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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은 Jul 28. 2015

시간의 손길이 가장 가볍게 스친 곳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기반으로 꽃피운 이슬람 문화는 세비야와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의 남부 도시에 깊고 짙은 흔적을 남겼다. 이슬람 문화 유산이 가차 없이 훼손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왕조가 물러나고 난 후에도 파괴나 개조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신비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에 휩싸인 궁전에 어느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미국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는 '시간의 손길이 가장 가볍게 스친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의 모태가 되었을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곳으로 스페인을 여행하며 꼭 둘러보아야 할 세계문화유산이다. 알함브라 궁전에 입장하면 나스르 궁전과 요새 알카사바, 카를로스 5세 궁전과 파르탈, 헤네랄리페 등 왕궁의 복합체를 둘러볼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하이라이트인 나스르 궁전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정해진 시간에만 입장을 할 수 있도록 입장객 수를 조절한다. 넉넉하고 조용하게 궁을 둘러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긴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본다.


나스르 궁전에 입장하기 전 절벽 위에 우뚝 선 알카사바에 먼저 들렀다. 언덕에 위치한 궁전을 지키는 병사들이 기거하던 요새이자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였던 알카사바. 시대가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해낸 천연 요새는 현대의 관광객들에게 그라나다의 전경을 굽어볼 수 있는 근사한 전망대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알카사바를 나서 나스르 궁전에 입장하는 긴 줄에 선다. 표에 적힌 입장 시간을 보여주고 게이트를 통과해 나스르 궁전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안뜰을 둘러싼 정교한 이슬람 문양과 균형 잡힌 구조가 입장객들을 한 걸음 한 걸음 신비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인다.


오목한 원추형 공간이 층층히 쌓여 벌집이 흘러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천장 장식에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올려다 보았다. 이슬람은 엄격한 율법에 따라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장식을 금하고 있어, 벽과 천장과 바닥은 경전의 문구나 자연의 모습이 기하학적 문양으로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유난히도 물이 풍요로운 곳이다. 건조한 아프리카 북부에서 건너온 무어인들에게 물은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었다. 세고비아에 거대한 수도교를 세운 로마인들 못지않게 무어인들은 물을 사랑하고 숭배했다. 그들이 얼마나 물을 귀하게 여겼는지는 알함브라 궁전의 정갈한 연못, 그 위로 깨끗한 물을 쏟아내는 분수, 계단 난간의 홈에 낸 수로에 찰방찰방 흐르는 물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이곳의 물은 단순한 장식의 수단이 아니라 건조한 겨울에는 천연 가습의 수단으로, 무더운 여름에는 천연 냉방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안달루시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는 1492년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이슬람 왕족들은 알함브라 궁전을 내주고 그라나다를 떠나며, "스페인을 두고 가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알함브라를 다시 못 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며 눈물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알함브라는 한 평생 살다가 떠나면서도 아쉬워 눈물짓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죽했으면 그라나다에서는 장님으로 태어난 것만큼 불운한 생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세시대에 태어났다면 해질녘 석양에 붉게 물든 아름다운 궁전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동경만 했겠지만, 시대를 잘 타고 난 덕분에 몇 푼의 입장료(조금 비싸긴 하지만)를 내고 한나절 알함브라 궁전을 거니는 사치를 허락받았다.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을 등지고 언덕을 내려올 때는 그러한 사치를 허락한 시대에 감사하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이 포스팅은 <올라! 스페인>의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올라! 스페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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