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칼라 데 에나레스 1부
“
만약 사람들이 모아놓은 금보다 음식과 환호성, 음악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세상은 더 즐거워질 것이다.
- 존 로날드 로웰 톨킨
”
내 안의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잠재우고 앞으로의 인생 2막을 해쳐나가기 위한 영감도 얻기 위해 정리여행, 마흔의 마드리드 드림을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고 매일 매 순간 1분 1초도 쉬지 않고 비장하게만 있을 필욘 없지 않을까. 떠나오던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처럼 ‘의외의 사건’이 일어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두둥-. 레티로 공원을 산책하며 얻은 작은 단서가 여행의 또 다른 순간을 알리고 있었다. 『돈키호테』를 만들어 낸 작가 세르반테스가 태어난 고향,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매년 세르반테스의 생일을 기념해 축제 “메르까도 세르반티노 2019 (Mercado Cervantino)”를 개최하고 있었다. 올 해는 10월 13일까지 열린다. 마드리드에서 열차로 40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다. 가즈아!!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홈페이지에 접속 해 2018년 세르반티노 축제의 사진들과 올 해의 정보들을 확인했다. 찾아가는 길도 쉬웠다. 용산역에서 급행 지하철 타는 느낌과 비슷했는데, 마드리드의 아토차(Atocha) 역에서 통근열차 ‘쎄르까니아스(Cercanías)’를 타면 된다. 딱 수원 화성행궁에 가는 기분이었다. 세르반티노 축제가 아니더라도 알깔라 데 에나레스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라 당일치기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 여행객은 드문 곳이다. 대부분 톨레도나 세고비아를 가기 때문인데, 여행 블로거들의 포스팅엔 뜸한 경로를 향해 나아간다는 설렘도 나름 뿌듯했다.
기원전 로마시대부터 존재한 도시답게 고대의 흔적도 많이 남아있다. 톨레도가 옛 스페인의 수도였을 때부터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 주교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래 된 성당, 종탑, 수도원, 교회 등이 보존, 복구되어 주민들 곁에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다. 그중 압권은 단연 15세기에 지어진 '세계 최초의 대학'이다. 현재는 ‘알깔라 대학’으로 운영 중인데, 한국 유학생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에서 공부하고 생활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면 꼭 물어봐야지!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서 하루를 묶기로 했다. 당일치기 여행객이 대부분이라 호스텔은 없었다. 세르반테스 광장 주변을 벗어나 역 근처로 다시 올라가면 비교적 저렴한 호텔들이 있지만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미 그쪽은 Sold Out이기도 했고. 이럴 때 돈을 써야지, 암!! 론다에서 머물고 싶었던 스페인 국영호텔 ‘파라도르(Parador)’가 이곳에도 존재했다. 호스텔 4일 치 요금을 하룻밤에 몰아서 써야 했지만 덕분에 난생처음 고급진 4성 호텔에 머물게 됐다. 도심탐방과 세르반티노 축제도 즐겨야겠지만 파라도르 호텔 역시 구석구석 즐기며 뽕을 뽑도록 하자.
* 파라도르 : 고성, 수도원, 청사 등의 중세 유적지를 개조해 운영하는 스페인의 국영 호텔 체인.
# 알깔라 데 에나레스 역
진짜 소풍 가는 기분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개찰구를 통과해 살펴보니 도시의 규모에 비해 작고 실용적인 역이었다. 출구 앞의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길을 복기한다. 여기서 곧바로 직진 해 원형 로터리를 지나고, 비스듬하게 꺾어 5분 더 내려가면 관광 안내소가 나온다. 축제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안내소 옆 블록의 파라도르 호텔 프런트에 가방을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축제에 뛰어들어야지!!! 꺄아- 신나서 역 앞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어머 깜짝이야!’ 한 가족을 형상화 한 시커먼 동상과 마주했다. 근데 동상 표정이 너무… 광장 이름이 3월 11일 광장이었다. 아… 2004년 3월 11일, 스페인 열차 테러가 발생한 그 날을 추모하는 동상이었다. 바로 이 곳, 알깔라 데 에나레스 역에서 출발한 4개의 쎄르까니아스에서 각각 폭탄이 터졌고 정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숙연함이 밀려오며 자연스레 추모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어
촐랑거리던 심신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세르반테스 광장(Plaza de Cervantes)이 있는 구도심을 향해 나아간다. 사실 구도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중심인 대학과 기숙사, 시청, 세르반테스 광장, 극장, 관광 안내소, 교회 등이 다 그곳에 있다. 어쨌든 역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현대적인 건물이 사라지고 무척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 세기 동안 유지된 고대의 도시답게 로마시대 풍, 이슬람 시대 풍, 중세 시대 건물, 그 사이 새로 지은 건물이 사이좋게 이어져 있었다.
세르반테스 광장 근처로 진입하자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제 막 영업을 준비하는 푸드 코트도 보이고 신기한 물품을 진열하는 마차들도 보인다. 바비큐 냄새도 난다. 튀기는 냄새도 난다. '마요르 길(Calle Mayor, 까예 마요르)'이 축제의 핵심 골목이다. 관광 안내소로 가는 길에 이 길을 조금 걸어야 했다. 안내소 앞 세르반테스 광장은 이미 별세상!! 제련소가 있고, 아이들을 위한 무동력 놀이터가 있고, 내가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 빠에야, 바비큐, 소시지를 굽고 문어를 볶고 난리가 났다. 방문객을 제외한 모든 인력이 중세시대 전통의상을 입고 어서 여기 앉으라고 손짓한다. 마치 ‘왕좌의 게임’ 세트장에 뛰어든 기분이 들었다.
# 돈키호테를 찾아랏!
관광 안내소에서 세르반티노 축제 팸플릿을 챙기고(아쉽게도 스페인어만 ㅠ) 몇 가지 추천을 받았다. 숙소 중심으로 안전하게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코스와 세르반테스 생가(축제 기간 동안 무료입장!), 생가 근처의 레스토랑까지 덤으로 추천받았다. 근데 여기도 저기도 먹거리가 엄청나서 식당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를 대표하는 성당과 유적도 많지만 오늘-내일 이 마켓만 둘러봐도 시간이 훌쩍 지날 테니 천천히 보고 소지품에 주의하라는 팁도 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퍼레이드 정보!! 1시와 6시에 돈키호테와 산초가 직접 이끄는 거리 행진이 시작된다는데 이미 1시 30분. 좀 더 일찍 올 걸! 하며 아쉬워하자 안내원이 퍼레이드 루트 반대편으로 달려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럼 저 안쪽 전시는 내일 다시 와서 구경해도 되죠?” 안내소 내부에도 세르반테스의 흉상과 돈키호테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Hasta luego(아스따 루에고, 또 봐~, 안녕~)”를 외치며 안내소를 빠져나와 퍼레이드 합류를 위해 오늘도 날쌔게 달려본다.
그리고 짠~ 찾았다 돈키호테, 만났다 산초, 신난다 미쇼 씨!!!
이봐요, 돈키호테. 여기도 좀 봐주세요-
돈키호테와 산초의 행진을 정신없이 영접하고 급격히 당이 떨어진 미쇼 씨. 간식을 사들고 곧바로 숙소 파라도르로 향했다. 역시 국영 호텔 클라스! 욕실 하나만 해도 내내 머물던 호스텔 6인실보다 넓었다. 무엇보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욕조까지 완비되어있으니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씨에스타를 즐겨야지.
전열을 가다듬고 체력을 재정비한 미쇼 씨는 오후에 본격적인 축제 탐방을 시작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지니까 지금은 아디오스- 내일 연재를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