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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Apr 14. 2018

디자인을 하려면 달을 보자

디자이너들이라고 해서 모두 디자이너인 것은 아닌 이유

에피소드 1. 예전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또 하겠습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신학수 교수님께서 하루는 디자인을 왜 디자인이라고 하는지 아느냐라고 질문은 던지셨습니다. 대개, design은 불어 dessin, 즉 데상 (소묘)에서 유래한 말이라고들 알고 있었거든요. 대부분의 디자인 작업이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을 때였고, 또 디자인 학교에 입학을 하려면 데상 실기 시험을 보고 들어가던 때여서 design = dessin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한데, 신 교수님의 말씀은, design은 de-sign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sign, 즉 약속이라는 단어 앞에 뒤집는,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의미인 de를 붙여서 ‘우리가 익숙한 것을 바꾸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라는 설명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디자인은 더 예쁘고 더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 것은 다 신학수 교수님 덕분입니다.


에피소드 2. 어린 아들을 축구팀에 넣었더니 고만 고만한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기보다는 공 따라 우르르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더군요. 수비와 공격, 작전, 패스 뭐, 이런 건 없고 다들 공만 바라보고 따라다니는 거지요. 소위 싸커 맘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열심히 응원을 해 대구요. 대략 이런 모습이 어린 아이들 축구하는 곳곳마다 펼쳐지는건 이해되는데, 똑같은 모습이 디자이너들 사이에도 펼쳐지는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탄은 이정의 문월도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화가인 탄은 이정의 문월(問月)이라는 그림입니다. 간송미술관의 백인산 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달빛이 으스름하게 빛나는 산허리, 소담하게 솟아 오른 바위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고사(高士)가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고 있다. 도포 한 자락만 걸친 듯 입고 있을 뿐, 더벅머리와 맨발의 격식 없는 모양새에서 탈속한 삶이 묻어난다. 그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야윈 눈썹달도 소탈한 듯 청아한 모습이 고사를 닮아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고사의 얼굴에는 발그스레 홍조가 번져가고 천진한 미소가 가득하다. 세외(世外)의 이치를 깨달은 희열일 것이다.” (경향신문)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도 달이 등장합니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므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고 팔만대장경의 문자 속에는 부처가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자성을 깨쳐야 한다.” 성철 스님은 자신의 법어집 머리말에도 이렇게 적었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할 때에 그냥 말로만 "달을 보라" 하면 사람들은 잘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달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을 보라"라고 말함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주면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고개를 들어 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때에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법(佛), 곧,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法門)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말과 문자를 쫒느라고 그에 얽매이는 일이 없이 궁극의 목표인 저 달, 곧, 불법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납니다. (아마도) 성철 스님이 야단법석 (野壇法席. 절 마당에서 여는 법회) 도중에 저 하늘의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회중들이 다 스님의 손가락만 쳐다 보더라는 거지요. 스님 왈,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고. 제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 야단법석에 모인 회중 같습니다. 손가락만 보는 거지요. 달은 쳐다볼 생각도, 능력도 안 되는 겁니다. 이런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것이래야 뻔합니다. 남들이 이미 만든 것을 또 만드는 거지요. 신학수 교수님의 시각을 빌자면, 이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안 한 겁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거지요. 아마 디자인이 뭘 하는 건지 제대로 안 배운 탓도 있을 겁니다. 이런 “디자이너”들이 만든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상당수는 꽤 성공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디자인을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 굳이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건지도 모르고요.


아래 글은 애플이 디자인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달과 손가락에 대한 이야깁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애플은 전화기 시장에 아주 늦게 뛰어 들어왔습니다. 모토로라, 노키아, 블랙베리, 삼성, LG 등의 기업들이 예전의 손 전화기 시장에서 PDA (Personal Digital Assistant)로 시장을 확대하고, 이를 다시 스마트 폰이라는 업그레이드된 시장으로 만든 후에도 꽤 한참 후에나 전화기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애플도 Newton Message Pad라는 모델로 Palm Pilot이 독식하던 PDA 시장에서 자리를 잡으려다 결국 실패하고 접은 경험은 있지만, 그때는 전화기로써의 PDA는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스마트 폰의 대표 기업들은 디스플레이 반, 키보드 반의 스마트 폰들을 앞다투어 개발하고, 디자이너들은 더 예쁘고 인간공학적인 키보드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일했습니다. 정말로 다양한 모델들이 만들어졌었지요. 아래 사진들을 보면 더 예쁘고 쓰기 좋은 키보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보입니다.

키보드가 달린 스마트 폰들


그 바닥에 느닷없이 애플이 들어온 겁니다. 그전까지 MP3 플레이어인 iPod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iPod은 독특한 다이얼 형태의 유저 인터랙션으로 워낙 독보적인 인기를 누려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 만드는 전화기라면 iPod을 능가하는 수준의 입력 장치가 달렸을 거라고 추측을 했었을 겁니다. 한데, 정작 아이폰에는 물리적인 입력 장치인 키보드가 아예 없었습니다.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터치 스크린 키보드만 있었던 거지요.

Apple iPhone 6


사람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불편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물리적인 키보드에는 작은 돌기가 있어서 키보드를 보지 않고도 전화를 걸 수 있었었는데, 이게 불가능해진 겁니다. 아마 기존의 스마트 폰 회사들은 이걸 무시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들도 키보드가 없는 걸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꽤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키보드가 없는, 그리고 모양도 아이폰과 비슷한 모델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디자인 특허권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의 소송은 몇 년을 끌었습니다. Blackberry는 스마트 폰의 대표 주자답게 끝까지 키보드 달린 전화기를 고수하다가 거의 도산을 맞을 뻔하기도 했지요.


키보드가 없는 스마트 폰들


아이폰이 한 건 키보드를 없애 버린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아이폰이 등장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콘퍼런스에서 만난 Nokia 의 디자인 이노베이션 담당 중역은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아이폰 때문에 큰일 났다는 거지요. 그 친구 말은, iPhone은 단순히 iPod + phone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겁니다. 즉, 애플은 인터넷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Nokia는 아직도 전화기를 만들어 팔고 있다는 자책이었습니다. 몇 년 후, Nokia는 결국 문을 닫고 주인이 바뀌었지요.


그 동안 기존의 메이커에 추가해서 화웨이, 샤오미, Oppo 등의 많은 업체가 등장했고 기술도 엄청난 진보를 이루어왔지만, 지금은 아주 소수의 모델만 빼고는 모두  아이폰의 형태와 대동소이한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폰이 만든 아키타입 (Architype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거지요. 화면이 더 커지고, 곡면 스크린이 등장하고, 홈 버튼이 뒤로 가거나 없어지고, 카메라 화질이 더 좋아진 등등의 개선은 있지만, 아직 iPhone-like 스마트 폰들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애플의 제품 혁신이 주춤해진 아직도 이를 넘는 새로운 de-sign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iPhone의 초기 워킹 프로토타입


다들 아는 이 이야기를 굳이 적은 것은, 새로운 스마트한 통신 환경을 ‘달’이라고 하고, 애플이 만든 아이폰은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한다면 모든 디자이너 중생들이 답답하게도 그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 ‘손가락’이 나타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메이커들이 만든 것이 키보드 달린 전화기였다면 애플이 생각한 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아이폰 초기의 워킹 프로토타입을 보면 단순히 더 나은 전화기나 더 스마트한 전화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017년 하반기에 애플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iPhone 8이라고 내놓은 것은 예전 iPhone 4에서 이미 했었던 디자인 - 유리로 만든 뒤 커버 - 을 iPhone 7에 가져다 붙였고, 베젤이 없는 모델인 iPhone X는 삼성전자의 안티 아이폰 광고로 더 유명해진 ‘노치’ 디자인을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사고, 또 정직하지 못한 디자인이라는 글도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다들 애플의 혁신이 사라졌다고 개탄을 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애플 내에서 성철 스님 역할을 했던 스티브 잡스가 없으니 달을 쳐다본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 해 졌지요.


Apple iPhone X


삼성 갤럭시 광고 Growing up 캡쳐

한데! 벌써 이 웃음거리였던 노치 디자인을 가진 스마트 폰이 열 가지도 넘게 만들어졌고 또 계속 나올 거라고 합니다. 광고에서 이 노치 디자인을 대놓고 디스한 삼성전자는 다음에 어떤 디자인을 내 놓을지 궁금합니다.노치 디자인 뿐만이 아니라, 베젤의 단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플이 내 놓으면 다른 메이커들이 곧바로 따라합니다. 애플은 이제 소송을 걸기도 지친 모양입니다. 아니면 일일이 소송을 걸어봐야 소용 없다는 걸 배운 걸 수도 있구요. 뿐만아니라 애플도 남들 따라하기 바쁩니다. 스크린이 커진 것도, 카메라를 여러개씩 다는 것도 다 남들이 이미 한 걸 따라하는 겁니다.


왜 기업들이, 또 디자이너들이 iPhone X의 최대의 약점이라고 하는 노치 디자인을 따라하는 걸까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하던 iPhone이 약간 움직이니까 그 손가락을 보던 수많은 눈들이 곧바로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전면 카메라와 풀 스크린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노치 디자인밖에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는데 먼저 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애플이 뭘 해도 - 좋든 나쁘든 - 곧바로 비슷한 디자인들이 줄지어 만들어질 겁니다.


'디자인 안하는 디자이너'나 '용기 없는 디자이너'는 제게는 동의어입니다. 달을 볼 용기가 없는 디자이너, 달을 볼 생각도 안하는 디자이너는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생각이 없거나 용기가 없는 디자이너입니다.


이런 공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은 스마트 폰 디자인에만 국한된 건 절대 아닙니다. 자동차, 가구, 패션, 기타 모든 분야에서 달은 안보고 몰려다니는 디자이너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맨날 다른 회사가 뭐하나 곁눈질만 하지 말고 이따금 마당에 나가서 달을 한 번씩 쳐다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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