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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언니 백예진 Apr 26. 2024

나를 키운 팔 할은 자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서울에서 태어나 쭉 자란 토박이로 오해한다. 시골 생활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서울 촌년’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의 절반을 시골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무렵까지 살았으니 꽤 긴 시간이다. 다시 돌아가자면  망설여지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너무나 많다. 그 시절 내가 몸 담았던 자연 속 많은 것들이 나의 삶과 지금 하고 있는 일까지 내 인생의 모든 범위에 걸쳐 있는 듯하다.



경기도 파주. 어딜 둘러봐도 드넓은 논밭만 있었던 동네. 우리 집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조립식 주택이어서 높은 시야로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망루 같았다. 내려다본 마을에는 아주 드물게 공장 몇이 있었고, 이외에는 논밭뿐이었다. 평소에는 길가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간간히 공장을 들락거리는 차 몇 대가 내는 소리만이 인간이 만드는 소리의 전부였다. 물론 봄이면 모를 심는 기계와 장화 신은 아저씨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봄이 좋았다. 온통 연둣빛으로 물든 식물들, 특히 논물에 떠 다니는 개구리밥들이 좋았다. 대체 어디서 생기는 건지 알 수 없지만, 4월이 되면 어김없이 개구리밥이 둥둥 떠 와서 논을 가득 메웠다. 그게 봄이 왔다는 신호 같아서 좋았다. 





논 구석의 물을 종이컵으로 퍼올리면 잔뜩 있는 개구리알들도 또렷이 기억난다. 논을 지나갈 일이 생기면 종이컵을 항상 챙겨서 개구리알을 관찰하곤 하는 게 일과였다. 가축학을 전공한 아빠 덕인지 나는 어릴 적부터 동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탐구 생활 삼아 여러 가지 이끼들을 방학 동안 키워서 실물을 방학 숙제로 가져가기도 했고, 개구리밥과 알을 종이컵에 한가득 떠 가서 친구에게 보여 주기도 했고, 직접 개구리 잡기도 곧잘 했다. 개구리가 징그럽거나 꺼려지지 않고 친구 같았다. 우리 집에는 손수 제작한 어항도 있었다. 벽돌로 쌓아 올리고 비닐을 감싸 두른 어항 속 조명 색을 엄마는 계절마다 바꿔주었고 우리는 어항 꾸미기를 즐겨했었다. 시간대별로 다르게 들려오는 동물 소리에도 귀 기울여 집중하곤 했다. 새벽 5시에는 뻐꾸기 소리를, 대낮에는 꿩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동물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또 봄에는, 마당에 잔뜩 핀 꽃들을 가져다가 엄마랑 꽃꽂이를 했다. 개나리를 담장에 옮겨 심어 꽃담장을 만들기도 했다. 개나리는 뿌리째 옮겨 심지 않고 가지만 잘라 심으면 어디서나 잘 자란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산수유가 지천으로 핀 날엔 엄마를 도와 산수유를 한 아름 품에 안고 와서 교회에 가져다 놓을 꽃다발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봄이 지나가면 어느새 알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개굴개굴, 목청이 터져라 우렁차게 우는 여름이 찾아왔다.



매년 돌아오는 여름도 좋았다. 방학이 되면 집 뒷산의 원두막에서 하루종일 수박도 먹고 누워서 뒹굴거리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도 읽고 방학 숙제도 했다. 산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공터가 뜬금없이 있었는데, 어린 나는 늘 그곳을 우주선이 정착한 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동생과 공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동네는 고요했지만. 나와 동생은 산과 들, 마당에서 항상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했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매일매일 감지했었던 그 시절을 다시 되새겨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입춘을 글자가 아니라 온몸의 감각과 눈앞에 보이는 장면으로 느꼈던 시간들. 정말로 언 땅이 살살 풀어지는 게 눈으로 보이고 콧속으로 봄내음이 훅 끼치던 순간. 반대로 서리가 낄 즈음의 겨울 공기와 온도, 내 방 창문으로 불어오던 안개의 짙은 정도와 냄새, 안갯속에서 울려 퍼지는 뻐꾸기 소리, 밤새 귀를 쩌렁쩌렁 울려대던 개구리 소리, 한여름의 뙤약볕, 한겨울에 전나무를 베어다가 꾸몄던 크리스마스 트리, 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냇가에 앉아 도시락을 나눠 먹던 기억까지 내가 느끼고 기록했던 모든 자연의 장면들이 나의 오감을 이루고 있다. 



자연광과 빛 그림자를 활용한 설계



아마 지금 나의 모든 작업물에 이끼, 나무, 꽃 같은 식물들과 자갈, 돌, 햇볕 같은 자연의 요소가 어디에든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 같다. 시골의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구하기 쉬웠던, 계절이 변할 때면 또 다른 모습으로 내 곁에 함께해 준 친구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떤 작업이든 준공이 끝나면 각종 식물을 가장 먼저 세팅한다. 이 작은 행위가 나를 둘러싼 공간을 얼마나 풍성하고 완성도 높게 만들어 주는지 몸소 배운 덕에 놓치지 않으려 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천안 메디그린 한방병원 플랜테리어
평창동 소우주 야외 정원 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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