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2000년 作)
지금은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감독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초창기 작품들 혹은 출세작을 볼 때면 문득 무엇인가 과한 면이 없지 않은데, 그 재기 발랄함이 호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순수함' 같은 것이랄까?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창작을 했으니 지금보다는 과거에, 과거보다는 대과거에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정력적인 작품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흥행에 대한 갈증'이 이러한 영화적 터치를 만들지는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본인에게 무한한 재정적 지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 이상은 결국 업계에서 사장(死藏) 되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 간헐적일지언정 대중적 성취 그러니까 경제적 성과를 내야만 할 것이라는 뜻이고, 그러기 위해서 흥행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을 하기 위해 필요한 현재의 작품의 성공. 일견 폐곡선처럼 보이는 이러한 창작의 사슬은 사실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단지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처럼 나만의 것을 줄이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첨가하는 방식의 영화가 등장하곤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이런 영화들에 종종 끌린다.
박찬욱의 최고작을 거론할 때 <복수는 나의 것>이니 <박쥐>네 갑론을박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보이>를 지지하는 사람도 드물게 만났다. 분명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세 가지의 영화이지만 왠지 유사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언급한 영화들은 소위 '박찬욱스럽다'. 부정적인 단어 선정이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특징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있는 영화들에 명확한 본인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이 뭐 이상한 일이겠는가?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복수는 나의 것> 바로 직전 그러니까 <삼인조> 바로 직후에 만든 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확연히 앞서 언급한 세 가지의 영화들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 이후에 등장하는 그의 모든 영화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과격하게 말해,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스럽지 않다. 오히려 대한민국 역사문제와 대중적 기호를 녹여내는 솜씨를 보건대 이 영화의 각본가 김현석의 느낌이 물씬 풍기기도 하다. 즉, '박찬욱 +@ ' 혹은 '박찬욱 - @'의 영화.
서두에 언급한 '흥행에 대한 갈급'이 원인이라고 본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의 참패 이후 기로에 선 순간.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암묵적 법칙인 삼세판 중 두 번의 패배를 맞본 절체절명의 순간. 분명히 그는 '과연 대중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세계관과 대중적 기호에 대한 적절한 배합.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치열한 교류. 아마도 이러한 고심 끝에 나온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이지는 않을까? 나에게 이 영화는 그런 영화로 보인다. 그가 감추고 싶은 맨살을 드러낸 것 같은 영화.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박찬욱스럽지 않은데 역설적으로 가장 박찬욱의 내면을 본 것 같은 영화. 나에게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의 영화 중 최고작이다.
서두부터 시답지 않게 대중성, 예술성 운운하며 박찬욱 감독의 양가적 연출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 이유는 한 가지이다. 이 영화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박찬욱이 선택한 연출법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에도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혹 이 타이밍에 '이중성'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앞으로 이어질 나의 글이 뻔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관성적 태도를 보이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정확하게 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이 영화에 대한 관을 적어내려가는데 꽤나 진부한 도식화를 하겠다고 자조적인 선언을 하는 바이다. 남북한의 관계를 운운할 것이며, 중학생 수준의 얄팍한 국제정세도 조금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열하는 수준의 글을 쓸 예정이다. 그 이상의 이야기를 풀어낼 능력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 이상을 포착할만한 비평적 시선 또한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관절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며 남북 관계 말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한번 반복한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관계에 대한 영화다. 우리는 한민족이니 개인으로 만나면 뜨거운 우정을 나눌 수 있지만, 개개인을 둘러싼 국가적, 국제적인 거대한 시스템의 동작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창하는 영화이다. 결국 우리는 국가라는 주인의 파블로프의 개이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그동안 받았던 정신교육의 효과가 무조건 반사적으로 발현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을 진행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쏜 마지막 한 발이 그러했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망각해버린 그의 뇌의 운동이 그러했다. 형제라고 말하면서 형제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언행불일치의 행위가 내가 말한 이중성의 근원이다.
포스터에는 우측에 남한군 이수혁 병장, 좌측에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등을 맞대고 서있다. 전장에서 나의 등을 맡기는 행위. 나의 목숨을 너에게 맡기며, 너의 목숨을 내가 지키겠노라는 다른 말. 즉, 이들은 전우로 분하고 있다. 아마도 오경필과 정우진(신하균)이 지뢰밭에서 이수혁이 밟고 있는 지뢰를 제거해 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방에 무관심한 체 돌아간 분대원들 보다 지금 이 순간은 생명을 연장시켜준 적군들에게 마음이 동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선 의사소통의 원활함은 우리가 외국에서 한국말이 들려올 때 괜히 마음이 놓이게 되는 감정처럼 순간적으로 긴장을 덜어 주게 됨이 자명하고, 지뢰밭이라는 서슬 퍼런 전쟁 역사의 현장이라는 극적인 공간적 배경은 모든 감정을 평소보다 배로 과잉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퀀스를 통해 이수혁에게 오경필이 '우리 형'이 되는 것은 무리한 결론이 아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포스터의 우측과 좌측이라는 지정해버리는 나의 전제는 우리의 시점에서 규정지은 것일 뿐, 만약 이것이 포스터 속 그들의 입장이라면 좌우는 반전된다. 물론 비약이지만 결국 당연히 우측에는 국군이 서있는 것이라고 예단하는 나의 태도 또한 근본적으로 이중적이다.
대중성을 의식한다는 말은 장르의 규칙을 따른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두괄식의 구조를 채택하여 꽤나 정직하게 서두로 들어간다. 각각 다른 도로를 오른쪽 차선과 왼쪽 차선으로 달리는 두 대의 차. 두 쇼트에는 각각 문산과 개성이라는 도로 간판이 보인다. 그다음 쇼트, 엇갈리는 방향으로 뒤바뀐 차의 차선. 다시 그다음 쇼트, 검문소를 지나 지그재그 방식의 가드레일을 통과하는 한 차량. 앞의 두 쇼트는 차의 앞바퀴 측면 좌/우에 카메라를 가져다 놓았기에 확연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다음 쇼트에서 그 둘은 합쳐져 좌우를 연속적으로 이동하며 동선을 모호하게 설정한다. 우리는 누가 어디에 타고 있는지 어떤 차가 남인지 북인지 혹은 중립국인지는 아무 정보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초반부의 쇼트들을 통해 알기 힘들다. 즉, 모든 것을 규정지어야만 하는 우리의 관습에 제동을 걸며 단지 우리의 뇌리에 '방향성'이라는 잔상만을 남긴다. 이 좌/우로 갈팡질팡하던 차가 직선으로 합일하는 이동이 등장할 때 좁은 시야를 갖던 카메라는 비로소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전체 모습을 뒤에서 보여준다. 영화는 이미 서두에서 남북을 하나로 묶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직후 등장하는 인물 상정 또한 명징하다. 남북한을 하나로 묶는 쇼트의 연결을 전시하였으니, 이제 이를 저해하는 세력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차례이다. 스위스-스웨덴으로 이루어진 중립국 위원회 소장 보타(크리스토프 호프리히터). 후임 페르손(허버트 울리치)은 소피 소령(이영애)에게 자신의 상사를 폴리네시아 지역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라고 소개한다(심지어 소피의 시점 쇼트에는 책장에 꼽힌 폴리네시아라는 책이 포착된다). '폴리네시아를 연구했으니 아시아 전문가다'라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폴리네시아는 오세아니아 동쪽의 섬들을 지칭한다. 유럽에 비해 아시아와 가까울 뿐이지 오세아니아를 연구한 것과 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는 것은 무관한 일이다. 그를 최고 전문 위원으로 앉혀놓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니 무용에 대한 심사위원장이 되어보라라는 것과 비슷한 어불성설의 논리이다. 그것도 아시아라는 대륙을 전반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아닌 아시아 중에서도 한반도 문제라는 지엽적이고 긴밀하며 민감한 사안에 다가가는데 있어 어떻게 그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될 수 있다는 말인가?
'겨울 숲'운운하며 한반도 정세에 외연적인 시선만을 가지고 있는 그의 임명에 작용하는 영화적 시선은 두 가지이다. 우선 소피의 입을 통해 '안락의자 인류학자'라는 일종의 조롱을 하며 그를 자격 박탈자의 위치에 놓아두는 시선이 있겠고, 조금 더 관점을 확장시키면 가정법을 통해 당시 국제 사회가 한반도의 문제를 어느 정도의 경중(輕重)으로 보고 있었느냐?를 반추하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전문가의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문제 제기 혹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의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에 대한 토로 말이다. 국군 장군(기주봉)의 입에서 북한군을 '몇 마리'라며 가축으로 내모는 대사들이 흘러나오고, '중립이 설자리가 없다'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를 소위 말하는 보수꼴통적 극우세력으로 분하게 하고 있음을 길게 집고 넘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는 저해 세력을 누구로 규정짓고 있는지를.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 사건에 개입할 권한을 주었나? 영화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한국인, 소피 소령. 그녀는 스위스 국민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부계의 혈통이 한반도에 있는 자이며,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는 내전 중에 내전이라는 인민주의자와 반공주의자의 이분법에서 제3국 행을 선택한 사람이다. 게다가 상투적인 선입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쟁과 가장 멀어 보이는 '여성'이라는 존재론적 입장까지 취하고 있으니 그녀는 모든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나 있을까? 이러한 다층적 교집합에 모두 속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한들 심지어 소령까지 진급한 여군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한 캐릭터를 축조하는데 있어, 이런 무리하고 기막힌 설정을 하는 자체가 이 사안의 해결 불가능함에 대한 일종의 방증이 될 것이다.
사실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기 전부터 이중성을 상기시키며 남북 화합에 대한 회의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불을 질러 전쟁의 상흔인 지뢰가 폭발하는 장면을 마치 아름다운 불꽃놀이처럼 바라보는 행위, 그렇게 표현하는 영화적 태도가 아이러니를 명시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수혁, 오경필, 정우진, 남성식(김태우)이 북한군 초소에 둘러앉아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쩌냐고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누는 시퀀스를 통해 본인의 입장 표명을 굳건히 한다.
이 대화는 카메라의 패닝의 방향에 따라 병렬식으로 나뉜다. 먼저 진짜 남한으로 내려오려고 했냐?, 미군이 폭격을 한다는데 그럼 어쩌겠냐?, 그러니 핵무기를 안 만들면 되지 않겠냐?, '낸들 알겠냐? 등의 질문들이 오고 가는 대화의 순간. 답을 모르니 질문만으로 대화를 구성하는 어쩌면 당연한 대화법. 두 쪽 다 징병제의 나라에서 군대에 끌려온 말단들이니 그들이 힘의 논리와 저 꼭대기의 알력싸움 따위를 어찌 알겠으며 큰 관심이나 있겠는가. 이 대화에서 카메라는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다음. 진짜 전쟁이 나면 우리끼리 총을 들어야 된다는 한마디에 정우진은 우리끼리 증서 같은 걸 써주자며 이미 우리가 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 태도를 보이는데. 이 대사가 시작되면서 잠시 방점을 찍은 카메라는 이번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패닝하기 시작한다. 대단히 무리한 일반화를 해보겠다. 시계방향을 자연스러운 방향, 반시계 방향을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여긴다면 결국 카메라 운용법은 '우리는 형제요'의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격이 된다. 한 공간에 둘러 앉혀 놓고 그들의 경계를 허물어 형제애를 발산 시키게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엔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중적 태도. 우리끼리는 좋은데, 우리'들'끼리는 힘들어지고, '너희들'까지 가세하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영화의 태도.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뜬구름 잡는 넋두리뿐이다. '그런데 광석이는 왜 이렇게 일찍 죽었니?'
나는 '이중성'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영화가 이분법을 거세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상황은 둘을 더욱더 극명하게 나누고 있다. 개인도, 시스템도, 영화도, 우리도 모두 이중적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력한 발길질. 영화가 나온 지 17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정세에서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어쩌면 이 영화를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영화의 힘이라기보다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관계 덕분일지도 모른다.
박찬욱 감독이 동생 박찬경 감독과 함께 만든 제작사 이름은 '모호필름'이다. 그렇다. 그의 영화가 늘 우리에게 주는 감흥은 '모호함'이다.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만큼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내는 데에 지나칠 정도로 명징하다. 나는 이것이 결국 서두에 언급했던 흥행을 좇는 순수함에서 시작된 솔직함 때문이라고 본다. 아마 다시는 박찬욱의 영화에서 이런 영화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감히 예단하겠다. 흥행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마스터피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 (별 4개 반)
흥행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마스터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