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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y 20. 2018

궤적의 웨스턴

믹의 지름길(Meek`s Cutoff, 2010년 作)


궤적의 웨스턴 - '믹의 지름길(Meek`s Cutoff, 2010년 作)'

길잡이 스테판 믹(브루스 그린우드)의 인도에 따라 청운의 꿈을 품은 세 가족은 서부로 떠난다. 그러니까 그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동선에 내포된 필연적 방향성 때문일까? 혹은 서향(西向)이라는 웨스턴 장르의 기원적 특성 때문일까? 영화가 시작하면 그 누구의 대사도 등장하기 전에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포착되는 것은 프레임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며 강을 건너는 이들 무리이다. 강을 건넌 후 잠시 여독을 푼 이들은 또다시 서쪽 길로 한걸음 발을 옮기는데, 이때 <믹의 지름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버랩'이라는 영화적 작법이 등장한다. 서서히 사라지는 직전에 건너왔던 강, 살며시 등장하기 시작하는 지금 걷고 있는 황량한 서부의  벌판. 사라지는 과거의 순간과 나타나는 현재의 순간의 공존. 이 순간은 과거와 현재라는 서로 다른 두 시점이 중첩되는 순간이다. 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은 무엇인가?


후에 밝혀지는 것은 이들은 서부의 어느 계곡에 정착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에서 시작하여 물이 있는 장소로 가야 하는 이들의 행보. 그렇다면 마치 그들이 방금 건너온 강으로 다시 향해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오버랩의 장면은 서쪽에 있는 물을 향해가는 이들의 로드무비에 대한 일종의 예견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비약적 의견을 좀 더 밀고 나가, 영화의 시작에서 오버랩의 장면까지를 '예견의 시퀀스'라고 규정한다면 강을 건넌 직후 썩은 나무에 'LOST'라는 단어를 박박 새기는 토마스(폴 다노)의 불가해한 저의는 이 무리가 곧 길을 잃을 것이라는 예언의 각인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믹의 지름길>은 서쪽으로 물을 찾아 떠나는 일행이 길을 잃을 것이라는 결론을 밝히며 이야기로 들어가는 영화가 되는 것이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감흥을 무화(無化) 시킬지도 모르는 이러한 대담한 선전포고는 이들의 행보는 결과보다 궤적이 중요하다는 다른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의 궤적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사실 믹의 지름길은 애당초 패색이 짙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단 하루도 체 지나지 않았는데 일행들은 믹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며 쑥덕쑥덕 거리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좌향이라는 명징했던 동선은 슬슬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보란 듯이 바람을 보내 글로리(셜리 헨더슨)의 옷을 이들의 동선의 반대 방향(좌에서 우)로 보내는데, 마치 프레임 우측 끝으로 그녀를 몰아내며 프레임 밖으로 이탈시키려는 듯한 영화의 태도는 이들의 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서히 긴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결국 이들의 이동 방향은 프레임 속에서 남향(南向), 북향(北向) 심지어 동향(東向)으로 매 쇼트에서 변주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기존 서부극과는 다른 스탠더드 프레임의 카메라는 탁 트인 전경에 놓인 인물들을 담아내기보다는 프레임에 압박된 인물들을 비추며 인물을 제외한 빈 곳을 모래와 바위로 채워 놓았을 뿐 이곳이 미국의 황량한 서부라는 것은 이들의 대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알칼리수에 도착할 때쯤 믹의 지름길은 완전히 실패로 귀결된다.


바로 그 다음날, 그러니까 믹의 지름길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직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인디언(로드 론듀스)이 등장하는데 영화의 러닝타임이 거의 절반을 지날 무렵 그는 투표에 의해 길잡이의 위치에 놓이게 되며 믹의 대체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의 남은 절반은 인디언의 지름길이 된다. 정확히 절반의 점유율을 갖게 되는 두 명의 인물. 영화는 미국인(미국의 동부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영국에 독립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부를 향해 영토를 개척해 나가던 이른바 '서부 개척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미국인과 원주민인 인디언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타오르던 시대. 즉, 시대적 맥락으로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믹과 인디언은 완전히 반대의 좌표에 소속된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외향에서부터 보란 듯이 대조되고 있는데, 과하게 기른 수염에 흑마를 탄 믹, 수염 한 톨 없는 미끈한 얼굴에 백마를 탄 인디언.


이때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이들 사이에 껴있는 일행들은 원주민에도, 미국인에도 속하지 않는 미국에 새롭게 건너온 '이민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은 미국 대륙에서 벌어지는 영국, 미국인, 원주민 사이의 메커니즘과는 전혀 무관한 '외부자들'이라는 뜻. 믹의 지름길이 어그러질 때쯤, 솔로몬(윌 패튼)은 북쪽으로 가면 일행과 합류할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미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회귀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딘가 뿌리내리고 있는 고색창연한 향수병을 자극하는 일종의 '고향'이 아니라 늘 움직이고 있는 행방이 묘연한 이동하는 '무리'라는 뜻이 된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까마득하고 뒤로 돌아가자니 정착할 곳이 없는 그들. 이들의 서쪽 행은 '가야만 하는' 길이면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러니 <믹의 지름길>은 그 옛날 인디언들을 몰아낸 미국인이 왜곡된 우월주의를 뿜어내던 개척 정신 물씬 풍기는 고전 웨스턴도 아니요, 진정한 원주민은 인디언이었다는 반성적 어조가 깃든 수정주의 웨스턴도 아니다. 이 영화는 두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외부자들의 웨스턴'이다.




행보가 진행될수록 믹의 영향력은 점점 표백되어 가고 인디언의 영향력이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한다. 대립된 가치관이 뒤섞이니 태도는 혼재하고, 사고는 모호해진다. 에밀리(미셸 윌리엄스)는 인디언에게 맹목적 믿음을 내비치지만, 밀리(조 카잔)는 나무를 발견한 순간까지도 아직 돌아갈 수 있다며 맹목적 불신을 표출한다. 감정적으로 흐르던 양가적 가치관은 끝내 이중적인 종교관으로까지 발현하는데 주님에게 기도를 하면서 웃기도 하던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인디언의 제의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니 말이다. 일종의 혼종의 상태. 말하자면 이들의 궤적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지리적 의미의 이동이 내포되고 있으면서, 동부인 믹과 서부인 인디언 혹은 미국인 믹과 원주민 인디언 사이를 오가는 정서적인 교류가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서두에 <믹의 지름길>의 궤적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즉, <믹의 지름길>은 외부자들의 웨스턴이자 '궤적의 웨스턴' 이기도 하다.

어느덧 궤적은 끝에 도달한다. 아니 궤적은 끝나지 않았지만, 영화는 막바지에 도달해 있다. 결국 일행은 끝까지 가보자 의견을 모으고, 불신 가득했던 믹조차 솔로몬과 에밀리를 따르겠다고 고개를 숙인다. 이때 믹을 비추던 화면은 에밀리로 전환되고, 다시 나뭇가지의 구멍을 통해 보이는 인디언으로 흐르는데 말하자면 에밀리의 원 쇼트를 앞뒤로 믹을 바라보는 에밀리의 시점 쇼트와 인디언을 바라보는 에밀리의 시점 쇼트가 놓여있다는 뜻. 어느새 일행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한 에밀리는 믹과 인디언의 연결고리가 되었다는 영화적 작법인 것인가? 이들의 궤적은 믹과 인디언으로 대표되는 이분화된 미국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뜻이냔 말이다.


영화는 여기서 종료된다. <믹의 지름길>은 궤적만이 부유할 뿐 저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끝내 포착되지 않는다. 결국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시점을 관통하던 오버랩의 장면에서처럼, 이들은 미국의 과거였던 인디언과 미국의 현재인 믹 사이에서 궤적을 긋고 있었다. 과연 이 궤적은 성공으로 귀결되었을까? 이제 미국인 믹은 원주민 인디언을 조금은 신뢰하게 된 것 같다. 이 신뢰가 확신으로 바뀔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언급은 영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이들의 미래는 훗날의 미국의 역사가 설명해줄 것이라는 듯이.




★★★★☆ (별 4개 반)

횡으로 관통하는 궤적의 웨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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