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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r 25. 2018

쾌락과 종교

박쥐(The Thrist, 2009년 作)


쾌락과 종교 - '박쥐(The Thrist, 2009년 作)'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 앞, 작열하는 태양은 쾌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두 남녀의 육신과 육욕을 아스라이 녹인다. 이때 태주(김옥빈)의 발에 신겨진 상현(송강호)의 구두는 사라져 가는 그녀의 발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잠시 태주가 흡혈귀로 부활한 순간을 떠올려 보자. '전 이제 여자도 아닌 거예요?'라고 묻는 태주. 남성의 구두를 신고 여자임을 부정하는 그녀는 아마도 남성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녀의 성전환의 욕망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쾌락'에 대하여 고찰해보아야 한다. 쾌락은 욕구가 구속받을 때 발현에 대한 욕망이 더욱 극대화되는 측면이 있는데, 태주에게 '행복 한복'은 쾌락을 갈급하게 하는 속박의 공간이다. 먼저 사실상 성 불구자인 남편 강우(신하균)와의 동침이라는 속박. 밤마다 뜨거워지는 육체를 지리멸렬한 남편을 통해서라도 달래보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자 냉기로 식히기 위해 그녀는 매일 밤 동네를 달린다. 혹은 바느질 가위로 허벅지를 찌르거나.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 사회로부터의 속박. 시어머니 라 여사(김해숙)도 눈치채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녀라고 모르고 있었으랴? 마작을 하면서 흘끗 흘끗 그녀에게 군침을 흘리는 남정네들의 저급한 눈길 말이다. 남성들의 쾌락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체감하고 있던 그녀는, 아이러니하게 본인도 무한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던 그녀는, 남자가 되는 것만이 직면한 모든 상황을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녀의 눈에 비친 남성이라는 존재는 쾌락의 여의봉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그녀가 남성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본질적으로 쾌락 추구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갈망하던 남성이라는 존재보다도 더욱 정력적인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세상을 주유천하 하며 핏빛 활극을 시작한다. 억눌렸던 쾌락을 한없이 해방하겠다는 듯이.

이제 상현의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 상현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신에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목숨을 건 실험에 참여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또한 쾌락 추구의 다른 형태이다. 종교적 극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의 염원이라는 측면에서. 이 염원의 깊은 저변에는 결국 지향점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지적 쾌락이 놓여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그도 태주처럼 형태는 다르겠지만 마음속에 쾌락이라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이다. 실험의 결과 뱀파이어가 되자 그의 쾌락은 해방구를 만난 것처럼 무작위적으로 방출되기 시작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거대한 쾌락이 가득 내포되어 있는 두 남녀는 닮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속박을 통해 더욱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의 생리적 욕구에 속한 태주, 자아실현의 욕구에 속하는 상현. 그런데 이들은 왠지 우리와 닮았다.



쾌락은 탐닉할수록 전락(轉落) 하게 하는 일종의 카오스이자 블랙홀이다. 섹스와 흡혈에 대한 무한의 욕구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이지 않는 갈급을 하게 만들고 결국 태주와 상현은 구속과 거짓 그리고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노신부(박인환)는 어떠 한가? 눈을 뜰 수 있다는 희망, 그러니까 결국 생(生)이라는 일종의 쾌락 추구는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자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굴종적 위치에 놓이게 만든다. 그가 써 내려간 많은 세월의 종교적 고뇌는 단 한순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간다. 무분별한 쾌락 추구는 전락하고야 만다는 인과응보적 결론. 기본적으로 쾌락의 부정적 측면을 전시하는 영화.

이동진 평론가의 설명처럼 태주를 안고 하늘을 활공하던 상현의 비행 장면은 하강의 쾌락이 강조되게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태주의 오르가즘적 표정을 따라가는 카메라. 다시 위로 올라가자는 태주의 제스처 후에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블랙 코미디적인 장면이 붙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상승의 팍팍함을 전시한 것. 말하자면 상현의 입장에서 <박쥐>는 힘겹게 오른 산을 쉽게 떨어지는 영화이다.

쾌락의 부작용에 대한 부연.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가 죄스러운 상현은 몽둥이를 휘둘러가며 허벅지를 내리치지만, 태주와의 첫 섹스 후에 '이것이 결코 나쁜 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육욕을 다스려야 하는 신부에게는 옳은 짓이 아니다. 도덕적 측면에서 이들이 벌이는 섹스는 간통이며, 직업적 측면에서 남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파계승적 행위이다. 그러니까 상현의 말('이것이 결코 나쁜 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은 일종의 합리화다. 자살 모임의 사람들에게 기도를 해주며 피를 받는 행위, 병원에 뇌사상태로 누워 있는 효성(서동수)의 피를 마시며 그는 원래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괜찮다는 언사. 마찬가지로 이러한 행보는 쾌락 추구를 위한 자기합리화가 되는 셈이다. 쾌락이 만들어낸 청맹과니화.




'저는 모든 쾌락을 추구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쾌락 앞에 나약한 존재이다. 쾌락의 부정적 측면을 알고 있다고 한들 본능을 어찌 절제하라는 말인가? 문제 제기를 했으니 답을 넣어 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아니 최소한 의식의 흐름을 진단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우리는 상현의 직업을 다시 한번 반추해야 한다. 나는 <박쥐>를 쾌락의 중재는 카톨릭으로 가능하다는 태도로 읽어내려고 한다.


필자는 서두에 태주와 상현은 닮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본질적 차이점이 있다. 종교의 유무. '저 같은 사람이 이러면 지옥 간다'라고 말하는 상현과 '나는 신앙이 없으니 괜찮다'라고 말하는 태주의 모습은 그들의 확실한 차이를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섹스에 대한 욕구의 형상화였던 바느질 가위는 어느덧 흡혈에 대한 욕구로 변질되는데 태주는 봇물이 터지자 무한한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 분한다. 심지어 그녀는 어느덧 살인광이 되어 즐기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반면에 상현은 비루한 수준일지라도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것이 단출한 수준의 절제력일지라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앙의 유무의 차이이다. 본인을 더 이상 신부라고 부르지 말라던 상현은 결국 '지옥'에서 만나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신앙심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쾌락을 추구하며 신앙을 손에서 놓았지만 전락의 파괴력을 체감하고 다시 신앙심을 향유하게 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박쥐>는 쾌락은 전락을 만드니, 신앙으로 부단히 정제해야 한다는 일종의 전도(傳道)적인 영화인가? 물론 종교적 성향이 짙은 영화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박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믿음'이라는 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의식을 밀고 나간다.


라 여사로부터 창발되는 상현에 대한 믿음은 그가 실험에서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라면 강우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그녀에 언사에 상현은 그것은 '느낌'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태주와 상현이 담합하여 강호를 익사시켰을 때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때 태주는 말한다.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강우의 종양이 사라진 것을 보니 영화의 서두에는 이 느낌이 그러니까 맹목적 믿음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세 남녀가 침대에서 뒹구는 죄책감이 물화된 기괴한 쇼트는 느낌인 줄 알았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느낌이 아닌 실체라는 것을 증명한다. 즉, 이것은 '느낌의 오류'에 대한 증명. 느낌이 믿음의 본질이다에서 그것이 틀렸다는 의식의 흐름은 어쩌면 종교적 믿음에 대한 상현의 의식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이것은 감독 본인의 종교적 고뇌의 산물 혹은 흐름일지도 모른다. 즉, 맹목적 믿음은 왜곡된 형태의 신앙심이라는 깨달음. 마침내 그것을 깨달은 상현은 그에게 한 번만이라도 기도를 받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에게 발기된 성기를 전시하며 그들의 비틀린 '느낌'을 파괴한다. 신부로서의 마지막 신앙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는 무력하다. 쾌락의 파괴성도 알고 있고, 종교적 사유도 깊이 했음에도 명징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질문은 더욱 많은 갈래의 질문으로 번지며 목적지 없는 길을 그저 부유하게만 만든다. 쾌'락(樂)'이 아니라 쾌'락(落)'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우리는 밀려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파도를 막아낼 재간이 없으며, 종교로 어떻게든 절제해보려 한들 우리는 영원히 '그렇다면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무려 종교 그 자체가 삶인 신부조차 지옥도에 빠지게 되는 결말로 치닫는데, 어찌 비루한 한 명의 인간이 종교를 통한 절제가 가능하겠는가?


결론적으로 <박쥐>는 무수한 고뇌 끝에 '쾌락의 본질을 밝혀내고, 종교로 쾌락을 다스리려고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불가능했노라'라는 실패적인 답에 도달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무력하고 처연하며 불쾌해진다.




★★★★(별 4개)

쾌'락(樂)'이 아닌 쾌'락(落)', 종교는 답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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