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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01. 2015

봄날은 간다

봄날이 가듯, 그렇게 사랑도 간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이 남긴 엔딩 내레이션입니다. 죽음과 맞닿은 정원의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는 대사였죠. 그래요, 대부분의 사랑은 그렇게 추억의 꼬리표를 달고 먼지를 덮은 채 가슴 한 켠에 쌓이게 마련입니다. 화려한 봄날이 가듯 그렇게 스러지고 마는 것이겠죠. 그렇기에 정원은 고마웠던 것입니다. 그녀와의 사랑을 봄날인 채로 간직하고 눈감을 수 있어서……

<봄날은 간다>에서 허진호 감독은, 전작에서 영원의 시간 속에 묶어 놓았던 아름다운 사랑을 관객들의 아픈 추억 사이로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로, 잔물 소리로, 인경 소리로 다가서더니 이내 한물간 유행가의 구슬픈 자락으로 멀어져 가더군요.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박재삼, ‘자연(自然)’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채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이에 봄날의 꽃나무처럼 활짝 피어나죠.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건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에 감사하고 오래도록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길 바랄 뿐이죠. 마치 상우가 들릴 듯 말 듯한 자연의 소리들까지도 녹음테이프 속에 담아 두려고 하는 것처럼, 사랑이란 감정을 붙잡아 두는 것을 욕망한답니다. 자연스레 다가오는 사랑에는 인자하지만, 멀어지는 사랑에는 너그럽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그 욕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落花)’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상우가 은수에게 물었죠. 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묻고 싶습니다.

“그토록 화려하던 봄날이 어떻게 이토록 허망하게 끝날 수 있니?”

억지스런 연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 두 문장은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군요. 사랑이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별 이유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첫사랑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때문이겠죠.

흔히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술 마시고, 취해서 전화하고, 늦은 밤 그의 집으로 찾아가고, 한낮에도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멍하게 지냅니다. 그러면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을 느끼죠. 그 방황의 순간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는 시간이기보다는 사랑의 상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가는 봄을 되돌릴 수 없듯, 사랑을 붙잡아 두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그 아픔의 시간 뒤로 우리는 성숙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다시 찾아온 은수를 보내는 상우의 모습에서 앳된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죠. 그 모습이 그리 어둡지는 않더군요. 오랜 여행 끝에 자연과 친해진 사람의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요?

이제 제 주위엔 그런 상우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거, 그게 세상을 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새로 돌아오는 봄날의 깊은 맛을 가슴 속 깊이까지 음미하는 것, 제가 느끼는 인생이라는 자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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