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The Swindlers, 2017년 作)
참 쉽다. 아버지의 죽음, 장례식에 조문객은 한 사람도 없고 덩그러니 좌절해 있는 아들의 모습. 영화 초반의 짤막한 쇼트들로 황지성(현빈)이 복수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확보해버리는 과정 말이다. 뒤에 얼마나 중요하게 할 말이 많기에 처음부터 이토록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자살로 위장된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해서 나는 황지성을 옹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황지성의 첫 등장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아마도 절도 혹은 사기와 같은 죄를 저지르고 달아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목격한 아버지 밤안개(정진영)는 대수롭지 않게 훔친 시계 중 하나를 달라고 말한다. 즉, 그는 아들이 범죄를 벌이는 것에 크게 관심 없는 인물이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서 시계를 바꿔치기하는 행동을 알고 있으면서도 능구렁이처럼 모른 척 하기까지 하니 우리가 오직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부자(父子)로 구성된 가족 사기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물론 죽음이라는 것은 과한 처사이지만) 밤안개와 같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애처로운 얼굴을 한다고 한들, 혹은 황지성처럼 사기꾼들에게만 사기를 친다는 그럴듯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우리는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이런 간편한 당위성 생성은 박희수(유지태)에게도 적용된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르는 자. 여느 한국 영화들에서 보아왔듯 이미 구태에 찌든 윗 대가리들(늘 그렇지만 그들의 직위가 높을수록 당위성은 더욱 강화된다)의 이합집산을 몇 개의 쇼트로 구현하고, 그들 편에 서있는 박희수에게 거대한 권력욕이라는 욕망하나만 심어주면 만사 오케이다. 두 가지 무적의 조합이면 대한민국은 검사가 살인을 하는 데에 일말의 문제가 없는 사회로 변모한다. 도대체 그놈의 금뺏지가 뭐길래.
결말로 향하게 되면 회생 불가할 정도로 가관의 상황이 펼쳐진다. 약 120분의 러닝타임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뒤바꾸는 어쩌면 진정한 반전(反轉). 꾼들은 자신들이 짠 판에 거물이 걸려들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늘 윗분들이 법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겹더 그물을 쳤어야 했다고 판단했나 보다. 힘겹게 자신들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궤멸시킬 적을 판위에 올려놓고서는 결국 몰카와 실시간 동영상이라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허무감 충만한 방법으로 적을 처단한다.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피나는 목소리 변조 훈련의 성공, 몰카와 실시간 동영상, GPS까지 되는 장비들. 꽤 많은 도구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어렵게 판까지 짜야 했을 이유가 무엇인가? 설마 사기꾼은 사기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투철한 직업의식 때문은 아닐 테고. 심지어 황지성은 박희수에게 연장으로 얻어맞기도 하고, 총구가 머리 위에 겨눠지기도 하는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까지 직업정신을 밀고 나가야 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의심을 확신으로만 바꿔주면 된다'라는 사기 철학은 결코 우리를 납득 시키지 못한다.
굳이 이해하기 위해 가정을 해본다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카운터를 날리기 위함 말하자면 희망을 준 뒤에 절망을 줌으로써 좌절감의 낙차를 극대화하기 위함. 그러니까 가히 변태적인 복수 증후군 때문이었다면 살짝 고개가 끄덕여지긴 한다.
<꾼>이 시종일관 걷고 있는 쉬운 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아니 사실 그 이야기 말고는 나에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이어나갈 재간이 없다. 고석동(배성우), 곽승건(박성웅)의 합류. 다시 한번 등장하는 가족 복수극. 같은 적을 둔 자들의 파이팅으로 치장하면 이들의 행보 역시 수긍이 가리라 생각한 것일까?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1년을 감방에서 보내도 무방하다는 무한한 가족애. 1년 동안 콩밥을 먹은, 그러니까 빨간 줄이 그어진 고석동은 이제 반강제적으로 전문 사기꾼이 된 셈이다. 고석동과 춘자(나나), 김과장(안세하)이 등장하는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나머지 두 명은 과거 이력도 등장하지 않기에 차치하기로 하고 고석동만 보자면, 그가 하는 사기행각은 자신의 복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낄낄거리며 짭짤한 수입에 만족해하는 그는 이미 직업 사기꾼으로 분해 있다. 아니 영화는 자기의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을 큰 공감대 형성 없이 사기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모든 원인을 가진 자들에게 돌린 체 한발 뒤로 물러난다.
영화의 이러한 비윤리적인 캐릭터 운용은 이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주얼리숍 주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주얼리숍 주인이 춘자의 몸을 흘끗 쳐다보는 장면을 삽입하여 대한민국에서 쉽게 공분을 일으키고 감정이 한쪽으로 흐르기 쉬운 성희롱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 '이 녀석은 사기를 당해도 싼 놈'으로 만드는 얄팍한 재기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들의 악행이 끝날 때쯤 영화의 리듬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차 안에서 고석동과 김과장은 라임 섞인 만담을 시작하는데, 케미라기보단 불협화음에 가까운 이들의 재롱은 영화와 결코 조응하지 못한다.
<꾼>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캐릭터들도 묵살한 체 오로지 쉬운 길로만 내달렸나?
반전, 반전 그리고 반전. <꾼>은 반전의 지뢰밭을 걷는 영화이다. 일정 부분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감추고 플래시백과 상황 재구성을 통하여 한꺼풀 한꺼풀 양파 같은 속살을 우리에게 내비치는 영화. 오로지 그것만이 미학인 영화. 보는 이의 통수를 지속적으로 후려갈기는 꾼들의 사기의 화살은 사실상 관객에게로 향해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어떻게 흐를지 알기는 쉽지 않다. 반전을 위해 꾸며놓은 설정들은 굉장히 진부하지만, 이 영화의 흐름 자체가 진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미학은 '그래 나 반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뭐?'라는 당찬 한마디면 물거품이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반전이 감흥을 일으키면 모두 다 설명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반전을 통해 자신이 모른척하고 지나간 구멍들이 메꿔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황지성이 박희수에게 처음 잡혔을 때, 몇 대 얻어맞자 아버지의 복수를 운운하며 자신이 벌이는 일에 자로부미(子路負米)의 감성이 녹아있다는 것을 입 밖으로 말할 때는 미쳤나 싶을 정도로 이 영화가 편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황지성이 진정으로 노린 자가 누구였나라는 정보가 전달되기 시작하면 그가 일부로 정보를 흘린 것이구나라고 납득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커버 쳐줄 수 있는 장면은 이 정도다. 득보다 실이 배로 많다. 감독은 아마도 모든 구멍들이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상한 부심은 영화를 헐겁게 만들어 놓았다. 인어도 통과할만한 그물망의 간격.
'반전(反轉)'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면에서 쉽게 가려 하다가 어설프게 판 만 크게 벌린 영화. 완전히 빠져버린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늪.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목소리 변조 훈련과 위장술, 각종 최첨단 장비를 가지고 굳이 일을 힘들게 벌이는 이들이 참 애석할 따름이다.
★★ (별 2개)
결국엔 몰래카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