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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Apr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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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Doubt, 2008년 作)

'이 영화를 제임스 수녀님이라고 불리셨던 마가렛 메켄티 수녀님께 바칩니다.' 결국 <다우트>는 두 명의 상사 사이에서 나름의 중도를 지킨 제임스 수녀(에이미 애덤스)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였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다소 무리한 이분법을 들이댄다면 원칙주의자와 합리주의자 혹은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한 결로 흐르지 않았던 제임스 수녀의 입장을 옹호하는 영화란 말인가? 그렇다면 <다우트>는 단명(單明) 해진다. '당신은 누구 편에 설 것인가!'라는 포스터의 질문에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겠다!'라고 대답하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제임스 수녀에게 헌정한다는 마지막 멘트는 영화도 중립의 입장을 지지한다면서 은근슬쩍 같은 위치가 되기 위해 한발 들이미는 격이 되는 것일 텐데, 뭐 그것이 이 영화의 진심일지언정 나는 나의 관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 잠시 위의 문장을 소거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반문하고 싶었다. 진정 <다우트>의 태도는 중도에 위치하고 있는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브렌던 플린 신부(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도널드 밀러(조셉 포스터)가 모종의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사실상 확신에 가득 찬 의심을 품는다. 문제는 몇 가지 정황 근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심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고,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연륜에서 비롯되는 자신의 통찰력이 전부라는 점이다. 마치 그녀는 플린 신부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처럼, 제임스 신부로부터 그에 대한 몇 가지 꺼림칙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심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놓듯이, 그녀는 자신이 놓은 덫에 그가 걸리기를 전전긍긍(戰戰兢兢)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의 비약적 의문이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추가로 들어야 하는 의문. 왜 그녀는 플린 신부를 애당초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연륜으로 의견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결국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 너보다 더욱 경험이 풍부하다는 다소 꼰대적인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우아하게 표현한다면 내가 당신들보다 어쨌든 역사의 더 깊은 산증인이니 내 말을 좀 들어보라는 제안이기도 하다. 대관절 알로이시스 수녀가 겪은 역사는 어떤 것이길래 이토록 강단 있는 확신으로 일관하는 것인가? 물론 그녀의 역사는 카톨릭 교구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런 류의 범죄 케이스에 대한 다(多) 경험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더욱 역사적인 관점에서 눈에 띄는 그녀의 역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사별한 남편의 존재이다. 즉,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여인이다. 그녀가 밀러의 어머니(비올라 데이비스)와의 면담에서 몇 해전까지만 해도 남편의 소식을 듣기 위해 매일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고 말하는데, 추측건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시점은 이미 약 20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몇 해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여전히 2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 속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히틀러보다는 무솔리니에 대한 증오.


이토록 그녀의 내면에 여전히 이탈리아계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이 자리 잡고 있으니, 다혈질인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가 많은 우리의 교구에서는 분명히 도널드 밀러를 폭행하는 아이들이 나올 것이라는 비논리적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다우트>는 이렇게 역사적 맥락을 통해 간편하게 도식화를 하여 영화를 읽어내게끔 꽤나 유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제임스 수녀의 첫 번째 역사 수업시간. 왼쪽 위편에는 성조기가 걸려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의 위대함에 대한 강의를 하는 도중에 교실로 입장하는 알로이시스 수녀. 마치 자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시대를 관통했던, 그러니까 지금의 미국을 존립하게 만든 산증인인 양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아이들에게 지적질을 하며 이 수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제임스 수녀의 두 번째 역사 수업시간. 같은 교실임에도 교실 전체를 보여주는 쇼트가 없어 성조기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 이번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군사협정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이 와중에 시선을 끄는 말썽쟁이 아이 이름은 런던이란다). 이번 수업 시간에 침입하는 것은 플린 신부의 전화.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완전히 양 극단에 서있는 두 명의 인물에 대한 수업을 하는 도중 침입한 수녀와 신부. 과하게 친절할 정도로 명확하게 대조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두려운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의 후예들인 이탈리아계 아이들이 언제 폭력의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데, 그들을 제어할 자신의 강력한 훈육 정책에 반기를 드는 플린 신부의 진보적 성향이 무척 걱정스러운 것이다. 필자는 영화의 유혹에 넘어가 미국의 역사라는 영화 외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여 무리한 도식화와 일반화를 감행하고 있다. 즉, 이미 영화 비평임이기를 거부한 글이므로 내친김에 조금 더 나의 비약을 밀고 나가겠다. <다우트>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년 후 1964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진보주의 정책이 만개하던 시절 말이다. 결국 알로이시스 수녀의 두려움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진보화되어가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왜 그녀가 플린 신부를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 했는지는 명징 해진다. 결론적으로 알로이시스 수녀발(發) 플린 신부행(行)의 맹목적 의심의 기폭제는 2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 그와 결부된 무솔리니에 대한 반감 그러니까 이탈리아계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자신의 강경책에 반대파로 나서는 자신의 다음 세대의 인물인 플린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그가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가 미국의 안위를 저해할 요소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 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그에게 무차별적인 의심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고래 싸움에 끼여 새우등 터지고 있는 도널드 밀러는 어찌할 것인가? 흑인, 게다가 성소수자. 심지어 미성년자. 사회적 최약체인 소년이 이 싸움에서 얻은 것은 사실상 자신의 꿈을 상실한 것과 같은 자신이 동경하는 남성의 망실이요, 아버지로부터 발발한 사랑을 빙자한 무차별적 폭력일 뿐이다. 심지어 잔인하게도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절대로 뱉기 싫었던 말을 뱉게 만들고 있지 않았던가?


<다우트>에는 끝내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 플린 신부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조금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는 추측할 수는 있다. 즉, 그는 도널드 밀러에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든 이하이든 비도덕한 어떤 짓을 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국가의 안위를 좇겠다며 소수의 희생자를 양산한 뒤 졸업 보장이라는 알량한 보상을 챙겨주는 알로이시스 수녀로 대변되는 보수파의 원칙을 지지할 것인가? 혹은 사회적 소수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실상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착취를 감행하는 플린 신부로 대변되는 진보파의 입장을 지지하겠는가?


서두에 언급했듯 <다우트>는 제임스 수녀의 입장으로 분한 후 보수와 진보 어느 견해에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평화로 대응하겠다는 낭만 충만한 중도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 악전고투(惡戰苦鬪) 한다. 제임스 수녀의 세 번째 수업시간. 그녀는 어느덧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동화되었는지 도널드 밀러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패트릭 헨리가 남긴 유명한 말이 무엇인지'질문을 하며 야단을 치기 위한 발동을 걸기 시작하는데, 이때 마치 주인공이 될 것인 양 영화의 포문을 열었던 도널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미 헐리(로이드 클레이 브라운)가 벌떡 일어나 대답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마치 자신이 지지하는 중도파의 저울이 치우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듯 영화는 자신이 심어놓은 파수꾼을 소환해낸다. 이렇게까지 중도 지킴이를 선언하는 영화에게 나는 서두의 질문을 반복하겠다. 진정 <다우트>는 중도의 위치에 있는가?


플린 신부와 주임신부를 포함한 3명의 간부는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핏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는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술잔은 가득 채워져 있다. 심지어 이들은 비만인 모녀(母女) 신도에 대한 지리멸렬한 험담을 안주로 곁들이며 사실상 파계승적인 면모를 전시하고 있다. 도저히 성스러운 종교적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라고 보이지 않는 그들. 이상한 점은 이 장면은 어느 누구의 시점 쇼트도 아니고, 사건 진행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무기능의 쇼트들의 집합이라는 점이다. 유일한 기능이 있다면 단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조금 더 '플린'과 '신부'라는 단어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요인 정도라고 할까? 그렇다면 중도 노선을 걷고 있는 <다우트>는 왜 이런 선입견 창발의 장면을 인서트 했는가? 그러니까 왜 우리가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지를 두는 장면을 삽입했는가?


즉, 내가 보기에 <다우트>는 자신은 아니라고 버틴다 한들 알로이시스 수녀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이다. 자신의 린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버린 플린의 행보에 회의감에 젖어 눈물이 터져 나오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모습은 제임스의 입장에서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보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보수 진영인 이 영화의 무기력한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이지는 않을까? 일종의 자기고백.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임스 수녀 운운하는 마지막 문장은 최소한 나에게는 가증스러운 입장 표명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제 영화의 제목을 바꿔야겠다. 참 인지 거짓인지 중도의 입장에서 의심하는 'Doubt'가 아닌, 죄,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미 여기고 의심을 시작하는 'Suspect'가 이 영화에는 더욱 잘 어울린다.




★★★★ (별 4개)

Doubt 가 아닌 Su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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