걸음 벗어나 천천히 보면 불필요한 의욕도 사그라진다. 마드리드 한인민박 저녁 만담자리에서 겪었듯 나에게 이 여행은 경쟁이 아니다. 어디를 얼마만큼 많이 갈 필요도, 무엇을 하고, 먹고, 인증샷을 올려 행복한 척할 필요도 없으니까. 아무튼 나는 불꽃검색을 통해 신트라의 명소들 가운데 어떤 곳을 포기할지 노트에 쫙쫙 줄을 긋기 시작했다.
* 리스보아 카드를 구입한 후 신트라, 호카곶 다녀오는 방법은 하단에 정리합니다. *
이른 아침, 리스본 호시우 기차역에서 신트라행 열차를 탔다. 사십 여분 만에 도착한 신트라 역, 차가운 공기가 폐까지 쑤욱 밀려들어온다. 해는 쨍쨍한데 어째 리스본보다 추운 느낌이다. 나무가 많아서 그런가? 아침 9시인데도 역 앞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신트라 명소들은 돌산에 떡하니 들어선 경우가 많아 도보로 물론 이동할 수 있지만 시간도 체력도 아껴야 하므로 1일 버스 이용권을 구매 해 434번 버스를 타고 먼저 페냐 성(=페냐 왕궁)으로 향한다.
좁다랗고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상점과 건물들을 지나 산속으로 올라가는 일방통행 길까지, 곡예에 가까운 운전을 선보인 기사님께 박수를 보낸다. 갈까 말까 고민 중인 무어인의 성을 지나 첫 목적지인 페냐 성 매표소 입구에 내렸다. 세상에나! 뾰족한 고딕 양식, 타지마할을 방불케 하는 동글동글 무굴 양식,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이 마구 혼합되어 일관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 외관이었다. 심지어 노오랗고 빠알간 성의 색깔이 새파란 하늘과 만나 오색찬란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것은 늘 보던 웅장하고 입 떡 벌어지게 하는 성이 아니라 한마디로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였다. 사진을 보고 오긴 했지만 진짜로 눈앞에 있으니 너무 귀엽구나 >.<
‘달의 산’이라 불리던 자리에 기도를 위해 수도원을 지었다가 벼락에 의해 1차 훼손, 리스본 대지진으로 2차 훼손된 터를 18세기에 독일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왕궁화한 게 지금 페냐 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둘러보는 내내 만화같이 즐거운 한편 내려다보이는 신트라의 풍경에 감탄한다. 저 앞에 무어인의 성도 눈에 들어왔다. 현재시간 11시. 무어인의 성은 빠르게 포기하기로 한다. 헤갈레이라 별장에 가야 했으므로!
사실 페냐 성보다 헤갈레이라 별장이 더욱 기대됐다. 별장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성큼성큼 걸으며 피톤치드 삼림욕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숲길을 빠져나온 길모퉁이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아저씨도 만났다. 잠시 꿈결 같았던 시간이었다. 이곳 헤갈레이라 별장은 브라질에서 갑부가 된 몬테이루가 이탈리아의 건축가 루이지를 고용해 지은 자신들만의 작은 궁전이자 놀이터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동시에 비밀스럽고 은밀한 공간들이 도처에 숨어있었다. 정원에는 동굴, 폭포, 연못, 징검다리, 각종 탑도 있었는데, 작정하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컨셉이다. 이쯤 되니 건물주나 건축주의 의도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직선과 평면보다는 뭐든 비틀고 파내고 착시적인 효과를 유도했기 때문. 화려한 마스크를 쓰고 비밀스런 파티를 즐겼을 귀족양반들을 생각하니 얼레리 꼴레리~. 조카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찐득이나 슬라임처럼 단순하지만 변태 매카니즘적인 굉장히 굉장한 곳이었다. 그래서 배고픔도 잊은 채 신이 나 여기저기 뛰어다닌 미쇼씨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결론 >.<
어머, 벌써 12시가 넘었다. 어서 신트라 시내로 가서 호카곶행 버스를 타야만 한다!!
갈아 탄 403번 버스는 만석. 오랜만에 서서 꾸벅꾸벅 졸며 사십 여분을 달려 대항해 시대의 관문이었다는 세상의 끝, 호카곶에 도착했다. 눈이 뻥 뚫리듯 광활한 수평선이 보였다. 관광객이 많아 번잡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조용한 풍광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쉴 새 없이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풀어’ 놓았다. 정말이지 제주도 극성수기의 섭지코지와 닮은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어와 대만어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도 그랬는데, 특히 한 켠에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있었다. 호카곶의 상징물인 십자가 탑이었다. 탑 좌측 우측 모두 다 줄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겨야 했다. 반면 내가 남기고 싶은 건 십자가 탑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였는데,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궁정 시인 ‘카몽이스(Camoes)’가 남긴 글이었다. 리스본 시내를 돌아다니며 카몽이스 광장을 여러 번 걸어서 그런지 괜스레 친근했다. 그의 삶은 끝이 좋지 못했지만 사후에 더 큰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마치 돈키호테를 남긴 세르반테스처럼.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찍사 자리에 서서 표지석 문구를 두 눈에 새겼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A...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사람들을 떠나 잠시 걷는다. 근데 그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된다. 태풍처럼 불어 닥치는 바람 때문.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사람들은 등에 풍선이 달린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려져 뒤뚱거리고 있었다. 펄럭이 치마를 입은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웠고, 순식간에 벗겨져 바다로 날아가고 있는 모자도 있었다. 어쨌든 열심히 걸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빼빼로 인간이 아님에도 바람에 떠밀려 죽지 않으려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을 딱 주어야 한다. 안전 난간에 팔을 휘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위해 빨리 포기한 몇 가지를 떠올린다. 신트라 궁전과 무어인의 성. 단지 그것뿐이었으랴? 밥도 포기했다. 일하면서 동료와 후배들에게 ‘포기하면 빨라’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포기는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며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빠르게 선택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였다.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다 루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 끝도 보이지 않는 아찔한 바다의 벼랑 끝에 앉아있기 위해 포기한 모든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선글라스에 파노라마처럼 몇 번의 기회와 위기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후회의 순간도 있고 잘했다고 다시 한번 칭찬하는 순간도 있다. 잃어버린 것들과 떠나보낸 친구들도 보인다. 아무도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지 않기에 작은 백팩에 단벌 신사로 2주간을 버티며 세상의 끝, 호카곶에 닿았다. 마흔의 정리여행. 가지고 있는 게, 남아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버려야 할 게 떠오르는 건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여기서 떨어지면, 눈앞의 찬란한 바다를 지나면, 과연 어디로 가게 될까? 내가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무언가가 바뀔까? 이어폰 속에선 친애하는 밴드 Weezer(위저)가 부른 Toto(토토)의 대곡 ‘Africa’ 리메이크 버전이 흘러나온다.
I know that I must do what's right
I seek to cure what's deep inside, Frightened of this thing that I've become
내가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단 걸 알아
내 마음 깊은 곳을 치료해야겠어, 상처가 더해지기 전에
It's gonna take a lot to drag me away from you
There's nothing that a hundred men or more could ever do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Gonna take some time to do the things we never have
네게서 날 떼어놓으려면 쉽지 않을 거야
백 명 아니 그 이상이라도 절대로 안 돼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에 감사해
우리는 해 보지 못했던 걸 하며 새롭게 사는 거야
이 순간 참 은혜로운 곡이 아닌가. Woo hoo~♬♪ 후렴구를 따라 부른다. 바람소리로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테니 창피함도 없다. 사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리스본행 야간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이베리아 반도 남쪽 끝 지브롤터를 찍고 바다 건너 아프리카의 모로코에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브롤터와 모로코를 포기하고 리스본과 호카곶을 선택했다. 그리고 충분히 즐긴 것 같다.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만 앉아 있어야지. 지금 이 대목에서 엄마와 A를 울릴 순 없잖아. 나는 또 포기하고 또 선택한다. 지금까지 포기한 모든 것은 북대서양으로 풍덩 던져버린다. 안녕, 어제의 나.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엉덩이를 대충 터는데 익숙한 말이 들린다. “꺄아 살려줘-” “바람 때문에 못 찍겠어 어떡하지이이?” 고개를 돌려보니 바람에 날린 긴 머리가 앞으로 넘어와 전설의 고향에 자동 캐스팅되신 두 사람이 보였다. 매우깜짝베리 놀랐지만 도와주고 싶었다.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머리카락을 붙잡으세요.” “꺄아~~ 고맙습니다아아아~~” 즉시 포즈를 취하며 새콤한 표정을 짓는 여인들. 바람을 견디느라 눈물이 고여 더 예쁜 사진이 나왔다. 당최 바람을 종잡을 수 없어 연사 촬영기술을 시전하며 선택권을 주었더니, 답례로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하지만 난 짧은 단발이라 방법이 없었다. 뭘 해도 망했... 그래도 A에게 보여주면 대폭소할만한 사진들을 건졌으니 위안을 삼기로 하고 리스본으로 돌아간다. 신트라행이 아닌 카스카이스행 버스를 타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진 않으니까. 새로운 길과 바다가 또 펼쳐져 있으니까.
BGM ㅣ Weezer – Africa
!! 리스보아 카드 구매자의 신트라, 호카곶 가는 방법 !!
1) 호시우 광장에서 스타벅스를 찾는다.
2) 같은 건물 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가면 호시우 기차역이다.
3) 매표소에 줄 설 필요 없이 우측 승강장으로 향한다.
4) 우리 지하철 타듯 리스보아 카드를 태그하고 신트라행 열차에 탑승한다.
5) 소풍 가는 기분으로 풍경을 감상하다 약 40분 후 종점 신트라 역에서 내린다.
6) 신트라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403번 ‘카스카이스’ 행을 타고 호카곶(Cabo da Roca)에서 내린다.
7) 호카곶을 탐색하기 전, 돌아가고자 하는 버스시간표를 먼저 확인한다.
8-1) 신트라행 버스를 타고 돌아와 같은 방법으로 리스본으로 돌아간다.
8-2) 카스카이스행 버스 탑승, 카스카이스 역에 하차, 열차 역까지 도보 이동(1분)한다.
9) 리스보아 카드를 태그하고 ‘카이스 두 소드레’ 행 열차에 탑승한다.
10) 카이스 두 소드레 역이 종점. 꼬메르시우 광장 및 리스본 번화가로 바로 이어진다.
신트라 1일 버스 이용권은 유적지들을 포함 해 호카곶을 가고 싶다면 구입하는 게 이득. 신트라 기차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원하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탑승하면서 운전사에게 직접 구입한다. 결제 영수증이 티켓이다. 리스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영수증을 버리지 말고 버스 탈 때마다 운전사에게 보여주면 된다.
카스카이스 역에서 리스보아 카드를 태그 할 때, 나처럼 작동이 안 될 수도 있다. 개찰구 바로 앞 역무원에게 카드와 유효시간이 남았음을 보여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니 웃으며 잘 통과시켜주었다.
홀로 길 떠나는 여행자들 모두 잘 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