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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호 Apr 11. 2024

어머님이 좋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힘들지만 저도 좋네요

설 전날 아침이 되었다.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최소한의 음식만 준비하리라 다짐을 했다.

뭐부터 해야 할까? 순서를 어떻게 해야 힘들지 않고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침을 드신 어머님은 늙은 호박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오늘 내가 할 일이 있제"

"아 그거요? 지금 하시게요."

"지금 하지 뭐 할 일도 없는데"


고모가 농사지어 보낸 늙은 호박을 깨끗이 씻어 쪼개서 어머님 긁으시기 편하게 해 드리고 담을 그릇을 준비해 드렸다.

"어머님 하고 계세요. 떡 찾아올게요"

"그래 댕겨온나"


주문해 놓은 떡과 튀김을 찾으러 시장에 왔다.

육전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손이 많이 가고 명절에 튀김이 빠지면 허전할 것 같아 미리 주문해서 육전을 대신하기로 했다.

다녀오니 어머님은 제법 호박을 많이 긁어놓으셨다.

남편에게 호박을 비닐에 담으라고 얘기하고 부엌으로 가면서

"어머님 호박 형님이랑 동서도 주면 되겠네요."

"그래라"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식 준비를 하나도 못했는데 점심도 챙겨야 하니 한 가지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또 뭘 먹나? '빨리 나물을 하고 동그랑땡 구워서 먹으면 되겠다.'

뭐부터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서둘러 나물을 시작했다. 무를 썰어서 콩나물과 같이 넣고 소금을 살짝 뿌려서 뚜껑을 덮는다.

살짝 익으면 설탕, 참기름을 두르고 골고루 섞어두고 불을 줄인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시집와서 제사 음식으로 어머님께 처음 배운 무랑 콩나물 하는 방법이다.

친정에도 제사가 있었지만 배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집가면 다 하는데 미리 하지 말라던 친정엄마의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젠 세월이 흘러 눈 감고도 척척하는 25년 차 주부가 되었다.


시금치, 고사리, 무나물, 콩나물 네 가지 하면서 탕국을 같이 끓였다. 탕국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명절에 탕국을 끓여주던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끓이게 된다. 그 맛이 나지는 않지만 그리운 맛이다.

아무리 안 한다고 해도 상에 차릴 것은 있어야 하니까 동그랑땡을 굽고 잡채도 했다. 떡국에 올라갈 고명도 준비했다.

튀김을 하지 않으니 음식을 안 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간단하게 한다고 해도 다 하고 나니 저녁 먹을 때가 되어갔다.


제사가 없는 설명절당일 아침은 조용했다.

다들 점심때쯤 올 것 같기는 했다. 연락은 둘째 형님만 점심때쯤 올 것 같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연락이 없었다.

일찍 떡국 끓일 다시물을 준비하고 떡국 떡도 물에 담아두었다.


"막내는 2시쯤 온다더라"

도련님 전화를 받은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점심을 먹고 올 건가 보네요?"

"그건 모르겠다."


그럼 둘째 형님네 점심만 준비하면 되겠다고 여유롭게 있었는데 11시 30분쯤 어머님 전화기가 울렸다.

큰 아주버님이 12시 10분에 도착한다는 전화였다.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오신다는 전화를 하셨다. '곧 도착하시겠네 점심을 준비해야겠구나'생각하고

가스불을 올려 떡국 끓일 준비를 했다.

그 사이 둘째 형님네가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큰 아주버님 좀 있으면 오신다니 같이 먹어요."

"그래요. 기다렸다가 같이 먹어요."


떡국은 계속 끓여 퍼지고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결국은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떡국은 퍼져서 떡이 되어가고 차가 밀려서 큰 아주버님은 1시쯤에 도착했다.

큰 아주버님이 도착하니 어머님도 일어나서 이거 저거 더 가져오라고 하셨다.

떡국이 퍼져서 정신없는 나는 떡국떡을 빨리 넣었다는 후회를 하고 있는데 딩동 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2시에 온다던 도련님네가 왔다.

내가 정신없어하는 사이 형들이 다 왔으니 빨리 오라고 어머님이 전화를 했다.

'그냥 오는 시간에 오게 하시지 어머님은 왜 전화를 하셔서 떡국도 없는데' 혼자 생각했다.

계산착오다. 형제들이 다 모일 줄은 몰랐다. 떡국떡도 15인분만 준비해서 도련님네가 먹을 게 없었다.

"점심 드셨어요?"

"안 먹었어요,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해서 세수만 하고 왔어요."

"어떡하지요 떡국도 없고 밥도 없는데"

"괜찮아요 아무거나 먹지요."


도련님 가족이 떡국을 못 먹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잡채와 튀김은 더 내어오고 그렇게 설명절의 점심은 지나가고 있었다.


손자손녀는 줄 서서 차례로 세배를 하고 어머님은 준비한 세뱃돈을 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갈 줄 알았는데 5시쯤 모두 일어나서 가셨다.

한바탕 많은 사람이 밀려왔다 썰물처럼 나가고 나니 집은 다시 고요해졌다.


남은 음식은 칠 동안 우리 가족이 모두 먹어야 했다.

이번 명절을 보내며 음식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각자 음식을 해오자는 말은 정신이 없어하지 못했다.


"어머님 다 같이 보니 좋지요?"

"그럼 좋지 안 좋나 니도 니 새끼들 보면 좋지 나도 그렇다."

"내일은 오후에 누나 온단다."

"네 오후에 오시라 하세요."


어머님이 좋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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