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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r 11. 2018

영화의 맨살

인간 증발(A Man Vanishes, 1967년 作)


영화의 맨살 - '인간 증발(A Man Vanishes, 1967년 作)'


증발해버린 남자 오시마 타다시(오시마 타다시)의 가족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고향집 안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아마도 이때부터 였을 것이다. 이 영화의 기묘한 정서가 부유하기 시작한 것이. 무녀, 할아버지, 어머니로 이어지는 클로즈업. 비스듬히 혹은 어깨너머로, 과감하게 동시에 은근하게 인물들에게 밀착하는 카메라. 마치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겠다는 듯, 너희들의 내면을 들춰보아야겠다는 듯 오롯이 프레임 안을 각 인물들의 얼굴로 가득 채워 놓는다. 츠유구치 시게루(츠유구치 시게루)는 오시마의 어머니에게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화면을 그녀의 얼굴로 가득 채운 체 오롯이 그녀만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왠지 그녀와의 문답을 통해 오시마의 행방을 찾으려 한다기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그녀의 내면 속 반작용 포착하기. 자식의 행방이 묘연해진 상황에 직면한 여인에게 다소 배려 없는 듯한 실험적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상당히 이질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녀의 인터뷰가 종료될 때쯤 난데없이 시,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의 인터뷰가 인서트 된다. 인터뷰이(interviewee)는 오시마의 할아버지에 관련된 과거 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 직후 다시 집안으로 돌아온 카메라는 이번엔 오시마의 할아버지에게 은밀하면서도 저돌적인 클로즈업으로 접근하여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를 골똘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 감흥이지만, '객관성'이 미학인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묘한 '주관성'은 무엇인가? 조금 더 거친 의미로 나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인간 증발>은 상당히 '영화적'이다.


'나는 편집된 영화요!'라는 일종의 자기고백적 선언은 점점 더 노골성이 짙어지는데, 오시마의 약혼자 하야가와 요시에(하야가와 요시에)와 키미코(키미코, 오시마가 동경으로 상경해 관계를 맺은 애인)와의 대화를 떠올려 봐야겠다. 인터뷰로 시작해 사실상 서로에 대한 비방으로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그들의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오지만 어느덧 화면은 요시에가 거리를 따라 내려오는 모습으로 전환되어 있다. 이때 (아마도 제의(祭儀)를 하는 듯한) 무녀의 뒷모습을 비추는 쇼트가 급작스럽게 밀고들어 오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영화는 일종의 '소격효과'를 발생시킨다. 같은 맥락으로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사요(사요)와의 첫 대화의 시퀀스에서는 일순간 카메라를 정반대로 돌려 촬영을 하고 있는 스텝들을 비추기에 이른다. 인물들 사이에 작용하는 '의심'이라는 감정에 우리가 몰입을 할 때쯤, 또 한번 밀고 들어오는 낯설게 하기.


'영화임을 인지하라'라는 이 영화의 괴작스러운 미학에 혼란스러울 때쯤, 영화는 한 번 더 요시에와 사요 자매를 한 공간으로 몰고 들어간다. 이때 창밖의 카메라는 방안으로 들어오고 급기야 그들의 대화 속에 침입하여 상상선을 넘나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마치 극영화를 찍듯 이 시퀀스를 여러 테이크로 찍었다는 뜻이 된다. 즉, 현장감, 지금 이 순간의 정서가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조차 <인간 증발>은 편집이라는 조작을 가하고 있다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교환원의 인터뷰가 '플래시백'이라는 작법으로 침입해 오는데, 이때 이들은 마치 이 과거 시점이 이곳에 들어올 것을 알았다는 듯 그러니까 편집점을 사전에 완벽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듯 대화를 진행하며 다큐멘터리로써는 가히 자포자기적 결말로 치닫는다. 마침내 사요와 오시마를 목격했다는 생선가게 주인이 등장하며 이 공간이 완전한 혼돈의 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영화의 자기 파괴가 사실상 붕괴의 영역으로 근접해가던 순간 이들은 감독을 호출한다.


'세트 준비해!' 공간은 세트임을 드러내며 해체되고, 카메라는 페이드아웃되어 <인간 증발>은 자신의 세계의 조작성을 확실히 시인하기에 이른다. 감독조차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픽션이다" "오시마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다"



"사실을 파악하게 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감독이 좇고 있던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진실로 향하는 궤적에서 포착된 오시마에 대한 평판을 취합해볼 필요가 있겠다. 온순하다. 예의가 바르다. 열의가 없다. 돈을 흥청망청 쓴다. 회사 돈을 횡령했다. 바람을 피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등. 일반적인 통념 속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본다면 나열한 문장들에서 포착되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의 공존을 한 인간에게 대입시키는 것은 다소 이질적인일 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영화 밖의 우리 혹은 우리 옆의 인간들로 적용시킨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직면한 상황, 사회적 위치, 눈앞의 대상 등에 따라 다변화하는 존재이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의 눈앞에 있는 타인의 모습은 여러 갈래의 가면 중 단 몇 가지만이 발현된 모습이라는 뜻이고, 이것을 조금 비약적 관점으로 표현하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계를 맺는 순간 무조건적으로 어느 정도의 거짓을 깔고 있다는 논리가 된다. 말하자면 조작된 형태 그 자체가 오히려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뜻.


오시마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던 글의 서두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다. 무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무력감, 아들의 행방불명이라는 개인적 비감, 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를 여인에 대한 미안함, 그 와중에 농담을 던지는 아이러니함까지. 여러 층위의 감정이 동시에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 자체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방증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시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언니까지 의심해가면서 그의 뒤를 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츠유구치 시게루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요시에의 내면도 위의 논지와 궤를 같이한다. 이것은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이다.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궁무진한 방은 결코 명징하지 않고, 길항작용을 일으킬 것 같은 여러 방의 문이 동시에 열려있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의 껍데기 이면의 무저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간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불가해한 측면이 오시마가 증발해버린 결정적 이유라고 할 수 있으며, 오시마를 추적하여 인간들이 증발하는 이유를 찾겠다고 나서는 감독의 지향점은 인간이란 존재의 심연을 파악해보겠다는 다른 말이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찾고자 하는 진실은 바로 인간 자체이다. 이때 <인간 증발>은 영화라는 예술로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악전고투하는 일종의 실험작으로 기능한다. 



장 미트리는 '이미지란 실존이자 본질 자체인 '실재 이미지'이자, 주체의 정신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정신 이미지'라고 하였는데, 말하자면 의자라는 사물은 의자 자체의 물리적 실재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이미지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뜻이다. 즉,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의자는 다르고 조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약적 논리임이 다분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 증발>은 세상 속에 놓여있는 '인간'이라는 일종의 이미지를 미트리의 논리의 맥락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외연적으로 <인간 증발>이 표방하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장르 특유의 객관성으로 보건대, 인간 존재의 실재적임을 포착하는데 어쩌면 가장 적합한 장르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오시마와 관련된 실존하는 인물들만이 등장할 뿐 결코 영화가 가공한 캐릭터들이 위치할 곳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스크린이라는 미묘한 경계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최대한 정제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 증발>은 편집이라는 조작성을 드러내면서 극 영화로서의 형식 또한 내포하고 있는데, 언급했던 요시에가 그녀의 언니와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는 아수라적 시퀀스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아야겠다. 이 시퀀스 바로 직전에 붙어 있는 장면에서는 사요가 오시마를 독살했다는 무녀의 발언이 등장하고, 이를 듣고 있는 요시에가 포착되어 있다. 이 순간 만약 우리가 사요에게 의구심을 품게 된다면, 이것은 오롯한 우리의 감정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분명히 플롯의 배치라는 영화적 조작이 작용하고 있다. 즉, <인간 증발>은 영화만의 기능들을 통하여 우리가 각 인물들을 의심하고, 동조하며, 비난하는 등 다각적으로 그들을 지각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인간 증발>은 이런 양가적인 형식을 통하여 실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물리적 실재를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그 인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교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외피와 내피를 내밀하게 탐험하고 있는 영화.


일견 이와 같이 '영화'의 기능을 철저히 분석하고 고찰하여 사용하고 있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방법론이라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카메라의 기계적 지각 능력은 분명히 우리의 비루한 눈보다 더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상황과 현실을 포착 가능하니 카메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예술은 인간의 주관적인 관찰 능력보다는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든 등장인물들 또한 결국엔 카메라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미세한 정도일지라도 모두 '의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오롯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절연점을 발생시키는 것이며, 모든 인물들을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드는 맹점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본질적으로 한번 조작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 겹 더 조작하는 셈이 되는데, 그때 발생하는 미묘한 균열까지는 영화가 절대 벗겨 낼 수가 없다. 이 지점에서 <인간 증발>은 '영화로 인간을 꿰뚫겠다'라는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진실을 좇는 궤적만 존재할 뿐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 형용모순적 실험이면서 진실을 탐닉하다 보니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 증명하는 실패한 실험으로 귀결된다. 결국 슬레이트를 치며 영화가 종료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후에, 그러니까 이제부터 현실이라는 것을 선포한 후에 '영화는 끝나지만 현실은 아니지'라는 멘트를 하며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정신으로 고군분투하던 영화는 결국 자신의 한계만을 노출하며 완전히 발가 벗겨진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러한 기행 속에서 드러난 '영화의 맨살'은 결코 외설적이지 않다. 이 실패는 심히 우아하다. 




★★★★★ (별 5개)

실패를 통해 드러낸 우아한 영화의 맨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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